[국학이야기]삼교의 덕을 담은 화랑도

한민족의 얼을 담고 있는 체험과 수련의 덕목

“화랑은 한때 신라가 크게 일어난 원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후세에 한(漢)문화가 발호하여 사대주의파의 사상과 언론이 사회의 인심, 풍속, 학술을 지배하여 온 조선을 들어 지나화(支那化)하려는 판에 이에 반항 배척하여서 조선이 조선되게 한 것이 이 화랑이었다. 송도(松都) 중엽 이후로는 화랑의 여맥이 아직 없어지지 아니하여 비록 직접으로 그 감화를 받는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간접으로 화랑의 유풍 여운을 받아 가까스로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온 것은 화랑이었다. 그러므로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사를 말하려 함은 골을 빼고 그 사람의 정신을 찾음과 같이 어리석은 일이다.” (단재 신채호, 조선상고사 제9편)

조선이 조선되게 했다는 것은 조선의 얼이 살아 있는 조선을 말한다. 그 조선의 얼을 신채호는 화랑도로 정의하고 있다. 화랑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한민족의 얼을 담고 있는 화랑도(花郞道), 곧 풍류도(風流道)를 뜻한다. 단재는 “화랑은 본래 상고 소두제단의 무사, 곧 그때에 선비라 칭하던 자인데 고구려에서는 조의를 입어 조의선인이라 하고 신라에서는 미모를 취하여 화랑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원화(源花)를 폐지하고 화랑으로 다시 일으킨 것은 신라 24대 진흥왕이었다. 그는 나라의 중흥을 위해서는 풍월도, 곧 화랑도를 일으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나라의 주체성과 중흥의 요체가 화랑도에 있다는 얘기다. 그것은 무엇일까?

일연은 삼국유사에 이렇게 기록했다. “왕(진흥왕)은 또한 천성이 고상하고 멋이 있어 크게 신선을 숭상하여 여인들 가운데 아름다운 자를 가리어 원화로 받들었다. 이는 무리를 모아 인물을 선발하고 효제충신(孝悌忠信)으로 가르치려 함이었으니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큰 요체였다.”

진흥왕이 화랑도를 일으킨 까닭

다시 말해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의 핵심은 효도와 우애, 충성과 신의라는 것이다. 이것은 최치원의 ‘난랑비서’에 나타난 바로 그 현묘지도(玄妙之道)인 풍류이며 화랑이다.

‘난랑비서’는 “그 교의 기원은 선사(先史)에 자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이는 삼교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한다. 집에 들어오면 효도하고 나아가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말 그대로이며, 그 함이 없는 일에 처하고 말없는 교를 행함은(處無爲之行不言之敎) 노자의 가르침 그대로이며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선한 일만 행함은(諸惡莫作諸善奉行) 석가의 가르침 그대로다”라고 적고 있다.

때문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한량(閑良)의 풍류가 아니다. 그것은 유·불·선 삼교의 덕목을 담고 있는 현묘한 도였다. 현묘하다는 것은 체험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경지다. 체험은 수련의 과정이다. 화랑은 남녀가 어울려 가무와 명산을 유람하는 화랭이가 아니었다. ‘이국대요(理國大要)’인 효제충신의 중심사상이 풍류였다. 화랑은 풍월도를 이수한 청소년에서 장년까지의 집단이었다. 이들은 속세를 등진 신선을 추구하지 않았다. 나라와 백성을 위한 현실의 신선이었다. 때문에 그들의 수행은 사회와 국가를 위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효제충신은 우리의 천지인 합일사상이 삼교를 수용한 것이다.

<이형래 / 세계역사문화연구소장>

(뉴스메이커 2005-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