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역사의 비밀은 없다"

충남 공주시 외곽 웅진동에 자리한 국립공주박물관 2층 문화재보존처리실. 외부인 통제구역인 이곳에 들어서면 한 대에 2,000만 원에 이르는 광학현미경 등 각종 첨단장비가 즐비하다. 이곳에서 하늘색 가운을 입은 문화재보존분석팀이 국보급 문화재를 분석하고 있다.

오는 10월 재개관 예정인 국립중앙박물관을 제외하고 현재까지는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인 공주박물관은 한국 고고학 사상 최대 발굴 성과로 꼽히는 백제 25대 무령왕(재위 501∼523)릉의 유물을 중점적으로 관리·전시·보존·분석하는 곳이다.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무덤 중 주인공이 밝혀진 유일한 고분이다. 무령왕릉은 1971년 발굴되었는데, 1400여 년 동안 잠을 자던 3,000여 점에 이르는 유물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었다. 무령왕릉이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에서 중요한 이유는 무덤의 주인공과 축조 연대를 뚜렷이 알 수 있는 왕과 왕비의 지석(誌石)이 출토됐기 때문이다.

경주에 숱한 신라 고분이 있지만 무덤 주인과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무령왕릉의 지석에서 나온 기록들은 <삼국사기>와 정확히 일치했다. 그래서 현재 고고학계는 삼국시대 유물을 무령왕릉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연대를 가늠하고 있다. 고대사 연구에서 무령왕릉 유물이 가늠자가 된 것이다. 이 때문에 무령왕릉에서 나온 나뭇조각과 못 하나까지도 다른 지역유물의 역사성을 연구하는 데 결정적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무령왕릉 유물 통해 고대 생활상 규명

그러나 무령왕릉은 1973년 발굴보고서가 나온 이후 학문적 성과가 없었다. 이후에는 새로운 사실을 밝혀낸 연구가 전무하다시피 했다. 30여 년 전 사용한 분석방법은 육안 분석과 ‘파괴 분석(문화재를 파손해 성분을 분석)’이 유일했다. 그러나 30년 동안 고고학은 과학의 발달을 응용하면서 눈부시게 발전했다. 문화재를 파괴하지 않고 유물에 광선을 쏘아 성분을 분석하는 첨단 장비가 속속 등장했다.
이런 분석 장비를 동원하면 같은 유물이라도 과거에는 알 수 없었던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가령 무령왕릉에서 나온 금관의 순도와 구성 성분을 분석해 원산지인 금광 위치까지 추적할 수 있다. 이전에는 유물의 연대 추정을 위해 유물 성분을 분자 단위까지 분석했으나 이제는 원자 단위까지 분석할 수 있다.

지난해 공주박물관이 새로 문을 열기 전에는 이런 분석이 불가능했다. 장비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옛 박물관이 턱없이 좁아 유물 전시공간조차 모자랐던 탓이다. 공주박물관 학예연구실과 문화재보존분석팀은 첨단장비가 확충된 새 박물관으로 이사하면서 무령왕릉 출토 유물에서 새로운 사실을 속속 밝혀내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왕비의 신발 안쪽에 붙어 있던 직물 조각을 발견해 냈다. 이 직물은 왕비의 시신을 염할 때 발을 감쌌던 것이다. 이것을 분석하면 삼국시대의 의생활을 그려낼 수 있다.

또 돌로 만든 ‘진묘수(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의 엉덩이 부분에 먹선이 그려져 있는 것을 새로 발견했다. 기존에는 이 진묘수의 입술에 화장품을 발랐다는 것만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진묘수의 엉덩이에 먹선을 그린 이유를 밝히는 것이 공주박물관의 새로운 과제로 등장했다.   

첨단 분석기술로 고대사 연구에 앞장

공주박물관 윤태영 학예연구사는 “현재 국내의 다른 박물관들은 문화 이벤트 위주로 사업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공주박물관은 새 박물관으로 이사하면서 유물을 첨단기술로 새로 분석해 모르던 사실을 밝혀내고 정리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이는 백제사와  한국고대사 연구에 초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공주박물관은 새로운 유적 발굴 조사, 해외 문화재 조사를 통한 학술연구활동도 펴고 있다. 그동안 공주박물관이 발굴 조사한 유적으로는 청동기시대 대표적 방어 취락인 부여 송국리(松菊里) 유적, 원삼국(原三國) 초기 백제 무덤인 공주 하봉리(下鳳里)와 천안 화성리 유적, 공주 남산리 유적, 백제 시기의 산성인 대전 월평동 유적, 백제 시기의 제사 취락지인 공주 정지산 유적 등이 있다. 또 일본에 널리 퍼져 있는 백제 문화재에 대한 조사도 연 1회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공주박물관은 인력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전국 최대 규모로 박물관을 지었지만, 정작 핵심 인력인 학예연구사가 단 3명밖에 없다. 이들 학예연구사마저 발굴이나 세미나 등으로 출장이 잦은 편이다. 따라서 한 명이라도 자리를 비우면 전국 최대 규모 박물관을 학예연구사 2명이 감당해야 한다.

국립공주박물관은 일제 강점기에 공주지역 사람들이 백제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 만든 공주고적보존회가 모태다. 1940년 공주사적현창회에서 조선시대 관아인 선화당을 이용해 박물관 사업을 시작했고, 광복 이후 1946년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을 거쳐 1975년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승격했다.

공주사적현창회 시기부터 박물관으로 이용된 선화당은 1972년 현대식 건물이 세워질 때까지 이용되었다. 이 무렵 공주박물관은 존폐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굳이 공주에 박물관을 유지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이 쏟아졌고, 실제로 유물을 서울로 옮기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런데 이 무렵 ‘사건’이 터졌다. 1971년 한국 고고학 사상 최대·최고의 성과라고 할 수 있는 무령왕릉이 등장한 것이다.
당시 국립박물관장이던 고 김원룡 박사의 회고담을 보면 그 발굴의 의미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 있다.

“신라 고분과 달리 고구려나 백제 고분은 출입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열이면 열 모두 도굴됐다. 그런데 입구의 벽돌 윗줄을 떼어내고 구멍으로 들여다보니 터널형 연도에 항아리가 널려 있고 돌짐승 한 마리가 지석 두 장을 앞에 놓고 우리를 노려보고 있지 않은가? 처녀발굴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덜컹거렸지만 내색하지 않고 벽돌을 떼어갔다. 중간쯤에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지석 첫머리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고 적혀 있었다. 숨이 멎을 듯했다. 무령왕이었다. 고고학자의 가장 큰 소망은 연대가 써 있고 명문이 있는 유물을 발견하는 것이다. 꿈속에서나 가능했던 발굴이 현실로 나타났다. 일본의 한 고고학자는 10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행운이라며 나를 축하해 주었다.”

이후 무령왕릉 유물을 수습한 국립공주박물관은 전시와 각종 문화행사로 지역 사람들은 물론 전 국민의 문화교육기관 역할을 했다.
그러다 최근 눈부시게 발달한 고고학 장비와 새로운 연구 방법, 또 증가하는 발굴 문화재와 국민의 문화체험 욕구를 수용하기 위해 2004년 5월 공주시 웅진동에 새롭게 문을 열었다.  

(국정브리핑 2005-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