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안방극장서 부활" 방송작가 이환경씨

1년 남짓 끊었던 담배를 다시 물었다.방송 작가 데뷔 22년 만에 처음으로 겪은 중도하차. 분노와 좌절감이 한데 뒤엉켜 가슴을 짓눌렀다. 휴대전화 전원을 끊고 깊은 산속 절로 향했다. 목탁 소리에 잠이 들고, 새벽녘 새소리에 잠이 깼다. 그렇게 4개월이 흘렀다. 다시금 몸이 근질근질해졌다. 눈앞에 영상이 그려졌다. '쟁이'의 숙명이란 그런 거였다. 방송작가 이환경(55)씨. 외압 시비 속에 끝마쳤던 드라마 '영웅시대'의 아픔을 딛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이번에는 광활한 중국 대륙을 호령한 고구려 연개소문의 활약상을 담은 SBS '대 막리지(가제)'다. 오픈 세트를 지을 장소를 알아보기 위해 강화도로 간 그를 14일 찾아갔다.

-'야인시대' '영웅시대' 등 최근엔 근.현대사를 주로 다뤘다. 왜 사극으로 돌아갔는가.

"100회 예정했던 '영웅시대'를 70회에서 끝냈다. 칠삭둥이라고 해야 할까. 그때 다짐했다. 이 정권에서 현대극은 쓰지 않기로."

-왜 연개소문인가.

"우리 민족의 웅혼한 기상을 나타내려거든 광개토대왕이 어떠냐고 주위에서 말했다. 그러나 광개토대왕에 대한 역사적 사료는 남아있는 게 별로 없다. 또한 단순한 영웅담보단 굴곡 많은 인간과 역사에 관심이 가는 게 드라마 작가의 본능이다."

-연개소문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왕위'라는 자리보단 실질적인 '권력'을 차지한 인물이다. 고려시대 무신 정권처럼, 허수아비 왕을 세워둔 채 독재자로 군림했다. 다만 대륙 정벌의 큰 꿈을 갖고 실제로 행동했다는 점에서 영웅의 면모를 보였다."

-어떤 식으로 그릴 것인가.

"초반은 을지문덕 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중반을 지나면서 연개소문의 활약상이 그려진다. 중국 본토로 들어가 당 태종이 무릎을 꿇는 장면도 그릴 것이다."

-연개소문이 중국을 정벌했다는 역사적 근거가 있는가.

"중국 경극을 보면 연개소문은 가장 두려운 존재로 묘사돼 왔다. 중국인들은 역병이 돌면 연개소문의 얼굴이 그려진 부적을 집 앞 대문에 붙이곤 했다. 그만큼 중국인들에게 연개소문은 공포와 경계의 대상이었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엔 연개소문이 당 태종을 격파해 중국 대륙을 정복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사는 아니지만 '한단고기'엔 좀 더 구체적으로 당 태종 이세민이 도망가고 항복하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만이 역사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논란이 될 만한 역사적 사건을 일방적으로 그리면 외교 분쟁이 되진 않을까.

"우리 역사상 중국에 큰소리 떵떵 치던 시기는 고구려말 그때뿐이었다. 중국 눈치 살피지 않던 때가 언제 있었던가. 최근 '동북공정' 등의 움직임은 과거 중국 패권주의의 부활이다. 이 드라마로 국민들이 기죽지 말고 고구려인의 웅대한 기백을 느꼈으면 좋겠다. 그래도 중국에서 압력이 가해온다면? 그건 정부가 막아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평상시 그는 아침은 거르고 점심은 술로 때운다. 하루에 저녁 한 끼만 먹는다. 술기운으로 작품을 쓸 때도 있다고 말했다. 이번 만남에서도 변함없이 몇 순배가 돌았다.

-시간이 좀 지나지 않았나. '영웅시대'때 받은 압력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작품에 들어가기 전부터 몇 차례 전화가 왔다. 여권 실세였고, 나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다. '괜히 나서지 마라. 대권 주자를 미화시키지 마라'등의 내용이었다. 작품을 시작하니 압력이 좀 더 거세졌다. 그래서 이렇게 얘기했다. '형님, 지금 흔들리면 제가 죽습니다. 객관적 사실과 양심에 따라 쓸 뿐입니다. 이렇게 나오면 형님이 압력을 행사했다는 걸 폭로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 방송국에서 여러 소리가 나왔다."

-누구인가.

"지금 그분은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해 있다. 내가 나서서 다시 못질을 해야겠는가. 그냥 L모씨 정도로 해두자."

그는 직접 대본을 쓰지 않는다. 대신 구술을 하면 다른 사람이 받아 적는다. 구술할 때 그는 신 들린 듯 대사들을 토해낸다. 그는 "전체적인 윤곽을 잡고 작품에 돌입하면 그때부턴 내가 쓰는 게 아니다. 주인공이, 역모자가 내 안으로 들어와 작품을 이끌어간다"고 말한다.

-연개소문은 언제부터 방영되는가.

"이르면 내년 초부터 촬영에 들어간다. 오픈 세트 비용을 제외한 회당 제작비가 2억원에 육박한다. 100회를 예정하고 있으니 SBS로선 엄청난 모험이다. 한반도와 중국을 무대로 한 역대 가장 큰 규모의 대하드라마가 될 것이다."

(중앙일보 / 최민우.전인성.변선구 기자 2005-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