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 교사가 정리한 '우리 문화재 수난사'

원로 불교미술사학자 황수영(黃壽永.87) 박사는 일전에 이런 요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일제 때 석굴암 수리공사가 잘못되어 이를 바로잡기 위해 해방 이후 다시 수리공사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석굴암 수리공사를 (다시) 하면서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던 중 그 벽판으로 사용한 '석굴중수상동문'(石窟重修上棟文)을 발견했다."

25년 전, 어떤 강연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고는 피가 솟구친 젊은이가 있었다.

중앙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서울 노량진 대방중에 재직하고 있는 정규홍(丁圭洪.50) 교사가 그 주인공으로, '우리 문화재 수난사'(학연문화사)라는 책은 피가 거꾸로 솟는 그 때의 경험에서 촉발돼 나온 노작(勞作)이다.

부제는 '일제기 문화재 약탈과 유린'인데 그런 행위 주체는 일본(인)이다.

이와 성격이 비슷한 책으로 미술평론가 이구열 씨가 집필한 '한국문화재 수난사'(1996년 돌베개 복간)가 있으나, 그보다는 훨씬 자료 조사가 방대하고 치밀하며, 무엇보다 풍부한 각주로써 주장들을 뒷받침하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책 전편을 통해 정 교사는 1876년 개항과 더불어 조선에 밀어닥친 조선 문화재 수난사를 1945년까지 면밀하게 추적한다.

물론 모든 면에서 이 책이 만족감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년은 한국고고학계가 스스로 설정한 한국 근대고고학 100주년이 되는 해다. 경주 검총이라는 고분이 발굴된 1906년을 한국 근대고고학은 생일로 잡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한국 근대고고학 100년사 중 적어도 그 상반기 절반의 골격을 잡은 셈이다.

한국 근대 문화재사(史) 여명기인 1876년 이후 한국병합 즈음까지 일본에 의해 자행된 조선 문화재 수탈사를 개괄한 다음, 정 교사는 본격적인 일제의 문화재 수탈사로 들어간다.

한국고고학은 그 본격적인 탄생은 식민지시대 초반기에 조선총독부가 대대적으로 시행한 고적조사를 계기로 꼽아야 한다. 이미 병합 이전 도쿄제국대학 교수 세키노 다타시(關野貞)에 의한 '조선 고건축조사'를 실시한 일본은 병합 이후에는 대대적인 고적조사에 박차를 가한다.

이에 의해 평양 일대 낙랑 고분이 발굴됐으며, 지금의 북한과 만주 소재 고구려 유적들도 이때야 비로소 알려지기 시작했다. 평양과 함께 조선총독부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곳이 신라유적이 밀집한 경주였다. 그 외에도 총독부는 가야 유적과 백제 고도들인 부여ㆍ공주 등지에 대한 각종 조사도 병행했다.

이런 조사에는 단순한 현지 실사도 있었으나 많은 경우에 발굴을 동반했다.

이런 발굴조사가 일으킨 선풍에 의해 조선 각지에서는 도굴이 빈발했으며, 아울러 전적이라든가 도자기에 대한 수탈도 전례 없이 성행하게 되었고, 그렇게 수집된 문화재 중 상당수가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아울러 조선왕조 신성성의 상징이던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은 박람회장으로 변하는가 하면, 창경궁은 동물원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가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식민지시대 문화재 관련 역사를 정 교사는 이 책에서 확실한 증거들을 들이대면서 총정리를 꾀하고 있다.

식민지시대에 일어난 모든 문화재 관련 정책이라든가, 도굴 혹은 수집 열풍을 비롯한 모든 문화재와 관련되는 측면이나 현상을 '일제의 약탈과 유린'이라는 측면에서만 접근하려는 태도가 한편에서는 거슬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번 책을 통해 정 교사가 수집하고 정리한 방대한 자료들에 비하면 그것은 옥의 티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544쪽. 2만8천원.

(연합뉴스 / 김태식 기자 2005-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