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가미의 환상여행](28) 동북아⑤ -천명(天命)적 세계질서의 붕괴

안녕하세요. 류가미입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간다님과 두둥둥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질문했던 티베트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할까 합니다.

지난 시간에 저는 원시 티베트 족이 남방계 몽골로이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원시 티베트 족을 남방계 몽골로이드로 보는 것이 의아한가 봅니다.
하긴 그럴 만도 합니다.
눈 덮인 고원지대에 사는 현지 티베트인들은 중국사람(남방계 몽골로이드)들보다 우리(북방계 몽골로이드)와 더 가까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석기-청동기 시대 중국 서쪽에 살았던 원시 티베트 사람들은 지금의 티베트 사람들과 좀 다릅니다.
마치 원시 퉁구스 족이 지금 알타이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 알타이 공화국에 사는 사람들은 북방계 몽골로이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인들과 혼혈들이 생겼기 때문이죠.

뷔름 빙하기 시절 북방계 몽골로이드가 시베리아 지역에 갇혀 있는 동안, 인도 북부와 티베트 지역 그리고 버마와 타이 지방에는 남방계 몽골로이드가 살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만 년 전, 길고 긴 빙하기가 끝나고 지구의 기후가 변화기 시작합니다. 덕분에 메마르고 황량했던 중국 대륙도 사람들이 살만한 곳으로 바뀌게 되지요.
그 때부터 시베리아 지역에 있던 북방계 몽골로이드와 인도 북부와 티베트 그리고 버마와 말레이 반도에 살고 있던 남방계 몽골로이드가 중국 대륙으로 이동을 합니다.

빙하기가 끝나고 이동을 시작하면서 그 전에는 서로 따로 떨어져 살았던 북방계 몽골로이와 남방계 몽골로이드가 충돌하게 됩니다.
북방계 몽골로이드들 중 일부는 중국 북부를 거쳐 요동과 만주 쪽으로 이동을 합니다.
그리고 그 곳으로 북상하고 있던 남방계 몽골로이드와 만나게 되지요.

북방계 몽골로이드 중 다른 일부는 티베트, 네팔 지역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이미 티베트와 네팔 등지에 살고 있던 남방계 몽골로이드와 섞이게 되지요.
저는 네팔과 갠지스 강 유역에 있었다는 전륜성왕의 나라는 히말라야 산맥을 타고 내려온 북방계 몽골로이드가 세운 나라였다고 봅니다.

북방계 몽골로이드는 크게 두 가지 어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알타이어어족이고 또 하나는 우랄 어족입니다. 때에 따라서 이 두 가지 어족을 묶어 우랄- 알타이어 어족이라고도 합니다. 남방계 몽골로이드도 크게 두 가지 어족으로 나뉘어 집니다.
그 하나는 티베트- 중국어족이고 다른 하나는 말레이폴리네시아어족입니다.

신석기-청동기 시대 중국 대륙에 살았던 원시 퉁구스 족은 알타이어 어족에 속합니다.
원시 투르크 족 또한 알타이에 어족에 속하지요. 반면 원시 티베트족은 티베트-중국어족에 속하고 원시 타이족은 말레이폴리네시아어족에 속합니다.

잠시 고대 중국에 있었던 각 민족들 사이의 합종연횡을 살펴봅시다.
중국 최초의 청동기 국가 상나라는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원시 퉁구스족과 말레이폴리네시아어족에 속하는 원시 타이족의 연합국가였습니다.
이런 상나라를 무너뜨린 주나라는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원시 투르크 족과 티베트- 중국어족에 속하는 원시 티베트 족이 주도한 나라였습니다.

주나라를 세운 주족(周族)은 원래 중국 서북부 산악지대 살던 원시 투르크족이었습니다.
그들은 본래 적인(狄人) 혹은 견융(犬戎)이라고 불리던 족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족은 지금의 산시성(陝西省) 기산 근처로 남하하면서 상나라에 복속되어 제후국이 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주(周)는 별로 힘이 없는 상나라의 부속국가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周)가 문왕 때 이르러 갑자기 팽창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문왕이 태공망 여상(呂尙)을 얻음으로써 주(周)가 강대해졌다고 합니다.
태공만 여상은 우리가 흔히 강태공이라고 부르는 사람입니다.

강태공이라는 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태공망은 강족(姜族) 출신입니다.
그런데 이 강족이 바로 원시 티베트족 계열입니다. 문왕이 태공망을 얻어 강해졌다는 말은 주족과 강족의 연합, 다시 말해 원시 투르크족과 원시 티베트족의 연맹이 성립되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주 나라를 세운 티베트 족과 원시 투르크 족의 연맹을 보통 하화족(夏華族) 이라고 합니다.
역사학자들은 이 하화족이 한족의 시조라고 봅니다. 이상하게도 주나라 이후, 중국문화의 원형이 형성된 한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왕조는 서쪽에서 일어납니다.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秦)나라도 그랬고 그 뒤를 이어받은 한나라 역시 그랬죠.
현재 중국어가 티베트-중국어족에 속한다는 것은 원시 티베트족이 중국의 문화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 원시 티베트족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고 이제 본격적으로 주(周)나라에 대해서 다루어볼까 합니다.
기원전 11세기 문왕이 태공망을 얻고 주나라는 갑작스럽게 강해집니다.
문왕이 죽자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상나라 주왕을 정벌하러 나섭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주는 상의 제후국이었습니다. 일개 제후가 왕을 친다는 것은 명백한 하극상이었지요.
그때 무왕이 내세운 명분이 바로 천명(天命)입니다.

천명은 하늘의 명령을 뜻합니다.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샤먼킹은 하늘의 명령을 받들어 그것을 세상에 실행합니다.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샤먼킹의 권력은 최고신인 하늘과 소통하는 그의 능력과 하늘이 그에게 명령한 것을 세상에 실행하는 그의 능력에 달려있습니다.
하늘의 뜻을 아는 것을 천명(天命)을 안다고 합니다. 그 천명을 세상에 실행하는 것을 덕(德)이라고 합니다.
사실 전설속의 삼황오제는 천명에 따라 덕치(德治)를 구현한 성인(聖人)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왕이 덕치를 하는지 아닌지는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가 민심을 얻고 있느냐 잃고 있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천심은 곧 민심이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 왕에서 마음이 떠났다는 것은 하늘이 그 왕에서 마음이 떠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왕은 자신이 상나라를 치는 것이 하늘의 명령(天命)에 따른 것이라고 말합니다.
상나라의 주왕이 덕을 잃었기 때문에 민심이 그를 버렸다는 겁니다. 하늘은 주왕을 대신해 자신의 명령을 실행해줄 다른 사람을 찾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주왕조라는 거죠.
사람들은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킨 이 사건을 은주혁명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은에서 주로 하늘의 명을 고쳤다는 것이지요.

은주혁명 당시, 상나라의 주왕을 치러가는 문왕을 말렸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그 유명한 백이(伯夷)와 숙제(叔薺)입니다. 백이와 숙제는 형제로 고죽국(孤竹國)의 왕자들이었다고 합니다.

뒤에도 고죽국이 한번 더 나올 것 같아,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가 볼까 합니다.
일반적으로 고죽국은 요동지방(영평부, 永平府)에 있던 상의 제후국으로 여겨집니다. 관자(管子)라는 책에 이 고죽국은 기원전 6세기 경, 제나라 환공에 의해서 멸망되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고죽국은 우리 민족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자 조선의 유적에서 고죽(孤竹)이라고 쓰인 청동기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또 수나라 때 배구전(裴矩傳)이라는 책에는 고죽국이 고구려라고 하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고죽국은 어떤 나라였을까요?
그러나 아직까지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고죽국 또한 역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수수께끼 중 하나라고 할까요?

자 이제 다시 이야기를 백이와 숙제에게로 돌려보죠.
고죽국에 왕자였던 백이와 숙제는 이상하게 자신의 나라에 남아있지 않고 객지를 떠돕니다.
그것은 서로 왕위를 양보한 탓이지요.
형이었던 백이는 자신의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합니다.
그러자 숙제는 형이 양보한 왕위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백이와 숙제는 서로 왕을 안 하겠다고 하는 탓에 왕위는 다른 형제에게로 돌아가고 그들은 고죽국을 떠나 방랑하는 신세가 됩니다.
백이와 숙제는 출병하는 무왕 앞에 나타나 그에게 상나라를 치지말 것을 간청합니다.
그러나 무왕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상나라를 칩니다.

상나라는 기원전1046년에 멸망하게 됩니다. 문왕은 호경(鎬京)에 수도를 정하고 주왕조를 열었습니다.
상이 멸망한 후, 백이와 숙제는 타락한 주나라에서 나는 곡식을 먹을 수 없다고 해서 곡식을 끊고 수양산에 올라가 고사리를 캐어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때 그들이 지었다는 노래가 있는데 이렇습니다.

저 서산(西山)에 올라 산중의 고사리나 꺾자구나
포악한 것을 포악한 것으로 바꾸었으니
그 잘못을 알지 못하는구나.
신농(神農), 우(虞). 하(夏)의 시대는 홀연히 지나가버렸으니
우리는 장차 어디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아! 이제는 죽음뿐이로다.
쇠잔한 우리 운명이여!


훗날 문왕은 백이와 숙제가 의인이라고 생각해서 그들을 다시 찾습니다.
그러나 한번 떠난 그들은 결코 돌아오지 않죠. 그들이 상나라의 멸망을 슬퍼하는 것은 주왕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었을까요?

유가(儒家)에서는 이러한 해석을 내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백이와 숙제 또한 주왕이 덕을 잃고 민심이 상나라에서 떠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왕의 주나라가 주왕의 상나라에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포악한 것을 포악한 것으로 바꾸는 것에 불과했으니까요.
상나라가 덕을 잃게 된 것은 상 왕조가 하늘이 주신 권력을 자신의 이익에 따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왕조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주왕조는 군신관계였던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자신의 가문이 천명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킨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키지 못한다면 주는 다른 제후국들의 반란을 막을 논리가 없어집니다. 동시에 주왕조는 종법 제도와 봉건제도를 통해서 왕실의 권위를 높입니다.
주나라 왕은 아예 자신을 천자(天子)라고 부릅니다. 이제 왕은 하늘의 명령을 받아 그 뜻을 세상에 실천하는 성인(聖人)이 아니라 지상에 군림하는 절대적인 신의 아들(天子)입니다.
그리고 이 천자의 권력은 주 왕실의 장자들에게 대대로 세습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왕의 가문과 출생 순서이지 하늘의 뜻을 알고 그것을 실현하는 그의 능력이 아닙니다.

백이와 숙제의 이상은 다시 신농(神農), 우(虞), 하(夏) 시대의 성인들의 정치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옛날 성인들은 그들이 가진 덕 때문에 백성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이 하늘의 뜻을 실현할 덕이 없다고 판단한 사람들은 백성들이 왕으로 추대해도 왕위를 사양했다고 합니다.
백이와 숙제가 서로 왕위를 양보했다는 것은 그들이 이러한 성인정치의 전통을 지켰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그들이 애써 지키고자 했던 성인정치의 전통은 은주교체기에 이르러 끝나고 맙니다.
백이와 숙제의 절망은 바로 거기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스스로를 천자(天子)로 칭하던 주왕실의 권위도 영원하지는 못했습니다.
기원전 9세기 경부터 주왕조는 제후들의 이탈과 견융들의 침입으로 흔들립니다.
그리고 드디어 기원전 771년 주는 수도를 호경(鎬京)에서 지금의 서안 지역인 성주(成周)로 옮깁니다.
주나라가 호경에 수도를 두었던 시절을 서주(西周) 시대라고 하고 성주로 수도를 옮긴 이후를 동주(東周) 시대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동주 시대를 춘추 전국 시대라고 합니다.
수도를 성주로 옮기고 난 후부터, 주왕실은 제후를 통솔할 힘을 잃게 됩니다.
이때부터 중국 대륙의 실질적인 권력자는 주왕실이 아니라, 강력한 제후들이 됩니다.
수많은 제후들 중에서 부국 강병으로 힘을 얻은 유력자가 나타납니다.
이 유력한 제후는 왕을 높이고 오랑캐를 무찌른다는(尊王攘夷) 명분 아래 제후들 간에 동맹을 주도했습니다.
이러한 동맹을 회맹(會盟)이라고 하고 이러한 동맹의 맹주를 패자(覇者)라고 합니다.
춘추시대에는 다섯명의 패자가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제(齊)의 환공(桓公), 진(晋)의 문공(文公), 송(宋)의 양공(襄公), 진(秦)의 목공(穆公), 초(楚)의 장왕(莊王)입니다.
어쨌든 춘추시대의 다섯 패자들은 명목상으로나마 주의 봉건질서를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에 들어서면서 명목상으로나마 유지되던 봉건 질서도 끝이 납니다. 드디어 전국 시대가 시작된 것이죠. 전국 시대는 기원전 453년, 주나라 위열왕(威烈王)이 진(晋)의 유력한 귀족 한(韓),위(魏),조(趙)의 3씨를 제후로 봉한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후 주나라 왕은 왕으로서의 권위를 잃고 이제 작은 영토를 가진 제후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렇게 종법을 바탕으로 하던 주의 봉건 질서가 무너집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종법을 바탕으로 한 주의 봉건제도는 종교 제도이자 가족제도이며 국가제도입니다.
봉건 제도가 흔들린다는 것은 최고의 신인 하늘(天)을 정점으로 하는 종교제도가 흔들린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하늘을 조상신으로 섬기는 왕실의 권위가 흔들린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것은 하늘(天)의 자손인 왕이 그 방계 가문인 제후들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봉건제도가 흔들린다는 것은 종교, 가족 그리고 국가의 질서가 붕괴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지탱하는 모든 질서의 붕괴를 뜻합니다.

유명한 중국사학자인 앵거스 그레이함은 봉건질서가 무너진 전국 시대로부터 국가 유교주의라는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는 한(漢)나라 시대까지를 주목합니다.
그가 관심을 두는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까지의 시기를 기축시대(Axial age)라고 합니다. 중국의 사상적 축이 형성된 시기라는 뜻이지요.

천명을 바탕으로 한 세계 질서가 붕괴된 후,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대두된 가장 큰 화두는 어떻게 이 혼란을 수습하고 보편적인 세계질서를 회복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의 주장이 생겨납니다. 그 중 첫 번째는 다시 주 문왕, 무왕 그리고 주공 시절의 봉건질서로 돌아가자는 주장입니다. 바로 이것이 공자의 주장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백이와 숙제가 염원했던 고대 성인 정치로 돌아가자는 주장입니다.
바로 이것이 묵자의 주장이었습니다.
마지막은 나라도 작고 백성도 적었던 원시 농경 사회(小國寡民)로 돌아가자는 주장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노자의 주장이었지요.

공자는 문왕의 동생인 주공의 제후국인 노나라 출신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주나라의 제례(制禮)를 잇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화족 문화의 대변자라고 할 수 있지요. 반면 묵자는 백이와 숙제의 나라인 고죽국의 후예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상나라와 그 전에 있었던 하나라의 전통을 잇고 있습니다. 그는 원시 퉁구스족의 문화의 대변자였습니다.

반면 노자는 초나라 사람이었습니다.
초나라는 원시 타이 문화의 중심지였던 월나라를 통합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초나라는 다른 어느 나라 보다 원시 타이족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사실 노자는 원시 타이족의 문화의 대변자였습니다.

다음시간에는 공자, 묵자, 노자 이 세 인물을 중심으로 어떻게 유가, 묵가, 도가가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미 잘 알려진 공자나 노자 보다는 요즘 주목을 받고 있는 묵자를 중심으로 다룰 생각입니다.
원시 퉁구스족 문화를 바탕으로 한 묵자의 사상은 우리나라의 홍익인간 사상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어쩌면 묵자는 우리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어떤 힌트를 주게 될지 모릅니다. 그럼 다시 만날 다음주까지 평안하시길…….

덧붙임,
세니님, 쌍둥엄마님
프린트에 대해서 데일리 서프라이즈 측에 물어봤더니 개편 때문에 버그를 아직 다 못 잡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아마 버그 문제를 해결하게 되면 전처럼 무사히 프린트가 될 듯합니다. 그때까지 양해해주세요.

iamheretokyo님
문헌자료를 말씀해달라고 했는데 어느 쪽 문헌자료인지 몰라 대답하기가 그러네요.
요즘 제가 주로 참고하고 있는 자료는 조지프 니담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 풍우란의 ‘중국 철학사’ 그리고 그레이함의 ‘도의 논쟁자들’입니다.
사실 이런 책이 좀 부담스럽다면 기세춘의 ‘신세대를 위한 동양사상 새로 읽기’ 시리즈를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상나라 마지막 왕 주왕의 총희 달기, 여우의 정령이었다는 설이 있다 ⓒ http://www.people.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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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 류가미 2005-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