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국내성", 중국인 아파트 속 방치

국내성은 도심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있어 그사이를 두고 공동주택(아파트)이 들어서 있어 역사의식에 대한 그들의 의식을 의심케 했다.

성의 축조방식은 수원성의 축조방식과 매우 흡사해 적으로부터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학익(학날개)형태를 이루고 있다. 성의 정면에 압록강의 지류천을 마주하고 있어 어떤 형태로든 적이 하천을 건너 공격해 오게 만들어 1차적으로 적의 기운을 빼고 적이 성중앙을 중심으로 양쪽 성의 날개 중앙부에 들어왔을때 협공할수 있는 형태로 축조된 것으로 지혜로움을 엿볼수 있다. 광개토왕, 장수왕을 통해 고구려의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한 이곳은 곳곳이 고구려 유적의 보고다. 도시 중앙에 광개토대왕의 능과 장수왕의 릉을 중심으로 외곽지역의 야산일대에 크고작은 부족장들의 무덤이 7,000여기가 산재해 있다는 것이 동국대 윤명철교수의 주장이다.

최대의 영토확장을 한 광개토왕과 장수왕

광개토왕은 고국양왕의 장남으로 375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담덕(談德)인데 중국측 기록에는 안(安)이라 전하고 있다. 고국양왕 재위 3년인 386년 태자에 책봉되었고 391년 고국양왕이 죽자 고구려 19대왕으로 등극하였다. 재위기간 동안에는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나면서부터 기개가 웅대하고 활달한 뜻이 있었다고 한다. 광개토왕의 치적은 광개토왕릉비나 『삼국사기』를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는데 그의 시호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재위기간 동안의 가장 큰 업적은 영토 팽창에 주력하여 고구려의 세력권을 확대시켰다는 것에 있다.

392년 광개토왕은 즉위하자마자 남쪽으로는 백제 정벌을, 북쪽으로는 거란 정벌을 감행하였다. 특히 백제정벌에 큰 힘을 기울여 석현성을 비롯한 10개성을 함락시키는가 하면 같은해에 난공불락의 요새인 관미성을 20 여일 만에 함락시켜 백제와의 전쟁에 불을 붙였다. 이에 백제는 394년과 395년에 영토탈환을 위해 침공하였으나 각각 수곡성과 패수에서 고구려군에 게 밀려 퇴각해야했다. 이처럼 백제의 침입이 계속되자 광개토왕은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하여 396년 마침내 한강 너머 백제의 도성에까지 진격하였다. 고구려군이 한강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백제는 뒤늦게 군대를 도성에 집결시켜 고구려군을 막아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백제의 아신왕은 화친을 제의하였고 이 요구가 받아들여짐에 따라 백제는 고구려에 대해 영원한 노객(奴客)이 될 것을 맹세하였다. 고구려는 이 전쟁을 통해 한강 이북의 58성 700촌을 고구려 영토 내에 편입시켰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전리품을 획득하고 백제 왕족 및 대신을 볼모로 얻는 등 쾌거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백제의 아신왕은 영토 회복이라는 야심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군대를 증강하고 성을 쌓는 등 대고구려전을 위한 준비를 진행시켰으며 397년 왜에 구원병을 요청하기까지에 이르렀다. 399년 왜는 백제의 요청에 따라 고구려와 동맹관계에 있었던 신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광개토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신라에 파견하여 왜를 물리치고 가야지역까지 추격하여 왜 세력을 완전히 궤멸하였다. 신라 공략에 실패한 백제는 이후 다시 왜와 함께 고구려 영토인 대방고지 공격에 나섰으나 역시 실패하고 만다.

5세기에 접어들면서 광개토왕은 요동지역에 눈을 돌려 적극적으로 서방 진출을 꾀하였다. 이는 400년 후연의 왕 모용성이 고구려왕이 무례하다하여 군사 3만을 이끌고 고구려땅을 침입한 데서 본격화되었다. 후연은 이 선공으로 신성과 남소성을 빼앗고 주변 700여리의 땅을 넓혀 5천여호를 이주시킨 뒤 돌아갔다. 이에 광개토왕은 402년 숙군성을 공격하여 평주자사 모용귀를 도망치게 했고 404년 재차 후연을 침공하였다. 후연 역시 고구려에 대한 반격을 시도하여 405년과 406년에 각각 요동성과 목저성을 공격하였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후연과의 전쟁을 통해 요동지역을 확보한 고구려는 후연을 멸망시키고 등장한 북연과 우호 관계를 맺음에 따라 서방 진출을 일단락 짓는다. 광개토왕은 이 외에도 거란의 일부로 추측되는 비려, 숙신, 동부여를 정벌하여 복속시켰다. 이러한 왕성한 정복활동을 통해 광개토왕은 재위기간동안 서쪽으로는 요동을 확보하고 시무라렌강 유역까지 원정을 나갔으며, 동쪽으로는 목단강 유역으로부터 연해주 일원, 북쪽으로는 송화강 유역의 북만주일대, 남쪽으로는 한강 유역을 확보하는 한편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광개토왕은 대외 정복사업뿐만 아니라 평양에 9사를 창건하여 불교를 적극 권장하고 장사(長史), 사마(司馬), 참군(參軍) 등의 관직을 신설하여 체제 정비를 도모하는 등 내정에도 힘을 기울였다. 광개토왕의 내정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광개토왕릉비에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는 기록에 있어 광개토왕이 단순한 정복군주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광개토왕은 413년 39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능은 국강상에 마련되었으며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 하였다. 414년 능에 옮겨 묻고 능비를 세웠는데 능과 능비는 현재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남아 있다. 광개토왕릉에 대해서는 장군총설과 태왕릉설이 갈라져 있었으나 태왕릉의 분구 정상부에서 원태왕릉안여산고여구(願太王陵安如山固如丘)라고 양각한 명문전이 발견되어 대개 태왕릉을 광개토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장수왕 ( 394 - 491 ) 생애와 업적 고구려 제20대 왕으로서 이름은 거련이며 광개토대왕의 맏아들이다. 왕위에 오르자 진나라·송나라·위나라 등에 사신을 보내어 국교를 맺었으며, 서울을 평양으로 옮기고 남하 정책을 펴 나갔다. 475년에 백제를 공격하여 개로왕을 죽이고, 480년에는 신라 북부를 공격하여 고명성 등 7성을 빼앗았다. 남으로는 아산만에서 죽령까지 점령하였으며, 북으로는 중국 동북 지방 대부분을 차지하여,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큰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또한 내정 개혁에도 힘을 기울여 부족 제도를 지방 행정 제도로 고쳐 5부를 새로 설치하는 등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브레이크뉴스 / 황인석 기자 2005-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