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 메이커, 소서노

[김재희의 여인열전]

지금으로부터 2천여년 전, 서라벌의 자궁 남산에서 박혁거세가 알껍데기를 박차고 나온 바로 그 무렵, 만주의 랴오닝성에선 소서노라는 계집아이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조용하게 태어났다. 큰일을 도모할 준비였던지 청상과부 신세로 비류라는 사내애를 데리고 쓸쓸히 살아갈 적에 그녀 앞에 불쑥 나타난 고주몽은 겨우 신하 세명 끌고 이웃나라로 도망쳐온 주제에 자기는 천제의 아들과 물의 신 하백의 딸 사이에서 태어나신 귀하신 몸이라고 떠벌리며 백발백중 만주 벌판 최고의 궁사로 이름을 날려, 열살 남짓 누나였던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토착 세력가의 딸이었던 소서노는 주몽과 커플이 돼 별 볼일 없던 왕을 없애고 도읍을 옮겨 나라 이름을 고구려로 바꾼 뒤 일대의 부족들을 정복하며 점점 세력을 확장한다. 이 과정에서 소서노는 토착 세력의 분열을 잠재우고 주몽에게 힘을 집결시키는 킹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한다. 그는 주몽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 온조가 후계자가 될 것이라 굳게 믿었지만, 주몽이 도망쳐올 무렵 엄마 뱃속에 있다가 나중에 이웃나라 왕이 된 아버지를 찾아온 첫아들 유리에게 그만 자리를 뺏기고 만다.

하필 그 무렵 주몽이 세상을 뜨니 원망하며 자초지종을 따질 수도 없는 노릇,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데리고 고구려 땅을 떠나 현재 서울 송파구 지하철 8호선이 닿는 몽촌에 흙으로 성을 쌓고 ‘십제’라는 이름의 나라를 세우는데 이 나라가 점차 융성해져서 ‘백제’가 되고, 장남인 비류는 뭔가 마땅치 않아 미추홀로 훌쩍 떠나 다른 나라를 세우지만 땅에 소금기가 많아 오래가지 못했다 하니, 이렇게 또 사이가 틀어진 아비 다른 두 아들을 지켜보는 어머니 소서노의 마음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을 거다.

남편을 고구려 시조로, 아들을 백제 시조를 만든 이 놀라운 여성 소서노의 이름은 여태껏 주몽과 온조에 가려져 있었으나, 중국의 동북공정과 맞물리며 주목할 만한 우리 여성사의 인물로 새삼 부각됐다. 지난 세계여성학대회 참석자들이 초청된 충북 음성의 큰바위얼굴 조각 공원에서 그녀의 동상 제막식이 열리며 새로운 여신의 존재로 멋진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그녀의 행적은 그 이름을 풀어 가라사대, 열두 거리 굿 가운데 사냥 굿을 하던 무당이었다는 해석이 있다. 무당이 굿을 할 때 작두거리에 들어가 칼을 입에 무는 형상을 보여주는 소(召)자에 멀리 서(西)쪽에서 온 큰 활을 쏘던 노(弩)자가 그녀의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얘기로, 종교와 정치가 딴집 살림을 차리기 이전 공동체의 지도자다운 기상이 담긴 이름이다.

한반도 지킴이가 된 소서노 여신이시여, 큰 칼 입에 물고 큰 활의 시위를 힘껏 당기어 이 땅에 공연한 피 흘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모든 재앙을 거둬가소서. 당신의 후손들이 다시는 그 따위 땅 싸움에 말려들지 않도록 부디 천년만년 지켜주소서.

<김재희 / 이프 편집인>

(한겨레21 2005-7-8)

고구려.백제 건국 주역 `소서노' 동상 제막

고구려와 백제 건국의 주역이었던 졸본부여의 여걸 `소서노'를 기리는 동상이 처음으로 세워진다.

충북 음성 큰바위 조각공원(이사장 정근희.58)은 24일 소서노 동상 제막식을 갖는다.

소서노는 고대 졸본부여의 공주.

남편과 사별한 그녀는 졸본부여의 왕통을 유지하기 위해 북부여에서 도망쳐온 주몽과 혼인해 주도권을 유지하면서 세력을 키워 결국 주몽의 고구려가 건립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주몽이 본부인인 예씨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자신의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하한뒤 온조가 위례성에 백제를 세울 수 있도록 도왔던 고대의 대표적 여걸.

여성이라는 사회적 한계를 극복하고 고구려와 백제 건국에 핵심적 역할을 했던 그녀에 대한 재평가가 최근 여성학계를 중심으로 활발해지고 있는 가운데 큰바위 조각공원측은 3년여전부터 소서노 동상 건립을 준비했다.

역사학자들의 고증을 통해 1년전 소서노의 영정을 그려낸데 이어 인도네시아의 조각 전문가에게 맞겨 9개월여의 작업끝에 높이 5m, 무게 30t 규모의 화강암 동상을 완성시켰다.

이 동상은 22일 부산항을 통해 입항해 23일 음성에 도착했다.

동상 제막식에는 지난 21일 개막된 제9차 세계여성학대회 분과회의에 참석한 한국, 일본, 중국, 몽골, 필리핀 등 아시아 5개국의 가정폭력 관련 비정부기구(NGO) 관계자들을 비롯 1천여명이 참석한다.

큰바위 조각공원측은 동상 제막을 자축하고 참석자들의 흥을 살리기 위해 명창 안숙선씨의 창과 외줄타기 공연 등을 준비했다.

정 이사장은 "소서노는 난세에 여성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고구려와 백제 건립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선덕여왕 등 우리나라를 대표해온 여성들과 구분된다"며 "중국의 동북공정 추진으로 고대사에 대한 관심과 재평가 노력이 절실한 시점인 만큼 소서노에 대해 연구하고 그를 세계적으로 알리는데 적극 나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 박종국 기자 2005-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