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항복해라!"

"야당 서울대 언론 집값 모두 항복하라고"

수나라 양제가 큰소리를 쳤다. "고구려 것들은 우리 군(郡) 하나도 감당할 수 없다. 내가 그들을 정벌하겠노라." 양제는 이같이 호언장담하면서 무려 113만이나 되는 대군을 출동시켰다. 고구려 정도는 군화발로 밟아도 없애버릴 수 있는 기세였다.

양제는 고구려의 '오열홀(烏列忽)'을 포위했다. 오열홀은 고구려 왕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전략적 요충지였다. 오열홀은 '오리 고을'을 의미하는 지명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남의 땅 오열홀을 '요동성(遼東城)'이라고 불렀다.

'요동'이란 아득하게 먼 동쪽을 말한다. 오늘날 서양사람들이 '극동'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소리다. 자기들 땅이 아니기 때문에 아득하게 먼 곳이라고 한 것이다. 자기들 땅이라면 아득하게 멀다는 표현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수나라가 포위한 곳은 오열홀이었다. 요동성일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 역사책마저 요동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 지명을 버리고 남이 만든 지명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조차 바로잡지 못하면서 '과거사' 운운하고 있다.

양제는 오열홀을 포위했지만 뒷전으로는 다른 짓을 했다. 각 부대마다 '수항사자(受降使者)'를 배치한 것이다. 수항사자란 글자그대로 고구려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사자였다. "우리가 너희를 공격하려고 한다. 혼나기 전에 빨리 항복해라"는 뜻이었다. 큰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수항사자는 제 임무를 수행할 틈이 없었다. 항복을 권유해보기도 전에 참패를 했기 때문이다. 살수대첩에서는 30만5000의 군사 가운데 살아 남은 군사가 2,700에 불과했다. 99% 이상의 군사를 잃었던 것이다. 전멸이었다.

30년 후에는 당나라의 태종이 양제의 흉내를 냈다. 양제를 '반면교사'로 삼는다고 하면서도 '수항막(受降幕)'이란 것을 설치한 것이다. 수항막 역시 글자그대로다. 항복을 받아들이기 위한 장막이다. '천자'의 위세에 놀라서 고구려가 알아서 항복하러 올 것이라면서 항복의식을 거행할 '텐트'부터 성급하게 쳐놓고 기다렸던 것이다. 하지만 수항막 역시 치나마나였다. 안시성 싸움에서 눈알까지 잃고 쫓겨가야 했다.

수 양제와 당 태종의 전쟁은 '겁주기 싸움'이었다. '항복 받아내기 싸움'이었다. "빨리 항복하지 않으면 고구려의 씨를 말리겠다"며 항복을 강요한 것이었다. 그들은 전쟁을 서둘렀던 것이다. 희한한 전쟁이었다.

요즘 신문을 보면 이 항복 받아내기 전쟁이 다시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것도 국내에서 '집안싸움'으로 벌어지고 있다. '동북아 균형'을 위해서 밖으로 뻗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오그라들면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이다.

여당 국회의원들은 서울대에 '전면전'을 선포하고, '초동진압'을 주장했다고 한다. 국정홍보처장은 "서울대가 비겁하다"고 비난했다고 한다. 대통령도 "대학이 양보해야 한다"고 했다는 보도다.

서울대는 항복하지 않으면 골치 아프게 생겼다.

대통령은 "정치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한다면 대통령 권력을 내놔도 좋다"고 했다고 한다. "경제가 잘 되려면 정치부터 고쳐야 한다"고도 했다. '여소야대' 이야기도 했다. "연정(聯政)은 합법적이며 정당한 정치행위"라고 했다. 이만큼 강력하게 의지를 표명했으니 받아들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더 이상의 반대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얘기처럼 들리는 것이다.

야당은 항복하지 않으면 골치 아프게 생겼다.

대통령은 언론에 대해서도 "도와주는 언론이 없다", "우호적인 언론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는 보도다. 언론사의 편집국장과 보도국장들과 만나 이렇게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특정신문에 '개인적으로' 돈을 내겠다고 하고 나서 밝힌 '언론관'이다.

언론은 항복하지 않으면 골치 아프게 생겼다.

'집값'도 버티기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대통령은 "부동산정책을 전쟁하듯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청와대 정책실장도 "헌법만큼 바꾸기 힘든 정책과 제도를 내놓겠다"고 했었다. '부동산 투기사범 합동수사본부'도 설치된다는 보도다. 끝끝내 항복을 받아낼 참이다.

집값은 항복하지 않으면 골치 아프게 생겼다.

(데일리안 / 김영인 논설위원 2005-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