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편입 40년… 이제 티베트는 없다

곳곳에 한자·한족 중국화 고속진행… "티베트는 중국의 지방정권" 역사왜곡도 극심
역대 달라이라마 시신 안치한 포탈라궁, 박물관으로 개조… 정면엔 자치구 청사 세워

올해는 티베트가 중국 영토로 완전 편입돼 ‘시짱(西藏)자치구’로 변한 지 40년. 오는 9월 1일이 기념일이다. 중국 정부는 통치 40년의 성적표를 외국에 자랑하고 싶어했다. 티베트는 여행허가를 받아야 외국기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중국 내에서도 특수한 지역.

◆ 티베트에 부족한 건 공기밖에 없다?

중국 국무원 신문판공실의 둥위안후(董云虎) 국장은 베이징에서 기자에게 “티베트의 변화 속도는 베이징보다 빠르다”면서 “티베트에 부족한 건 공기밖에 없다”고 큰소리 쳤다. 그는 “티베트가 중국에 동화되고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티베트가 중국화하고 있는지 서양화하고 있는지 가보라. 정확히 말하면 현대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의 강점(强占)을 피해 인도에 망명 중인 달라이라마에 대해서는 “달라이라마는 이탈리아 구찌 구두를 신고 세계를 돌아다니는 정객”이라며 “티베트를 떠난 지 너무 오래됐고, 선전이 아니면 할 게 없다”고 비난했다.

베이징-라싸 중국항공 비행기는 직행이 아니었다. 쓰촨(泗川)성 성도인 청두(成都)를 거쳐갔다. 때문에 5시간30분 정도 걸렸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백인도 상당히 보였다. 라싸 공항에 내려 얄루장포강(江)을 따라 1시간30분 정도 차로 달리자 라싸 시내가 나타났다. 고층건물은 없으나 상당히 넓은 분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라싸 시내에 들어간 지 얼마 안됐을 때 길가에 큰 정문이 나오고 ‘시짱자치구 인민정부’라고 쓴 현판이 보였다. 안쪽으로는 4, 5층 되는 인민정부 청사가 있었다.

기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치구 청사 뒤쪽으로 포탈라궁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포탈라궁은 티베트의 지도자 달라이라마가 1959년 인도로 탈출해 망명정부를 세우기 전까지 티베트 정치·종교의 중심이었다. 순간 지금은 철거되고 없지만 일제가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세워 경복궁을 가렸던 과거사가 떠올랐다. 그리고는 ‘점령자는 다 이런 것인가’는 생각에 입맛이 씁쓰레했다.

숙소인 히말라야 호텔에 짐을 풀고 쉬고 있는데 창 밖에서 젊은 남자들의 구령소리가 나서 보니 군부대가 있었다. 시내 한복판이었다. 며칠 뒤에는 시내를 지나가다 수십 대의 군 트럭이 행렬을 이뤄 달리는 걸 보기도 했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1950년 티베트에 진주한 뒤 지금까지 계속 눌러앉아 있다. 중국은 티베트 지배의 합법성을 강조하는 한 수단으로 “달라이라마가 과거 인민해방군의 티베트 진주를 지지했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라싸 시내 최고층 빌딩이 11층 현대식 건물인 공안국(경찰서)이라는 점도 중국의 강력한 지배를 확인케 했다.

◆ 중국의 우월성 과시하는 유물만 전시

포탈라궁은 주인을 잃고 박물관으로 변해있었다.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어 라싸 시내 어디서나 가장 눈에 띈다. 포탈라궁은 달라이라마의 관저이자 역대 달라이라마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었다. 현 달라이라마가 어렸을 때 그곳에 망원경을 세워놓고 궁 아래 시내를 구경했었다고 한다.

포탈라궁은 십수층 높이로 붉은색 외벽의 홍궁(紅宮)과 흰색 외벽의 백궁(白宮)으로 구성되어있는 아름다운 건물이다. 17세기 5대 달라이라마의 궁전으로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건축됐고, 전체 넓이는 32만㎡라고 관광 가이드는 설명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대대적인 개보수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가이드를 따라 내부를 돌아보니, 중국과의 역사적인 관계를 느끼게 하듯 곳곳에 중국 황제의 친필 글씨가 보였다. 홍궁의 서대전(西大殿)에서는 청나라 건륭제의 친필이라는 ‘湧蓮初地’란 편액이 걸려 있었다. 백궁의 꼭대기층인 12층은 달라이라마의 침전 및 집무공간. 달라이라마가 고위 관료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회(朝會)를 주관했던 의정청이 있었다. 이곳에는 현 14대 달라이라마의 사진은 없고, 사망한 13대 달라이라마의 사진만이 걸려 있었다. 관광가이드는 바로 옆방인 회객청(會客 )에서 1956년에 14대 달라이라마가 중앙정부 대표단장으로 티베트를 찾은 진위 부총리를 만난 적이 있다고 중국과의 관계사를 강조해 설명했다.

포탈라궁 앞에는 규모가 큰 광장 조성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그곳에 ‘시짱자치구 40년’이란 글씨가 써있었다. 광장은 자치구 편입 기념일인 9월 1일 전에 완공될 예정이고, 당일에는 대대적인 행사가 이곳에서 치러질 게 분명했다. 광장은 아직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지만 광장 안에 마련된 국기게양대의 중국 국기 오성홍기가 주위를 압도하며 휘날리고 있어, 이 땅의 ‘새 주인’이 누군지를 잘 드러내고 있었다.

라싸 시내의 시짱박물관은 중국의 역사 왜곡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현장이었다. 박물관 1층의 역사실 안에 들어가보니 티베트의 역사는 1260년 이후 중국의 ‘지방정권 시기’로 격하되어 있었다. 중국은 동북(東北)공정을 통해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만들려고 시도하고 있는 반면, 서남(西南)공정을 통해 티베트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바꿔놓았다.

최초의 중국 지방정권으로 기술된 사카 지방정권시기에 티베트가 몽골(원나라)에 복속한 이후 줄곧 ‘중국 중앙정부’의 지배를 받았다는 주장이다. 또 “1652년 5대 달라이라마는 (중국의) 수도에 와서 달라이라마 칭호를 부여받았다. 이후 청조의 중앙정부는 티베트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인 통제와 권한을 공식적으로 확실히 했다”는 등 ‘티베트가 중국의 실효적인 지배를 받았다’는 점을 부각시킬 수 있는 역사적 사실만이 나열되어 있었다. 전시품도 중국이 티베트의 지도자에게 보낸 인장 등 중국과 티베트 간의 관계를 강조하는 물품만 놓여있었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사실은 잘 보이지 않았다. 티베트의 옛 왕조인 토번은 서기 822년 당나라와 화평협약을 맺었고, 그 내용을 담은 비석을 3개 만들어 세웠다. 그 중 하나는 라싸 시내 티베트 불교의 대표적 사원인 조캉 사원 안에 1300년 가까이 서있다. 비문 내용은 비석이 관광객에 공개되지 않아 확인할 수 없었으나 ‘양국이 영원히 화목하게 지낸다’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영원히 화목하게 지낸다는 협약은 지켜지지 않았고, 중국은 티베트를 영원히 자국령으로 만들어 버렸다.

라싸에는 급속도로 중국화와 현대화가 진행 중이다. 시내 상점의 간판은 중국어 한자 표기가 크게 되어있고, 티베트 글자는 그 위에 작게 병기되어 있다. 라싸 시내에는 티베트족 못지않게 한족이 많다. 중국인 표현대로 ‘내지(內地)’에서 티베트로 들어간 한족들이다. 한족들은 ‘기회의 땅’을 찾아 티베트로 향하고 있다. 예컨대 기자 일행이 티베트 취재 중 탄 승합차의 기사는 한족. 그는 군 복무를 티베트에서 마친 뒤 현지에 눌러앉았고, 몇 년 뒤에는 ‘내지’에 있는 아내와 자식도 티베트로 데려올 생각이라고 했다.

티베트의 유일한 종합대학인 티베트대학 재학생 7000여명의 민족별 비율은 티베트족 70%, 한족 30%라고 이 학교 달루오상 랑지에 부교장은 말했다. 한족 학생 비율이 티베트 인구 중 민족별 분포보다 훨씬 높은 데 대해 그는 “티베트족의 문화 기초가 박약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라싸 시내에서 한족과 티베트족을 구분하기는 쉽다. 티베트족은 얼굴이 검게 타있고, 옷차림이 꼬질꼬질하기 짝이 없다. 히말라야 고원인 이 지역이 평지보다 일조시간이 엄청나게 길고, 햇볕 또한 강렬하기 때문이다. 반면 한족은 얼굴이 뽀얗다.

◆ 중국이 내세우는 통치 성적표

시짱자치구 정부가 내세운 40년 중국 통치의 성적표는 화려했다. 그 중 일부만 보자. 국내총생산(GDP)이 1965년 3억2700만위안에서 2004년 211억5400만위안으로 늘어났고, 지난 10년간 GDP성장속도는 연 12% 이상이라고 했다. 산업의 구조도 고도화해 원래 1차 산업의 규모가 가장 컸으나, 2004년에는 3차 산업(110억위안)이 2차 산업(57억위안)과 1차 산업(43억위안)보다 컸다. 도로 포장은 자치구 설립 당시 1.5㎞에 불과했으나 4만2000㎞(2004년 현재)로 늘어났다. 중국 통계는 부정확하다는 말도 있으나 수치를 보지않더라도 티베트의 경제 성장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밥’은 먹게 됐지만 ‘중국의 통치’를 티베트인이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것. 티베트인의 중국 통치에 대한 반발은 1959년 달라이라마의 탈출을 전후한 폭동 당시 3일간 지속된 티베트인의 봉기로 1만5000명이 희생되는 것으로 나타났었다.

중국인 티베트분리주의자에 대한 탄압은 그 후로도 계속되고 있다. 기자는 중국 정부 초청으로 현지를 방문했기 때문에 ‘친(親)중국파’ 인사만 만나야 했고, 일반 주민은 접할 수 없어 일반 주민의 정서를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기자 일행이 한 지방도시를 방문했을 때 기자가 보지 못한 ‘또다른 티베트’가 가려져 있음을 알게 해주는 일이 있었다. 한 사찰을 둘러보던 중 티베트 젊은이가 다가와 영어로 기자 일행 중 한 명에게 조심스럽게 “우리는 달라이라마를 사랑한다”고 말한 것. 그의 영어가 짧아 더 이상의 대화를 할 수 없었지만 분명 그건 중국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는 것으로 들렸다.

◆ 달라이라마 변수

중국에 달라이라마는 목에 가시와 같은 존재다. 인도에 망명 중인 달라이라마는 중국의 티베트 점령에 항의하고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다. 달라이라마의 사진이나 저서는 티베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티베트 민족종교사무위원회의 투덩(土登) 조리 순시원은 “달라이라마 사진 휴대는 금지되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중국은 현재 달라이라마와는 적대관계다. 공공장소에서 달라이라마상을 걸지 않으나 개인적으로 집에 걸기는 한다”고 말했다. 그는 외국인 여행 제한도 달라이라마에게 책임을 돌렸다. 티베트족인 그는 “지난 반 세기 동안 달라이라마 세력이 티베트에 침투, 학생들 수업도 정상적으로 못했다. 외국인이 오면 안전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에 제약이 있었다”고 말했다.

티베트자치구 문화청의 부청장급인 쒀나 순시원은 달라이라마에 대해 “종교적인 감정으로 달라이라마에 대한 존경은 허용하나 정치적으로는…”이라며 말을 흐렸다. 그는 “현 14대 달라이라마가 별세할 경우 15대 달라이라마로 계속 이어지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있다 없다는 얘기할 게 아니며, 역사적인 발전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만 말했다. 그는 “달라이라마가 최근 중국으로부터 정치적인 독립요구는 철회했다는데…”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나도 티베트족이지만 독립 포기는 훌륭한 일”이라고 말해 기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달라이라마는 올해 70세. 그가 점차 고령이 되면서 티베트의 현상황을 흔들 또다른 변수가 되고 있다. 14대인 그가 사망할 경우 티베트 불교의 관행에 따라 15대 달라이라마를 선출해야 하나, 중국은 티베트인의 구심점이 될 또다른 달라이라마의 출현을 바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티베트인은 15대 달라이라마를 원하고, 중국이 거부할 경우 그것은 불안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이에 따라 향후 티베트 정국의 최대 불안요소는 14대 달라이라마의 사망이며, 그것은 시한폭탄과 같다는 분석이다.

(주간조선 / 최준석 조선일보 국제부 부장대우 2005-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