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는 왕에게 절해야 하는가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불멸의 명작 <사문불경왕자론>으로 동아시아에 ‘종교의 자유’ 씨앗을 뿌린 혜원…" 생사의 멍에를 벗어나려는데 어찌 세상의 구차한 예법에 얽매이겠는가 "

▣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현재 감옥에 있는 오태양이 몇년 전 불살생(不殺生) 사상에 입각한 병역 거부로 논란을 일으켰을 적에 그를 비난하는 쪽에서 자주 거론하는 것이 ‘호국불교 전통’이었다. 학교에서 ‘호국’이라면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으로 배운 사람들에게 ‘살생에 의한 호국’을 이 땅에서 최초로 근대적으로 선전한 것은 태평양전쟁 때 젊은 승려의 징집을 목적으로 한 일제였다는 점, 1970년대 불교학자들의 ‘호국불교 연구’들이 유신정권이 연구비를 주고 주문한 ‘전통 날조’였다는 점, 임진왜란 때의 승병 참전이 자진 동원이라기보다는 비상시에 왕명을 거역하면 사대부 국가가 승단의 존재를 허용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승려들의 ‘자구’였다는 점 등을 이야기해봐야 소용이 없었다.

신라에서 승려의 참전은 상상할 수 없던 일

‘호국’의 ‘나라 국’을 민중이 아닌 국가로 해석하고, ‘지킬 호’를 이웃을 위한 각종의 봉사가 아닌 단지 ‘전투’로만 해석하는 박정희식의 독법은 그대로 많은 이들의 머리에 박혀버렸다. 물론, 사실을 이야기하자면 <인왕경> 등이 이야기하는 불교의 ‘호국’은 승려의 참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삼보를 받들고 계율을 지킨다면 나라가 불·보살의 가피력(加被力)으로 스스로 지켜진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었고, 신라의 수많은 백고좌법회(百高座法會) 등이 이와 같은 호국을 행하는 것이었다. ‘호국’이 이와 같이 이해됐던 신라에서 승려의 참전은 말기의 혼란 이전까지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호국불교’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한 가지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군사적인 ‘호국’이 후대의 왜곡이라 해도 한반도의 불교가 그 출발점부터 국가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황금기인 7세기의 신라 불교 지도자들의 행각을 하나하나 새겨보자. “자기가 살기를 구해서 남을 멸망시키는 것은 승려가 할 일이 아니다”라는 걸 알면서도 진평왕이 요구하는 걸사표(乞師表·군대 파견 요청서)를 순순히 지어준 원광(608년), 선덕여왕의 ‘국정 홍보’를 도맡아 정통성이 취약한 여왕의 이미지 제고 차원에서 그가 부처와 같은 크샤트리아 계급에 속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유포하고 황룡사 구층탑을 짓게 하여 선덕여왕을 마치 세계를 평화적으로 통일시킬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상징적으로 만들어준 자장(640년대), 환속한 뒤 태종무열왕의 딸과 결혼하는 등 태종무열-김유신 일당과 관계를 맺은 원효(650~60년대)…. 그들은 “군주를 교화시켜 보살행을 닦게 해야 백성들에게 이로울 것이다”라는 논리를 따라 왕권에의 적극적 종속을 민중을 위한 이타적 행위로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권력과 교계 사이의 거리나 긴장이 너무 없었다는 건 한국 불교사 여명기의 현실이었고, 뒤로 내려갈수록 그 유착의 정도는 심화됐다.

정토신앙 개척한 혜원은 원효의 선배?

권력자에게 무조건 ‘호법’, 즉 불교에 대한 시혜를 기대하는 전통이 강한데다 근대적 민족주의의 수용이 늦었기에 한용운 등 소수를 제외한 일제시대의 승려들에게는 총독부에의 복종이 역시 자연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저항의 전통이 태부족한 한국 불교이기에 계율에서 무기를 드는 것을 철저하게 금하는 것을 알면서도 징집 명령에 감히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오늘날 한국 승단의 현실이 가능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국 현대불교 역사상 최초의 공개적인 병역 거부자가 스님이 아닌 속인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제도권 불교의 ‘친국가적 기질’은 과연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물론 한반도 내 국가들이 비교적 좁은 영토에서 중앙집권적 관료행정의 모델을 철저하게 시행해왔기에 동시대 지구촌의 다른 사회들에 비해 행정력이 좋았고 종교집단들에 대한 장악력도 ‘세계 최강’을 자랑해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계로서는 순응이야말로 생존의 유일한 방도였다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거기에다 한반도 사회가 받아들인 불교는 부처의 가르침 그 자체라기보다는 중국이 이미 ‘가공’해놓은 ‘국가적 종교’였다. 특히 고구려와 교류가 많았던 남북조 시대의 정복왕조 북위(386~534)에서는 법과(法果)와 같은 권승(權僧)들이 유포한 ‘황제가 바로 이 시대의 여래(如來·부처)’와 같은 곡학아세의 극을 달리는 이야기가 정설이 되다시피 했다. 이것은 신라 불교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수(581~618)나 당(618~907) 불교에 지배적 담론으로 계승됐기에, 자장이 선덕여왕을 전륜성왕으로 만들고 원효가 태종무열왕이나 문무왕이 보살행을 닦아 중생을 이롭게 할 것을 기대했던 사실은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다. 백성에게 수탈한 돈으로 대형 불사를 일으키는 군주를 부처로 보고 왕사니 국사니 군주가 내려주는 칭호들을 중생 제도보다 더 중요시하는 것이 일찌감치 동아시아 주류 불교의 성질이 됐으니 신라 고승이나 그 후계자들만을 책망할 일도 아니다. 차라리 원시 불교의 자유, 불기(不羈·얽매이지 않음) 정신을 살리지 못한 ‘고승대덕’들을 무조건 성인으로 숭배하는 우리 자신들에게 질문을 던져봐야 할 것이다.

그러면 과연 지역적 불교 전통들이 만들어진 남북조 혼란기의 모든 중국 승려들이 군주와 부처를 헷갈릴 정도로 지배구조에 끽소리 못하고 눌려 있었을까? 다행스럽게도 그렇지는 않았다. 북방의 정복 왕조들에 비해 승려에 대한 국가적 통제가 훨씬 느슨했던 남방의 귀족 사회들에서는 일부이긴 하지만 국가의 통치권 밖에 있는 독립적인 승려상을 제시한 고승들도 있었다. 예컨대 불교와 도교사상들이 결합되어 귀족 문화의 진수를 이루었던 남쪽 동진(317~420)의 교계를 풍미한 혜원(334~416)은 동아시아에서 ‘종교 자유’의 씨앗을 뿌린 사람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가 402년에 동지들과 함께 염불 결사를 처음 만들어 동아시아에서 정토신앙을 실천적으로 개척했다는 점에서 그 정토신앙으로 신라 백성들을 교화한 원효의 선배 격에 해당되기도 하지만, 주석하고 있었던 아름다운 루산을 30년이나 나오지 않는 등 원효와 달리 계율 지키기에 빈틈이 없는 원칙주의자였다.

국가 권력이 승려들에게 황제에의 경배를 의무화하려 하자, 혜원은 곧장 승려가 왕권과 차원이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원칙을 주장하기 위해 400년대에 불멸의 명작인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작성했다. 사문(승려)이 왕에게 절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재가자가 왕법(王法)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속세를 벗어나 생사를 뛰어넘은 출가자의 경우에는 그 자비심으로 황제 이상으로 백성을 어루만져 제도할 수 있다. 더 이상 땅에서나 하늘나라에서나 다시 태어나 살 마음이란 티끌만큼도 없고 모든 탐욕을 벗어나 열반의 경지에 이른 구도자라면 이미 황제는 물론이거니와 천지만물과도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왕·제후가 백성을 살리는 데에 아무리 공로가 있어도 중생의 고통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고, 뭇 생명을 낳은 하늘과 땅이 아무리 넓어도 사는 자를 죽지 않게 할 수 없는 이치다. 그러나 구도자는 윤회의 사슬을 벗어나 육신이 있는 생명의 형태를 정신적 차원에서 탈피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러한 존재는 황제 못지않게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하화중생(下化衆生)으로 세상에 은혜를 베푸니 어찌 왕에게 절해야 하는가? 세상의 뭇 생명을 이롭게 한다는 의미에서 불교는 유교 등 세속의 그 어떤 도덕이나 가르침과도 취지가 융합될 수 있지만, 생사의 멍에를 벗어나려는 궁극적 취지에서는 어찌 세상의 구차한 예법에 얽매여야 하는가?”

구도자는 국가기관에 할 말을 하는가

동진에서는 이같은 혜원 글의 영향으로 승려들이 왕자에게 끝내 경배할 의무를 가지지 않았지만, 당나라 이후로 북방 불교 전통이 우세해져 승려들의 경배는 법률로 정한 ‘당연지사’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혜원의 때이른 ‘종교 자유의 선언문’은 효능이 없었던가? 그렇지 않다. 그의 글을 읽는 승려·속인마다 맹렬한 반성을 하게 돼 있다. 지금 이 시대의 승려들은 과연 세속을 벗어난 상태에서 세속을 지도할 능력이나 자질이 있을까? 과연 국가와 같은 재가자들의 폭력기관에 대해 출가자다운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가? 정신적으로 해탈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두려움 없이 세속의 통치자들에게 할 말을 다 하고 있는가? 승풍(僧風)에 대한 반성을 일으키는 그의 말은 우리에게 쓴 약임이 틀림없지만 쓴 약이야말로 효과가 제일 좋은 것이다.

* 참고 문헌 1. <사문불경왕자론> 한문 원전:
http://cbeta.twbbs.org/result/normal/T52/2102_005.htm 2. 혜교(慧皎) 저, 유월탄(柳月誕) 편역, <고승전>, 자유문고, 1991(혜원의 전기) 3. Erik Zurcher, Leiden, 1959, pp. 202~239(혜원 관련 정보) 4. 가마다 시게오 저, 정순일 역, <붕국불교사>, 경서원, 1996, 72~92쪽(동진 시대의 불교와 혜원, 그 제자들에 대한 정보)

(한겨레21 2005-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