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몽골 칭기즈칸의 발자취

800여년전 칭기즈칸이 말 타고 누볐던 몽골 대초원을 달렸다.

애마는 키 작은 몽골말 대신 4륜구동 지프. 20만 기마군단은 아니지만 3대의 차량이 서로 격려해가며 달린 1500㎞ 대장정이었다.

밤 11시까지 머리 바로 위에서 내리쬐어 몽롱하게 하던 태양도, 차량을 위협하던 깊은 웅덩이와 가파른 숲길도 막지 못했다.

새파란 하늘 아래 막힌 데 없이 탁 트인 눈길 끝으로 들어오던 푸른 초원은 가슴 뛰게 했다.

뽀얗게 뒤집어쓴 흙먼지마저 싱그럽게 느껴졌다. 초원에 서면 알게 된다. 아니 본능적으로 자각한다.

그 옛날 유럽을 놀라게 한 칭기즈칸의 웅혼한 기상을 몸으로 느낀다. 칭기즈칸은 산처럼 의연하고 바다처럼 넓다.

칭기즈칸이 초원이고 몽골 초원이 칭기즈칸이다. 찬란한 영광의 기억은 사라졌지만 칭기즈칸과 자식과 손자들이 만들어낸 대제국은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는 칭기즈칸을 세계사의 1등 인물로 꼽았다. 그가 동·서양을 관통하면서 건설한 몽골제국이 두 지역 문화를 섞고 교류시킴으로써 이후 세계사의 흐름을 바꿨다는 것이다.

칭기즈칸보다 800년 늦게 태어난 후손들은 선조의 정복자 모습과 달리 지금 한국에서 코리안 드림을 엮어내고 있다.

도타운 가족애로 뭉친 이들은 서울에서 정식 학교를 개설하고 꼬박꼬박 모은 돈을 고향으로 송금해 조국 발전에 이바지한다.

유목민족의 깊은 체취는 국내 이곳저곳에서 느낄 수 있다. 경기 남양주시에 자리잡은 몽골문화촌을 찾거나 10일 서울에서 열리는 몽골 전통축제 ‘나담’에 참가한다면 기마민족의 후손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 칭기즈칸(원 태조·1162∼1227)은 초원에서 태어나 중원을 차지한 뒤 말을 서쪽으로 몰아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유럽까지 맹위를 떨쳤다. 몽골 기병대의 유럽 정벌은 동아시아인에 의한 최초이자 최후의 사건이었다.

서쪽으로는 태평양, 동쪽으로는 지중해까지 몽골 기병대가 25년간 정복한 땅은 로마군이 400년 동안 정복한 땅보다 넓다.

칭기즈칸 군의 유럽 정벌은 당(唐) 멸망 후 끊어졌던 실크로드를 다시 연결해 동서문화 교류의 새 장을 열었다.

폐허가 된 칭기즈칸 시대 古都 카라코룸

영웅 칭기즈칸이 말을 달리던 조국 몽골에 그의 유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정주(定住)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땅을 찾아 방랑하는 유목민 특유의 생활문화 때문일 것이다. 칭기즈칸 자신이 정복한 수천 개 도시 중 친히 입성한 도시는 하나뿐이라고 한다. 드넓은 초원의 어디엔가 마련됐을 칭기즈칸 묘의 위치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더욱이 몽골 기병대의 말발굽 아래 짓밟혔던 중국과 러시아(옛 소련)가 몽골에 대한 철저한 복수로 1990년대까지 칭기즈칸은 다만 몽골인의 가슴속에서나 살아 있을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몽골의 고도(古都) 카라코룸(하르 호린)은 아쉽게나마 칭기즈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에서 서남쪽으로 350㎞ 떨어져 있는 카라코룸은 칭기즈칸이 1220년쯤 도읍 터로 잡은 곳이다. 몽골이 세계제국이었던 만큼 카라코룸은 1260년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원 세조)이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국제적인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 세계 수도의 역할을 했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몽골제국의 영광을 안고 있는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자고 주장하고 있다. 1388년엔 중국 한족 군대의 침략으로 도시는 파괴되고 7만명이 포로로 잡혀간 아픈 역사도 안고 있다. 그렇게 잊혀졌다가 1899년 러시아 탐험가에 의해 다시 발견됐다.

도심 한복판엔 1586년 조성된 몽골 최초의 티베트 불교 사원인 에르덴 조가 자리를 잡고 있다. 사방 400m의 절터 주위에는 108개의 스투파(흰 불탑)가 달린 성곽이 둘러싸고 있다. 탁 트인 고원을 배경으로 흰 탑들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어 성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사원에 들어가면 부처의 전생과 현생, 후생을 상징한다는 중앙 사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티베트 불교의 수장인 달라이 라마가 이곳에 와서 책을 읽었다고 한다. 에르덴 조 사원은 1920년대 사회주의 정권이 집권한 이후 많은 유적이 파괴됐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최근에 다시 복원된 것이다. 파괴된 사원에서 발굴된 유물은 현재 울란바토르의 몽골국립역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과거와 현재 공존… ‘붉은 영웅’ 울란바토르

‘붉은 영웅’이라는 뜻의 울란바토르(현지 발음은 울란바타르)는 수도로 몽골 중앙 북부에 위치한 해발 1351m의 고지대 분지. 서울의 약 2.2배 되는 면적에 몽골 전체 인구(약 270만 명)의 3분의 1에 가까운 약 80만명이 모여 산다. 유목민의 전통 가옥인 게르와 현대식 아파트, 빌딩이 혼재되어 몽골의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도시다.

1990년대 들어 몽골에도 개방화 바람이 불면서 옛 소련에 의해 격하됐던 칭기즈칸 재조명 작업이 활발하다. 수도인 울란바토르가 그 중심에 서 있다.

몽골국립역사발물관에는 몽골인의 기상을 세계에 떨쳤던 칭기즈칸 관련 유물과 자료가 적지 않다. 아직 ‘칭기즈칸박물관’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의 삶을 엿보기에는 충분하다.

무엇보다 칭기즈칸의 위엄 있는 모습을 재현한 밀랍인형이 눈에 띈다. 손가락를 벨 듯한 날카로운 눈매, 초승달을 닮은 짙은 눈썹은 무사의 강인함을 보여준다. 둥그런 얼굴에 후덕하게 보이는 수염은 천하를 품에 안은 지도자의 넉넉함을 보는 듯하다. 동물 가죽으로 만든 의복에 여우 털로 만든 모자는 세계의 정복자이면서 검박했던 영웅을 보여준다. 칭기즈칸은 당대에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다고 하니 그의 삶을 토대로 한 상상의 산물이리라.

동해에서 지중해까지 칭기즈칸과 그 후대 칸이 정복했던 지역을 표시한 대형 세계지도에서는 과거 몽골제국의 화려한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다만 몽골의 고려 정복 부분에서는 삼별초의 항쟁이 떠올라 가슴이 무거워진다. 유물 중에는 칭기즈칸의 손자인 3대 칸 구육이 1246년 ‘서방의 수장’ 로마교황 이노센트 4세에게 보낸 통첩장도 있어 칭기즈칸 가계에 흐르는 뜨거운 기개를 볼 수 있다.

박물관에는 이 밖에 선사시대에서 현대사까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유물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끝없는 초원의 나라 몽골에 선사시대가 있었을까 싶지만 수렵 생활을 그린 벽화, 손도끼 등 유물에서는 선사시대 대륙인의 숨결이 느껴진다. 특히 1층에서는 한국의 일부 소장파 사학자들이 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이라고 주장하는 석상을 만날 수 있어 이채롭다. 3층에는 몽골을 구성하고 있는 24개 부족의 전통의상이 전시돼 있으며, 중국과의 전쟁부터 몽골의 독립 과정, 1989년 일당독재가 무너지는 과정 등 몽골의 근현대사가 연대순으로 정리돼 있다.

울란바토르 도심의 수하바타르 광장에서는 20세기 초 한때 되살아난 몽골의 전사혼을 만난다. 몽골 정부청사와 마주보는 이 광장엔 1921년 7월 11일 몽골의 독립을 선언한 수하바타르 장군이 말을 타고 있는 석상이 세워져 있다.

수하바타르 장군은 몽골인민군총사령관으로 옛 소련군의 지원 하에 중국에 맞서 독립투쟁을 벌였던 전쟁영웅이다. 7월 11일은 몽골 독립기념일이 되었다.

울란바토르 거리에서 도드라지게 눈에 들어오는 곳은 서울의 거리. 서울시와 울란바토르시가 1995년 자매결연을 한 뒤 만들어진 이 거리 주변에는 한국 식당과 나이트클럽 등이 자리를 잡고 있어 몽골 속의 작은 한국을 만날 수 있다.

이 거리에 위치한 ‘쓰키하우스’(The Moon House)란 곳에서는 매일 오후 6시 몽골 전통공연을 올린다. 1시간20분 동안 전통악기인 마두금(馬頭琴) 연주, 기예, 무용 등 10여개의 레퍼토리가 공연되는데, 화려한 의상과 연주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특히 몽골인만이 낼 수 있다고 하는 독특한 구음의 ‘허미’라는 공연이 압권이다. 입장료는 6달러며 사진촬영을 할 경우 5달러를 더 내야 한다.

여기서도 한류

울란바토르 시내는''한국 중고차 전시장''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 사람들에 비해 몽골인에게 인식이 좋은 나라입니다.”

몽골국립대학 한국어학과 1학년 바이샤(22)의 말이다.

몽골에서도 한류 열풍은 거세다. 한류 열풍의 진원지는 역시 TV 드라마. 권상우·김희선 주연의 드라마 ‘슬픈연가’가 UBS(울란바토르방송)의 전파를 타며 큰 인기를 얻고 있으며, 최근 방영된 ‘대장금’은 60%라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한국어를 배우려는 젊은이도 크게 늘었다. 대부분의 대학에 개설돼 있는 한국어학과는 영어과 일본어과에 이어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바이샤씨는 “최근 들어 입학을 원하는 학생들이 더욱 많아지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울란바토르 시내는 아예 ‘한국 중고차의 전시장’이다. 택시는 거의 현대의 엑센트, 쏘나타를 개조해 만든 것이다. 거리의 버스 역시 한국의 중고 버스를 고스란히 들여온 것이다. 새로 색을 칠하지 않아 ‘○○여객’ ‘○○행’ ‘○번’ 등 한글이 그대로 쓰여 있어 이채롭다.

백화점이나 상점에서는 미샤, 더페이스숍, 라끄베르 등 한국 화장품 매장을 쉽게 볼 수 있다. 초코파이나 라면 등을 파는 한국 상점도 도시 곳곳에 있다. 한국 음식점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거리 곳곳에는 삼성 휴대전화 광고가 넘쳐난다. 몽골 젊은이에게 가장 인기 있는 휴대전화 단말기는 역시 삼성. 몽골에는 일본에 이어 한국의 SK텔레콤이 스카이텔이라는 이름으로 이동통신 서비스에 진출해 있다. 이 때문에 한국 중고 휴대전화를 간단히 개조해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세계일보 / 박진우 기자 2005-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