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안시성 싸움 外

645년 6월 20일 |안시성 싸움

동아시아의 7세기는 격동의 시대였다. 300년 가까이 남·북조 양대 세력으로 분열돼 있던 중국이 겨우 수나라로 통일되는가 싶더니 복병 고구려를 만나 30년 만에 무너지고 뒤를 이은 당나라의 패권주의 고집으로 그 여파가 한반도에까지 미쳤다. 주변의 이민족을 복속시킨 당태종이 유독 신속(臣屬)을 거부하는 고구려를 주시하자 영류왕은 이를 의식해 당나라와의 화친을 최우선시했다. 영류왕이 저자세 굴욕외교로 일관하자 연개소문은 영류왕과 추종세력을 축출하고 실권을 장악했다. 대당(對唐) 굴욕파에 대한 대당 강경파의 군사정변이었다.

평소 ‘당나라와 고구려 두 천하가 병존할 수 없다’고 믿어온 당태종은 고구려의 정치체제가 급변하고 있음을 느꼈다. 당시 당나라는 중화(中華)사상으로 표현되는 자국 중심의 천하관을 갖고 있었고, 고구려는 자신들이 만주 일대와 한반도의 주인공이라는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곧 있을 당태종과 연개소문의 격돌은 각기 다른 천하관과 세계관의 충돌이었다.

당태종이 요하를 건너 고구려로 쳐들어간 것은 645년 3월이었다. 기습공격으로 개모성을 함락시켜 서전을 장식한 당나라군은 비사성에 이어 서북방 최대 요충지 요동성과 백암성을 점령하면서 기세를 떨쳤다. 6월 20일 ‘안시성(安市城) 싸움’이 시작됐다. 당과 고구려의 운명을 건 대회전이었다. 초반에는 고구려군의 패색이 짙었으나 60여일 동안 성문을 걸어잠근 고구려군의 결사항전으로 결국 당태종은 안시성을 포기해야 했고, 4년 뒤 “고구려 정벌을 중지하라”는 유언을 남기고는 눈을 감았다. 고구려는 어렵게 독자적인 천하관을 지켜냈으나 계속된 국지전에 국력을 소진시켜 쇠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 신채호는 연개소문을 가리켜 “4000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영웅”이라고 격찬했다.

1858년 6월 19일 | 미·일 수호통상조약과 에도막부의 몰락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 에도(도쿄)만에 출현해 개항을 압박하고 있던 1853년 7월, 당시의 일본은 쇼군(將軍)이 천황을 제치고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에도막부(江戶幕府) 시대였다. 갑작스런 사태를 당한 에도막부는 오랜 전통을 깨고 그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천황가(家)의 조정에 의견을 구했다. 막부정권으로서는 스스로의 권위를 무너뜨린 자충수였고, 천황가 조정으로서는 권위를 되살릴 절호의 기회였다.

이듬해 3월 막부는 미국과 굴욕적인 ‘미·일 화친조약’을 맺었다. 조약에 따라 2개 항구를 열었고, 미국에 최혜국 대우를 약속했다. 이로써 250여년간 이어온 에도막부의 쇄국정책도 끝내 수포로 돌아갔고 막부의 위신도 곤두박질 쳤다. 1856년 미국이 한발 더 나아가 ‘미·일 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하자 막부정권은 또 다시 고메이(孝明) 천황의 허락을 구했다.

그러나 ‘양이(攘夷)’를 내세운 천황가 조정이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자 막부정권으로부터 정무 일체를 위임받은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는 1858년 6월 19일 독자적으로 ‘미·일 수호통상조약’에 조인했다. ‘조약 체결이 부당하다’는 반발이 들불처럼 일어났으나 이이는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도 수호통상조약을 체결, 결과적으로 막부의 몰락을 재촉했다. 막부의 무능과 약화를 틈타 고메이 천황이 조약체결에 불만을 표시하는 칙령을 내리고, 막부 영향 아래 있던 지방의 각 번(藩)마저 천황의 복권을 주장하는 ‘존왕양이(尊王攘夷)’의 기치를 내세우면서 바야흐로 막부정권은 사면초가에 빠져들었다. 1860년 3월 이이가 에도성의 사쿠라다문(門) 근처에서 미도번의 무사들에게 피살되자 기세가 오른 천황 세력은 ‘에도막부 타도’를 외치며 막부를 압박해 들어갔다. 막부 앞에는 몰락의 수순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간조선 / 김정형 기자 2005-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