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사 새로보기] 왜(倭) (1)

황영식의 "민족 빼고 감정 빼고"

흔히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으로 불리는 책은 중국 진(晉)의 학자 진수(陳壽ㆍ233~297년)가 편찬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의 동이전을 가리킨다. ‘위서’라는 이름의 다른 역사서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한 이름이다.

총 30권으로 이뤄진 이 ‘위지’의 마지막 권에 오환(烏丸)ㆍ선비(鮮卑)전 다음에 있는 것이 동이전이다. 동이전은 서문에 이어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동옥저(東沃沮) 읍루(揖婁) 예(濊) 한(韓) 왜인(倭人) 순서로 이뤄져 있다.

만주와 랴오둥(遼東)반도, 한반도의 세력에 대해서는 종족집단을 가리키는 동시에 국가 또는 정치ㆍ사회집단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를 쓰고 있는 데 반해 일본에 대해서는 종족집단만을 가리키는 ‘왜인’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는 점이 우선 눈에 띈다. 언뜻 중국과의 거리가 멀어 자세한 정치ㆍ사회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왜인조’에 서술된 상세한 내용으로 보아 그런 이유보다는 정치ㆍ사회적 발달 정도가 아직 국가 단위로 파악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여기는 것이 나을 성싶다. 위지 왜인전은 이렇게 쓰고 있다.

‘왜인은 대방(帶方) 동남쪽의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산과 섬으로 국읍(國邑ㆍ나라와 마을)을 이루고 있는데 원래는 100여국이었고, 한(漢)나라 때는 (중국에) 조공하는 곳도 있었다. 사신이나 통역에 따르면 지금은 30개국이다. …

남자는 나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얼굴과 몸에 문신을 하고 있다.…몸에 하는 문신은 왼쪽이나 오른쪽, 크고 작음이 존비(尊卑)에 따라 차이가 있다. …풍속이 음란하지 않다. 남자는 모두 모자를 쓰지 않고 머리카락은 (이마에) 두른 띠로 고정하고, 옷은 옆으로 넓은 천을 걸치고 묶을 뿐 거의 바느질을 하지 않는다. 부녀자는 머리칼을 늘어뜨리거나 말아서 쪽을 졌다. 옷은 홑겹으로 그 중간에 구멍을 뚫고, 거기로 머리를 내밀어 입는다. …

날씨가 따뜻해서 겨울이나 여름이나 생나물을 먹고, 모두 맨발로 다닌다. 방이 나뉘어 있어 부모형제가 잠자리를 따로 한다. 붉은 안료를 몸에 바르는 것은 중국의 화장과 비슷하다. 음식은 나무나 대그릇에 담아 맨손으로 먹는다. …

장례 때는 관은 있지만 곽이 없고, 흙으로 봉분을 만든다. 10여일 동안 시체를 안치해 두고, 고기를 먹지 않는다. 상주는 곡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한다. 상을 마치면 물속에 들어가거나 물을 끼얹어 목욕재계한다. …

그 풍속에 중요한 행사를 치르거나 사람이 오가는 등 무슨 일이든 있을 때마다 뼈를 태워 길흉을 점친다. 우선은 점치는 내용을 고한다. 점치는 법은 (중국의) 거북점과 같다. 열 때문에 생기는 갈라진 틈을 보고 앞날을 점친다. …

도둑질을 하지 않으며 다툼이 적다. 법을 어기면 가벼운 죄는 처자를 빼앗아 노비로 삼고, 무거운 죄는 일가와 친족에까지 미친다. 존비에 각각의 등급이 있어, 각자 윗사람에게 굴복한다.…’

위지 동이전 왜인조가 기록하고 있는 일본의 모습은 3세기, 즉 야요이 시대 말기의 모습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규슈(九州) 지역으로의 대량 이주가 시작된 지 500년이 흐른 시점이다. 그런데 기사의 내용에서는 일부 한반도 풍습을 연상시키는 부분도 있지만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현재의 풍습이 아니라 역사 기록에 남은 아득한 옛날의 모습인데도 그렇다. 그런 차이는 종족 계통의 분명한 차이라기보다는 5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현지의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일어난 문화 변이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보다 앞선 시대의 일본에 대한 묘사는 단편적이지만 ‘한서’(漢書)에 나타나 있다. 1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한서 지리지에는 ‘낙랑(樂浪)의 바다 가운데 왜인이 있는데 100여국으로 나뉘어 있다. 새해에 (낙랑군을) 찾아와 공물을 바치고 알현한다.’고 적혀 있다. 1세기 무렵에 중국이 접할 수 있었던 일본의 지역이 규슈지역에 한정됐을 것이란 점에서 그 지역에 난립하고 있었다는 100여국은 집락집단, 또는 부족집단을 가리켰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지 동이전 왜인조 기사와 합쳐 보면 200년 사이에 적지 않은 정치변화가 있어 100여국이 30여국으로, 즉 보다 큰 정치조직으로 발전해 갔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집락집단 가운데 한반도를 거쳐 중국에까지 사신을 파견해 일종의 왕위 책봉을 받은 집단이 있었음이 ‘후한서’(後漢書) 기록이나 출토 유물의 일치로 드러났다.

1784년 후쿠오카(福岡) 시카노시마(志賀島)에서 한 농부가 금인(金印)을 발견해 영주에게 바쳤다. 현재 후쿠오카시 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이 금인은 한 변이 2.35㎝ ㅅ돛?정사각형도장에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이란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고, 도장 손잡이는 뱀 모양을 하고 있다. 도장은 ‘한의 (아래에 있는) 왜(倭)의 노국왕’이란 뜻으로 해석됐다.

이 금인은 발견 직후 진위 논란에 휘말렸다. 한의 천자는 내외의 제후나 신하에게 인수(印綬ㆍ도장과 그 끈)를 하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때까지 뱀 모양의 도장 손잡이가 달린 인수는 없었다. 인수는 받는 사람의 지위에 따라 끈의 색깔이 다르고, 손잡이형상도 낙타나 거북 등으로 달랐다. 또 도장에 새긴 문자도 중국 영토의 제후에게 준 것은 ‘○○왕새(璽)’, 영토 밖의 조공국들에게 준 것은 ‘한○○지장(章)’이나 ‘한○○지인(印)’으로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그런데 시카노시마에서 발견된 금인의 모양이 이런 관행과 다르고, 규정을 벗어난 문자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후대에 만들어진 모조품일 가능성이 있었다.

이 논란은 중국에서 규정과 다른 금인이 발견되고, 같은 곳에서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금인이 발견되면서 매듭됐다. 1956년 윈난(雲南)성에서 한 무제(武帝)가 BC 109년에 하사한 ‘전왕지인( 王之印)’이 발견됐다. 새겨진 문자가 규정과 달라 규정을 벗어난 인수의 존재 가능성이 확인된 데다 손잡이가 뱀 모양이었다. 또 81년에는 장시(江蘇)성에서 발견된 ‘광릉(光陵)왕새’는 후한의 광무제(光武帝)가 58년에 내린 도장인데 시카노시마의 금인과 크기와 무게, 문자 조각법 등이 거의 같았다. 이로써 시카노시마 금인은 후한서의 기록과 일치하는 진짜로 확정됐다.

후한서는 삼국지보다도 늦은 5세기에 씌어진 책으로 많은 부분이 삼국지를 압축한 내용이나 삼국지에는 없는 독자적인 내용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이런 기록이다. ‘57년에 왜의 노국이 조공을 해왔다. 사신은 스스로를 대부(大夫)라고 칭했다. 왜의 남쪽 남단에 있는 나라라고 한다. 광무제는 인수를 하사했다.’

이 가운데 사신이 스스로를 대부라고 칭했다거나 규슈의 남쪽 남단에 있다는 등의 내용은 위지 동이전 왜인조에 나오지만 57년에 있었던, ‘노국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해 와서 광무제가 인수를 주었다’는 내용은 다른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금인에 새겨진 문자의 내용과 후한서 기록으로 보아 당시 노국왕이 광무제의 책봉을 받았던 것은 분명하다. 다만 ‘왜의 노국왕’이라는 금인의 문자로 보아 규슈 지역을 가리킨 왜 전체를 통솔하는 존재가 아니라 특정 지역의 통솔자로서의 지위만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한서 왕망(王莽)전에는 이보다 50여년 전인 5년의 일로서 ‘동이의 왕이 (사신을) 큰 바다를 건너 (보내) 진귀한 특산품을 바쳤다’는 내용이 있다. ‘동이의 왕’이 누구인지를 알 수는 없지만 사신이 큰 바다를 건너게 했다는 데서 왜의 특정 지역 통솔자였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이는 후한서 왜전(倭傳)에 107년의 일로서 ‘왜국왕 수승(帥升) 등이 남자 노예 160명을 바치고 뵙기를 청했다’는 내용이 나오는 등 집락집단 단계에서 왜는 중국과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한반도 남부와 규슈지역과의 교류는 훨씬 더 활발했을 것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기도 하다.

(주간한국 / 황영식 논설위원 2005-5-26)

[한·일 관계사 새로보기] 왜(倭) (2)

한서나 후한서의 왜(倭)에 대한 기록과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에 기록은 150년 정도의 공백이 있다. 이 공백의 대체적인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 동이전 왜인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그 나라는 원래 남자로써 왕을 삼았다. 70~80년 전에 왜국이 혼란에 빠져 서로 공격하고 정벌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결국 함께 한 여성을 추대해 왕으로 삼았다. 이름은 히미코(卑彌呼)였다. 귀도(鬼道)에 써서 백성을 현혹했다. 이미 과년했지만 남편은 없었다. 남동생이 도와 나라를 다스렸다. 히미코가 왕이 된 이래 그 모습을 본 사람은 드물다. 노비 1,000명을 두어 시중들게 했다. 오직 남자 한사람이 있어 (히미코에게) 음식을 날라다 주고, (히미코의) 말을 전하려고 거처에 드나들었다.’

기록대로라면 규슈 지역에 있던 부족집단 사이에 오랫동안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고, 그 결과 100여개의 집단이 약 30개로 통합됐다. 오늘날 현지에서 출토되는 고고학 유물도 장기간에 걸친 전쟁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히미코가 다스린 ‘여왕국’의 이름은 야마타이(邪馬台)였으며 네 등급의 관직이 있었고, 세대수가 7만호에 이른 것으로 기록돼 있다. 적지 않은 규모로 당시 규슈 일대를 거의 장악한 대형 부족연맹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이 야마타이국의 위치를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기나이(畿內)설보다는 규슈설로 기울고 있다. 야마타이국에 이르는 경로를 뭍길과 물길로 나누어 자세히 밝힌 것은 물론 주변 정치집단의 존재와 위치를 소개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이 무엇보다 강력한 근거가 되고 있다. 아울러 규슈 사가(滋賀)현 요시노가리(吉野ヶ里) 유적이 그런 역사기록을 뒷받침해주는 유력한 물증으로 거론된다.

요시노가리 유적은 일본 최대의 야요이 시대 유적으로 40㏊ 정도 되는 면적을 방책과 해자로 둘러싼 대표적 환호집락이다. 환호집락 주위에도 소규모 마을 유적이 잇따라 발굴되고 있어 초기 야마타이국의 도읍으로 상정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또한 일대에서 출토된 청동기 시대 후기~초기 철기시대 유물은 이 지역에 강력한 정치세력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추정하게 한다. 요시노가리 유적에는 현재 제사를 올리던 건물, 창고, 도구 제작소 등이 복원돼 있어 1700여년 전의 삶의 모습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요시노가리 유적에서는 한반도계 철기로 특정된 무문토기나 세형동검, 나중에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출토돼 뚜렷한 연관성을 보인 파형(巴形)동기, 철제 무기와 갑옷 등이 대량 출토됐다. 또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볼 수 있는 옹관묘가 다닥다닥 붙은 집단묘지 등도 확인됐다. 이런 연유로 가야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일본 고대국가의 초기형태라고 할 야마타이국이 28개 소국을 통합한 연맹체로 성립하는 과정이다. 삼국지 동이전은 그것이 전쟁과 복속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랜 전쟁으로 쇠잔한 소국들이 정치적 타협책으로 히미코를 여왕으로 공동추대한 결과라고 기록했다.

히미코는 당시 규슈지역의 세력 투쟁 속에서 어떤 힘을 바탕으로 수십 개의 소국을 압도하는 지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히미코의 정체를 둘러싼 수많은 추측 가운데 ‘한반도에서 건너온 무녀’라는 시각이 비교적 널리 퍼져 있다. 이는 우선 ‘히미코’라는 이름의 뜻을 유추하는 데서 나온다.

‘히미코’라는 이름은 ‘히+미코’로 이뤄진 형태다. 일본어에서 ‘미코’는 존귀한 신분의 사람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였던 ‘미코’(御), 즉 임금을 가리키던 말로 이해된다. ‘히’는 뜻으로는 태양(日)이나 불(火)을 가리키지만 소리로는 ‘비’(妃)나 ‘희(姬)’를 뜻한다. 따라서 가장 단순한 조합으로는 ‘여임금’을 뜻하는 ‘히미코’(姬御)를 생각할 수 있다. 한자를 이렇게 써 놓고 보면 일본에서는 ‘히메미코’라고 읽는 것이 일반적이다. ‘히메미코’가 변해 ‘히미코’가 되고, 이를 들은 중국인들이 소리를 살리고, 깔보는 기분을 섞어 ‘卑彌呼’라고 적을 수 있다.

그러나 ‘미코’는 존귀한 사람을 뜻하기 훨씬 전부터 무녀(巫女)나 신관(神官)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미코’를 표기하는 한자로 어(御)가 선택된 것 자체가 일본어에 남은 제정일치 사회의 흔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동북아의 샤머니즘은 기본적으로 천신, 또는 태양신 숭배사상에서 나왔다. 일본에서 천황이 일종의 현인신(現人神)으로 숭앙받은 것은 국가신도가 천황을 신격화하기 훨씬 이전부터의 일로서 그 뿌리가 대단히 깊다. 일본 역사에서 천황은 세속적 통치 권력의 주인공인 시절은 극히 짧았던 대신 언제나 제사장으로서의 지위는 유지해 왔다.

애초에 제사 올리는 일을 뜻했던 ‘마쓰리고토’(祭事)가 나중에 정사(政事)를 뜻하는 말로 굳어진 데서도 천황이 제사장과 같은 의미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제사장이란 거슬러 올라가면 수석 무당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무당을 가리키는 ‘미코’라는 말이 존귀한 신분을 가리키게 된 것 자체가 제사장의 지위로서 가졌던 권위가 세속의 권력으로 옮겨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천황을 가리키는 ‘미카도’(御門)도 어원을 따져 올라가면 ‘제사장의 거처’, ‘수석 무당의 거처’란 뜻과 다름 아니다. 함부로 이름이나 직책을 부르기 힘든 사람을 그 사람이 머무는 거처로 대신 부르는 것은 한국에도 있었던 전통이다. 사극에서 자주 듣게 되는 “이보게, 매월당(梅月堂ㆍ김시습)”같은 호칭이나, 궁궐의 동쪽에 살던 왕자를 ‘동궁’(東宮)이라고 부른 것 등이 모두 그런 예이다. 따라서 히미코는 ‘수석 여무’(女巫)란 뜻으로 쓰였을 수 있다. 나아가 당시 동북아에 보편적이었던 천신숭배 신앙체계의 무당을 가리키는 ‘태양신 무녀’(日巫)로 해석해도 별 문제가 없다.

삼국지는 히미코가 귀도를 써서 사람들을 현혹했다고 적어 종교적 힘과 권위를 시사했다. 이 귀도는 ‘사람들을 현혹하는 술법’이란 일반명사로도 쓰이지만 삼국지가 씌어진 시절 중국에서는 특정 종교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도 쓰였다. 후한 말기의 혼란기를 틈타 도교에 뿌리를 둔 오두미교나 태평도 등의 신흥종교가 일어났다.

구세신앙과 사회변혁운동이 결합해 ‘황건적의 난’ 등으로 나타나고, 이를 토벌하는 과정에 소설 삼국지의 주인공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런 혼란기가 위(魏)를 중심으로 정리되고 진(晉)으로 넘어갔다. 바로 이때의 오두미교나 태평도 등의 신흥종교를 중국 지배층은 귀도라고 부르며 업신여겼다. 히미코가 구사했다는 귀도는 바로 중국에서 문제가 됐던 귀도일 수도 있고, 중국 지배층의 눈에는 귀도와 같은 것으로 비치게 마련이었을 다른 종교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히미코가 종교지도자로서 강력한 통합력을 가졌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 히미코의 출신을 굳이 한반도에 비정하는 이유는 우선 전진(前秦)의 도교 문화가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전해진 문화 전파 경로 때문이다. 또 청동기 후기에서 철기시대로 넘어갈 당시 도토리 키재기 식으로 진행된 규슈지역의 전쟁에서 압도적 우위를 보일 수 있었던 세력집단이 한반도 남부의 앞선 철기문화를 가진 이주민 집단일 수밖에 없다는 상식적 추론의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히미코의 통치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최대 적수였던 구나노쿠니(狗奴國)와 싸움을 거듭하는 가운데 히미코는 죽음을 맞았다. 새로운 왕이 들어섰으나 부족연맹체 내부의 혼란이 계속되다가 히미코의 일족인 13세 소녀 이요(壹與)가 왕위에 오르면서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266년 이요가 위나라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일본에 관한 기록은 중국 역사서에서 오랫동안 자취를 감춘다. 중국의 정세도 혼란스러웠지만 일본 땅에도 또 한 차례의 거대한 혼란기가 찾아 들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주간한국 / 황영식 논설위원 2005-5-26)

[한·일 관계사 새로보기] 왜(倭) (3)

요시노가리 유적은 일본 야요이시대 환호집락의 전형이다.
우리는 일본을 왜(倭)라고 부르는 데 익숙하다. 오랫동안 그렇게 불러왔고, 역사책에도 그렇게 씌어 있다. 왜(倭)라는 한자의 뜻을 좀 큰 한자사전에서 찾아보면 나중에 붙었을 ‘나라 이름’이란 풀이와 ‘키가 작다; 추하다, 보기 흉하다; 외지다; 유순하다’등이 나와 있다. ‘유순하다’와 ‘외지다’는 거의 쓰임새가 없고, 주로 ‘작다, 추하다, 흉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런 좋지 못한 말을 자신이 속한 무리나,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 붙일 정도로 정신 나간 사람들이란 있을 수 없다. 또 한서(漢書)나 삼국지 위서가 ‘왜인’(倭人)이라고 기록했을 당시 일본 지역에는 한자가 전래되기 전이었다. 주변 이민족 집단에 대해 되도록 좋지 않은 이름을 갖다 붙인 고대 중국인들의 나쁜 버릇 때문에 나온 이름일 뿐이다. 그것이 한자 전래와 함께 한반도에도 그대로 전해졌다. 나중에 일본이 여러 차례 대외적 공식 국호를 바꾸었지만 굳이 애써가며 그에 따라 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왜’라는 이름이 보편적이었다.

한국인의 뿌리로 여겨지는 예(濊)ㆍ맥(貊)이란 이름도 그리 유쾌하지 않다. 예는 같은 발음인 ‘穢’로도 쓰며 ‘더럽다’ ‘불결하다’는 뜻이 중심이다. 더러는 삼수 변이나 벼화 변 대신 ‘맥’에 들어있는, 짐승을 나타내는 갖은돼지시 변으로 쓰기도 한다. 같은 짐승이라도 호랑이나 곰, 상상의 동물인 용이나 기린이라면 모르겠지만 몸집이 작으면서도 거칠거나 잔인한 짐승이라면 기본적으로 업신여겨 부른 이름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이런 중국인의 심술도 최소한의 상식의 틀은 갖추고 있다. 코카콜라를 ‘커코우컬러’(可口可樂)라고 쓰는 데서 보듯, 발음을 최대한 원음에 가깝게 하면서 자신이 부여하고 싶은 뜻을 적당히 부여하는 방식이다. 코카콜라의 경우는 상업적 이유에서라도 ‘입에 맞고 즐길 만하다’는 좋은 뜻을 붙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원을 위협하고, 굴욕을 안기기도 한 북방 기마민족의 이름인 흉노(匈奴)와 같은 경우에는 전혀 좋은 뜻을 부여할 이유가 없었다. ‘떠들썩하다, 흉흉하다, 험악하다’는 뜻을 지닌 흉(匈)을 붙이고 그것도 모자라서 ‘왜노’(倭奴) 등에서 보이는 비칭접미어 노(奴)를 덧붙였다. 현재 중국어 발음은 ‘슝’이지만 고대에는 ‘훙’‘헝’에 가까웠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애초의 뜻은 알 수 없지만 훈족(Huns)의 후예들이 세운 헝가리 등에서 엿볼 수 있는 이름이다.

이런 의도적 왜곡, 또는 오해가 고대 중국인의 전유물인 것만도 아니다. 일본에는 조몬인의 형질 특성이 강하게 남아 있는 아이누족이란 소수민족이 있다. 그런데 ‘아이누’란 말은 아이누어로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것이 종족의 이름이 된 것은 이들이 스스로를 가리켜 “아이누, 아이누”라고 했던 것이 와전된 결과이다. “나는 사람이야, 우리는 사람이야”라는 말을 “우리는 아이누, 우리 나라는 아이누”라는 말로 오해한 때문이다.

그럼 고대 중국인들이 일본 열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어떤 말에서 ‘왜’(倭)라는 이름을 끌어냈을까. 아니, 중국과 접촉한 고대 일본 열도의 사람들이 무엇을 가리켜 ‘왜’라고 했을까. 왜(倭)의 현대 중국어 발음은 ‘워’이고, 고대의 발음도 그와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발음도 비슷한 ‘와’이다. 규슈지역에 소규모 읍락 국가를 이루고 살던 야요이인들이 자신을 가리켜 “와, 와”라고 한 것을 중국인이 발음이 비슷한 왜(倭)라는 글자로 표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이누족 이야기와 비슷한 상황을 그려 보면 ‘와’의 유력한 후보로 우선 떠올릴 수 있는 것이 현대 일본어에도 흔적이 남아 있는 1인칭 ‘와’(我, 吾)이다. ‘와타시’(私ㆍ 나), ‘와가’(我がㆍ 나의), ‘와레라’(我ら) 등의 뿌리인 ‘와’를 떠올려볼 수 있다.

그러나 1인칭 단수나 복수를 나타내는 ‘와’가 나중에 일본의 국명으로 쓰인 ‘야마토’, 즉 ‘다이와’(大和)의 ‘와’(和)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평화와 안온을 뜻하는 화(和)라는 추상어는 나중에 정책적으로 선택했겠지만 기본적으로 무언가 같은 ‘와’라는 발음으로 가리킬 말, 이를테면 한국어의 마을이나 고을, 나라와 같은 말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강력한 후보로 떠오르는 것이 ‘와’(環)다. 일본어에서 ‘와’는 모든 둥근 테두리를 통칭한다. 반지는 ‘유비와’(指環), 목걸이는 ‘구비와’(首環)가 된다. 굳이 둥글지 않아도 대체로 그런 모습이고, 폐쇄회로를 이루면 ‘와’라고 불렀다. 바퀴를 뜻하는 ‘와’(輪)도 둥근 형상을 묘사한다는 같은 어원의 말이지만 표기하는 한자를 달리 하면서 의미가 갈렸다.

한서나 삼국지의 왜인 관련 기술은 야요이 시대 후기의 일이다. 당시의 집단 주거유적으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요시노가리(吉野ヶ里) 유적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책과 환호(環濠)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런 환호집락은 일본어의 언어감각으로 보아 ‘와’로 불렸을 가능성이 크다. 애초의 ‘와’는 방책이나 환호를 가리켰겠지만 그것으로 둘러싸인 마을, 그 마을에서 공동체의식을 느끼며 사는 집단을 가리키게 됐을 것이다.

즉, 국가 개념이 싹트기 전인 당시 ‘와’는 환호집락이나 그에 의해 구획된 공동체, 나아가 부족국가와 같은 소국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또 스스로의 집단이나 지역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동시에 쓰였을 것이다. 우리말의 ‘나라’가 국가를 가리키는 보통명사이지만 한반도계 도래인들이 일본에 ‘나라’(奈良)이란 지명을 남겼듯 고유명사로도 쓰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처럼 ‘와’가 환호집락, 고대국가 성립 이전의 소국이나 그 연맹체를 가리켰을 가능성은 일본 국호의 변천에서도 흔적을 더듬을 수 있다.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는 오늘날 나라현 지역에 두었던 도읍지의 이름을 딴 ‘야마토’였다. 이 ‘야마토’의 정확한 연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나라 산록이라는 지리적 위치와 관련해 산기슭을 뜻하는 ‘야마모토’(山下)가 변화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또 발음상의 유사성에서 히미코가 이끌었다는 ‘야마타이’국이 세력을 확대해, 도읍을 옮긴 것이라는 추정도 있지만 어느 것이든 입증되지 않았다.

한자 전래 후 일본인들은 중국의 표기를 그대로 들여와 스스로의 나라를 왜(倭)라고 나타냈으나 읽기는 고유어인 ‘야마토’로 읽었다. 신라인들이 만든 향가에 서라벌이 ‘동경’(東京)으로 표기된 것과 같은 방식이다. 나중에 같은 발음에 좋은 뜻을 지닌 화(和)로 표기를 바꾸었으나 여전히 ‘야마토’로 읽었다. 고대국가 성립 이후 큰 대(大)자를 붙여 대화(大和)라고 쓰고 ‘큰 야마토’란 뜻으로 ‘오야마토’, 또는 그냥 과거의 습관대로 ‘야마토’로 읽었고, 8세기에 ‘해뜨는 나라’라는 뜻으로 일본(日本)이란 국호를 썼으나 이 또한 ‘야마토’로 읽었다.

대화(大和)라는 국호는 대한(大韓)처럼 국가ㆍ국민적 자긍심을 담으려는 의식의 소산이겠지만 역사의 구체적 변화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곳곳에 환호집락, 즉 ‘와’(環)의 형태로 산재한 소국을 통합해 부족연맹체로, 나아가 고대국가로 만들어 갔다고 볼 때 새롭게 탄생한 ‘큰 나라’는 ‘다이와’(大環)로 부르는 데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소리는 같고, 뜻은 추상성ㆍ이념성이 강한 대화(大和)를 빌려다 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한반도에서 ‘와’(倭)를 어떻게 인식했느냐를 직접 살피기는 어렵다. 당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동시대 사람들의 의식을 직접 더듬을 수는 없다. 다만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과거의 역사서나 그때까지 전해진 이야기를 추려 적은 관련 기록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신라와의 관계가 중심인 이런 기록에 따르면 왜는 기원전부터 한반도 동남부 지역과 갈등과 교류를 거듭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주간한국 / 황영식 논설위원 2005-6-8)

[한·일 관계사 새로보기] 왜(倭) (4)

요시노가리 유적지에서 출토된 한반도계 세형동검(사진 위)과 각종 청동기 거푸집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고대국가 단계에 진입하기 훨씬 이전부터 바다 건너 왜(倭)와 다양한 관계를 맺어왔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중국이나 일본의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어서 12세기 당시까지 남아 있었던 옛 기록을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왜와 관련한 가장 이른 시기의 기사는 BC 50년의 ‘왜인(倭人)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시조(박혁거세)가 거룩한 덕을 지녔다는 말을 듣고 돌아갔다’이다. 신라와의 첫 접촉을 ‘침범’으로 기록하게 한 이 ‘왜인’이 정확히 어떤 세력이었는지를 알 수는 없다. ‘한서’(漢書) 지리지에 따르면 BC 1세기 당시 현재의 규슈지역을 중심으로 한 왜에는 100여개의 소국이 난립해 있었다. 따라서 당시 신라 침범을 시도한 세력은 대마도 등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지역의 소국이거나 그들과 일정한 관계가 있었던 해상세력일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야요이 시대는 한반도 남해안 지역 주민의 집단적 이동에 의해 열렸다. 이들이 독자적 항해능력을 가졌든, 규슈와 한반도 남해, 동중국해 해안과 도서에 근거지를 두었던 해민집단의 도움을 받아 규슈로 건너갔든, 연안 항해능력은 충분히 갖추었으리란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런 항해 능력이 소국 난립기의 정치 혼란을 틈타 밖으로 새어 나온 결과가 잇따른 신라 침탈이었다.

삼국사기에는 왜의 항해능력을 시사하는 다른 기록도 많다. BC 20년 마한에 사신으로 파견된 호공(瓠公)에 대해 ‘종족과 성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원래는 왜인이었다. 처음에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온 까닭에 호공이라고 불렀다’고 적었다. 호공은 나중에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서기 14년의 일로는 ‘왜인이 병선 100여 척을 보내 바닷가의 민가를 노략질하므로 6부의 날랜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막았다. 낙랑인이 나라 안이 비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금성을 공격해서 몹시 급박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소의 과장을 감안하더라도 왜가 대규모 선단을 이루어 공격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또 이를 틈타 낙랑이 경주에 쳐들어 왔다는 내용은 당시 한반도의 세력 각축에서 왜의 움직임도 독립변수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더욱 상징적인 것은 4대왕 석탈해의 기사이다. 삼국사기는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는데 그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 1,000리 되는 곳에 있다’고 썼다. 삼국유사는 다파나국 대신 용성국(龍城國) 출신이라고 썼으나 ‘왜의 동북쪽 1,000리’라는 위치는 동일하다. 당시 왜국이 규슈를 가리켰다는 점에서 석탈해는 오늘날 간사이(關西)나 시코쿠(四國) 지역의 해양세력의 후예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신라에 귀화한 이후 그는 고기잡이를 업으로 했고 양산 아래 호공의 집을 속임수로 빼앗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그가 해양세력을 기반으로 토착세력과 연합해 왕위를 차지했음을 암시한다. 또 삼국유사에는 ‘본래 대장장이 집안’이라고 적혀 있어 철의 해상무역을 통해 세력을 키웠을 것으로도 추정된다. 당시 철과 항해력의 결합은 무엇보다 유력한 세력 증강 수단이었다.

그의 집권 직후 신라와 왜는 우호관계를 맺는다. 삼국사기는 59년 기사에서 ‘여름 5월에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사신을 교환했다’고 적었다. 관계가 호전된 것은 해상세력에 기반한 석탈해의 집권으로 신라의 해상ㆍ해안 방어력이 크게 증강된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삼국사기는 ‘왜인들이 목출도(木出島ㆍ위치 불명)에 침입해 각간(角干) 우오(羽烏)를 보내 방어하게 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우오는 전사했다’(73년), ‘여름 4월에 왜인이 동쪽 변경에 침입했다’(121년)고 적었다. 이런 갈등은 ‘봄 3월에 왜국과 화해했다’는 123년에 이르러 해소되고 이후 100여년에 걸쳐 평화가 지속된다.

‘봄 3월에 죽령(竹嶺)을 개통했는데 왜인이 사신을 보내왔다’(158년), ‘여름 5월에 왜의 여왕 히미코(卑彌乎)가 사신을 보내왔다’(173년)는 데 이르러서는 돈독한 친선관계를 자랑하는 듯하다. 그 결과 ‘6월에 왜인이 크게 굶주려 먹을 것을 구하러 온 사람이 1,000여명이나 되었다’(193)는 기록까지 나오게 된다.

그런 평화는 232년 깨어진다. ‘여름 4월에 왜인이 갑자기 와서 금성을 에워쌌다. 왕이 몸소 나가 싸우니 적이 흩어져 도망했고, 무장한 날랜 기병을 보내 추격하여 1,000여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5월에 왜의 군사가 동쪽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가을 7월에 이찬 우로가 왜인과 사도(沙道)에서 싸웠는데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놓아 배를 불태우니 적들이 물 속에 뛰어들어 모두 죽었다’(233년)는 등의 전쟁이 이어진다. ‘여름 4월에 왜인이 일례부(一禮部)를 습격하여 불태우고는 1,000여명을 붙잡아갔다’(287년) ‘여름 5월에 왜의 군사가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배와 노를 수리하고 갑옷과 무기를 손질하였다’(289년)는 등으로 싸움의 규모가 커진다. 295년에는 왕이 신하들에게 백제와 손을 잡고 바다를 건너 왜를 공격하자고 제의하고, 신하들이 멀리까지 가서 정벌한다면 뜻하지 않는 위험이 따를 수 있고 백제를 믿을 수 없다고 만류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이후로도 신라는 왜의 잇따른 침공에 시달리기를 수없이 거듭한다. 비교적 국력이 약했던 초기의 일이지만 해양세력인 왜와의 대결을 통해 해상력의 중요성을 깨닫고 힘을 키우게 된 측면도 있다.

끊임없이 자행된 이 시기의 왜의 신라 침탈을 두고 학계에서는 왜가 바다 건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김해를 비롯한 남해안 일대의 가야 세력을 가리켰을 것이란 논의도 활발하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삼국사기 기록으로 보아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런 주장의 근거로 우선 거론되는 것이 삼국사기의 많은 기록과 달리 니혼쇼키(日本書紀)에는 비슷한 시기 ‘신라 공격’을 보여주는 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8세기에 편찬된 니혼쇼키가 초기에는 가야, 나중에는 백제를 주체로 한 기술을 뒤집어 편집한 것이어서 주로 신라의 남동쪽 변경을 중심으로 이뤄진 사건을 다룰 까닭이 없었다.

또 5세기 말까지는 통일국가를 형성하지 못했고, 나중에 당나라나 수나라로 사신을 보낼 때도 발해에 의존해야 할 정도로 항해능력이 뒤떨어졌다는 점을 들어 ‘100척의 병선’이 현해탄 바다를 건널 수 없었을 것이란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앞에서 밝혔듯 당시 왜의 철기 문화가 한반도 남해안 주민이 바다를 건너 간 집단이동의 결과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당장 부정되고 만다. 이 점은 나중에 자세히 밝히겠지만 당시 왜의 중심세력이었을 가야계의 항해능력은 대한해협을 건너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또한 신라 침공이 대부분 늦봄과 초여름에 걸쳐 이뤄졌다는 기록은 계절풍의 방향으로 보아서도 출발지가 규슈나 대마도 쪽이었을 것임을 추정하게 한다.

많은 사람들은 해석의 문제는 나중이고, 당장 신라가 왜의 침입으로 고통을 받은 듯한 삼국사기의 기록 자체를 부인하고 싶어 한다.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일제 식민사관이 일본의 우위를 강조하기 위한 재료로 이런 기록들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런 무의식적 거리낌은 현재와 같은 평화론이 있을 수도 없던 당시 왜를 제대로 정벌하지 못한 데 대한 안타까움과도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모두 무의미하다. 우선은 한반도와 왜의 정세가 달라서 바다를 마주보고 있더라도 대응이 다를 수밖에 없다. 또한 차차 밝히겠지만 당시의 역사에서 우리의 역사와 일본의 역사를 가려내 보려는 태도 자체가 무리다.

(주간한국 / 황영식 논설위원 2005-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