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사 새로보기] 동이(1)

황영식의 "민족 빼고 감정 빼고"

중국에서 가장 오래 된 문헌이라는 <상서(尙書)> ‘우공편(禹貢篇)’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기주(冀州)의 항수(恒水)가 제대로 흐르게 되고, 대륙(大陸) 못이 범람하지 않아 거기 사는 도이(島夷)가 원래대로 가죽옷을 입게 됐다. 이 지역을 둘러 본 우(禹) 임금은 갈석산(碣石山)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황허(黃河)로 갔다.’

요(堯)ㆍ순(舜)과 함께 중국의 대표적 성군으로 칭송되는 우(禹) 임금의 치수 공적을 칭송하면서 그 공덕이 주변의 다른 종족에까지 미쳤음을 밝힌 내용이다. <사기(史記)> ‘하(夏) 본기’는 이를 거의 그대로 인용했는데 ‘도이 ’가 ‘부이(鳧夷)로 바뀌었다. 또 같은 책의 ‘오제(五帝) 본기’에는 다시 ‘조이(鳥夷)’로 나와 있다.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데다 ‘오리(鳧)’를 새의 대표명사로 썼으리란 점에서 ‘부이’는 ‘조이’의 다른 표기이고, ‘도이’는 ‘조이’를 잘못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조이=도이’의 정체성을 놓고 예로부터 여러 설이 분분했다. 당(唐)의 장수절(張守節)은 ‘말갈(靺鞨)이 옛날의 숙신(肅愼)이고 거기서는 돼지를 키워 고기를 먹고,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조이=도이’가 말갈이라고 보았다. 원(元)의 김려상(金麗祥)은 ‘조이=도이’를 랴오둥(遼東) 지역과 한반도에 살던 종족으로 보았고, 청(淸)의 호위(胡衛)는 아예 마한 변한 진한의 삼한 사람들로 보았다.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이나 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繹史)>도 ‘조이=도이’를 한반도 사람으로 보았다.

현대 들어 북한의 이지린은 오늘날 한민족의 원류로 여겨지는 예맥(濊貊)족이 정착하기에 앞서 랴오둥(遼東) 지역과 한반도에 살았던 종족의 범칭이 조이라고 보았다. 즉 고조선 형성 이전의 원주민이 조이였고, 북방계 예맥족이 BC 2,000년 무렵 남하해 조이와 융합했다는 것이다.

조이와 한민족 정체성의 중요한 요소로 거론되는 ‘동이(東夷)’와는 어떤 관계일까. 그것은 동이를 남만(南蠻) 서융(西戎) 북적(北狄)과 병렬되는 ‘동쪽 오랑캐’의 일반명사로 보느냐, 특정 종족을 뜻하는 고유명사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주자(朱子)의 친구인 여조겸(呂祖謙)의 <동래집(東萊集)>은 ‘견이( ?夷) 우이(?夷=于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남이(監夷= 풍이, 風夷) 양이(暘夷=陽夷)’등 구이(九夷)를 들었다. <후한서(後漢書)> 등의 기록에도 비슷한 이름이 등장하고, 회이(淮夷) 내이(萊夷) 장이(長夷) 등도 나온다. 이 ‘구이’를 중국 상고대 정치권력을 나눠 가진 각지의 유력자, 즉 봉건제 성립 이후의 제후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종족 또는 세력집단의 이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란 이름을 가진 다양한 종족들이 하(夏)ㆍ은(殷=商)대를 통해, 일부는 주(周) 말까지 이른바 ‘중원( 中原)’의 동서 지역에 산재해 있었다. 중원은 황허(黃河) 중하류 지역, 즉 현재의 허난(河南)성을 중심으로 산둥(山東)성 서부, 샨시(陝西)성 동부를 포함하는 중국 역사의 중심무대를 가리킨다. 구이 각각이 세력집단의 고유명사임은 <후한서> ‘동이열전’에 ‘성탕(成湯)이 즉위 후 견이를 정벌했다’는 등의 풍부한 기술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중원을 중심으로 구이를 자연스럽게 서이와 동이로 나눌 수 있다. 이 때의 ‘동이’는 중원 동쪽의 ‘이’를 가리킨다.

한편 중국의 가장 오래된 사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는 ‘동이’의 ‘이’가 원래 큰 ‘대(大)’와 활 ‘궁(弓)’을 합친 글자로 그것만으로 ‘동쪽 사람들’(東方人)의 뜻이라고 밝혔다. 또한 공자가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君子不死之國)인 구이의 땅에 가고 싶다”고도 적었다. 이 때의 동이는 구이와 전체와 동의어가 된다.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로 유명한 촨시녠(傳斯年, 1896~1950년)은 ‘동이’를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로 나누어 설명했다. 그는 오늘날의 산둥ㆍ장시(江蘇)ㆍ안후이(安徽) 등지에 살았던 우이 회이 래이 등을 좁은 의미의 동이로 보았다. 이들은 태호복희(太昊伏羲)씨와 소호금천(少昊金天)씨를 조상신으로 삼았으며, 태호복희씨가 팔괘(八卦)를 만들고 그것이 한자의 기본이 되는 등 중국 문명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고 지적했다. 또 중국 상고사를 서쪽의 하ㆍ 주와 동쪽의 이ㆍ 은의 대결로 파악했다. 이 좁은 의미의 동이는 춘추시대(BC 8~7세기)까지 큰 세력을 이루었으나 진(秦)의 통일로 편입된 후 독자적 세력으로서는 소멸했다. 반면 넓은 의미의 동이는 발해만과 황해 연안, 랴오허(遼河) 일대와 한반도 북부 등에 분포했던 주민집단으로 보았다.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동이는 더욱 넓은 뜻으로 쓰여 중국 동쪽의 주민집단을 모두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됐다. <삼국지(三國志)> 이후 동이는 랴오둥과 만주 한반도와 일본 열도 주민집단을 포괄하는 말로 쓰였다.

현재 국내 재야 사학계는 좁은 뜻의 동이와 넓은 뜻의 동이를 구별은 물론, 동이란 말의 시대 흐름에 따른 의미 변화를 무시한다. 중국 고문헌에 나오는 모든 ‘이’와 동이를 현재의 한민족과 직결시켜 중국 상고사를 신화시대에서 하ㆍ은ㆍ주에 이르기까지 한족과 한민족의 투쟁사로 파악한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연구는 좁은 의미의 동이족 지역과 랴오둥, 한반도 지역의 문화가 뚜렷한 성격 차이를 드러낸다는 데 집중되고 있다.

특히 사회경제적 분화와 이에 따른 정치적 결집이 시작된 시기의 청동기 문화가 확연한 차이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동이= 한민족’ 시각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동이가 예맥족 남하 이전 랴오둥과 한반도의 원주민이라는 북한 이지린의 주장도 크게 보아 비슷한 한계를 안고 있다. 다만 그가 중국과 만주의 난생설화를 ‘조이’의 신화로 파악해 공통성을 더듬은 것은 흥미롭다.

<사기>에 따르면 은=상의 시조 성탕은 제곡(帝?)의 아들 계(契)의 후손인데, 계는 어머니가 제비 알 떨어진 것을 주워 먹고 잉태하여 낳았다. 이는 은을 세운 종족이 제비 토템을 가졌던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은의 수도는 현재의 허난(河南) 지역에 있었으나 그 일족이 대대로 황해에 가까운 산둥 지역에 살았다. 이 지역에서 나중에 역시 제비를 뜻하는 연(燕)이라는 강국이 일어난 것도 단순한 우연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사기>는 주의 중심 종족도 조류 토템을 갖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주 왕실의 조상인 변(弁)은 생후 곧바로 얼음으로 덮인 개천에 버려졌는데 새들이 날아 와 날개로 덮어 보호해 주었다고 한다. 주 왕실의 선조는 오랫동안 오늘날 샨시(陝西) 시안(西安) 지역에 봉토를 갖고 있었고, 초기 수도도 여기에 있었다.

이는 동이족의 일부를 가리키거나 다른 명칭일 조이라는 이름에서 분명하게 추정되는 조류 토템과의 관계로 보아 은ㆍ주의 왕족과 동이족 사이에 상당한 종교적 교감이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일 수 있다.

은의 청동기에 수없이 새겨져 있는데도 분명한 의미가 파악되지 않은 채 오랫동안 단순히 어두에 붙인 발어사(發語詞)로 여겨져 왔던 ‘추(?)’자가 은의 숭조(崇鳥) 신앙과 관련된 상징이라는 가설도 국내에서 나와 있다. 추(?)는 문헌 등에서 ‘유(維)’등과도 뜻과 소리가 통하는데 모두 새와 관련된 글자라는 점에서 조류토템에서 비롯한 동이족의 족휘문(族徽文)이 상형문자로 정착된 것으로 본다.

이런 일련의 가설은 우리 전통문화에 남은 숭조신앙 흔적과 관련해 적잖은 눈길을 끈다. 또한 일본에도 비슷한 흔적이 남아 있고, 일본이 넓은 의미의 동이로서 간주됐다는 점에서 ‘동이’는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한국과 일본의 첫 접점이기도 하다.

(주간한국 / 황영식 논설위원 2005-4-27)

[한·일 관계사 새로보기] 동이(2)

한국 전통문화에 남은 숭조(崇鳥) 또는 조령(鳥靈) 신앙의 흔적 가운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솟대다. 긴 장대 위에 새가 앉은 모양의 솟대는 아득한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온 문화유산이다. 삼한(三韓)에서 신을 모시던 성스러운 장소인 ‘소도’(蘇塗)에 세운 기둥인 ‘솟을나무’(立木)를 ‘솟대’라고 했고, 그것이 그대로 신라에 이어졌다고 한다. ‘소도’ 자체가 ‘솟대’로 음운변화를 겪었을 가능성도 있다.

솟대의 기원은 청동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한반도뿐만 아니라 몽골 시베리아 만주 일본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분포한다. 북아시아 샤머니즘(무속신앙) 문화와 관계가 있고, 특히 ‘조이(鳥夷)= 부이(鳧姨)’로도 표기된 동이족과 직접적 관계를 가진 것으로 추정하는 데 별 이견이 없다.

새만금 간척사업에 반대하는 환경운동가들이 부안 갯벌에 무더기로 세웠듯 한국의 솟대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외형뿐만 아니라 솟대를 만들어 세우는 마음가짐까지도 옛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솟대의 장대는 대개 나무지만 돌기둥으로 된 것, 봉수대처럼 돌을 쌓아 올리거나 짚단을 새끼줄로 감아서 만든 것도 있다. 나무 장대는 곧은 장대보다 비틀린 나무를 많이 사용하고, 아예 새끼줄을 비스듬히 감은 것도 있다. 천신 또는 태양신 숭배에서 비롯한 새 숭배가 농경문화와 접목한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짚이나 새끼줄이 모두 풍요로운 수확을 기원하는 연기물(緣起物)이다. 또 비스듬히 감긴 새끼줄이나 비틀려 올라간 듯한 장대는 용틀임을 연상시킨다. 비와 바람을 부르는 용의 조화를 상정해 가뭄과 홍수, 태풍을 피할 수 있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알맞은 비와 조용한 바람, 즉 우순풍조(雨順風調)를 비는 마음은 솟대 꼭대기에 얹힌 새 조각이 대부분 오리나 기러기를 형상한 듯한 데서도 읽을 수 있다. 오리와 물, 기러기와 계절풍의 관계 등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물론 솟대와 농경 제의의 이런 접목은 시기적으로 나중에 이뤄졌다. 솟대의 원래적 기능은 하늘과 땅,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접점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신의 뜻을 포착하고, 거꾸로 인간의 희구를 신에게 전하는 일종의 안테나다. 다만 이 안테나는 완벽한 무선 안테나가 아니어서 신탁(神託)은 신의 사자인 새가 안테나에 앉을 때 비로소 포착된다. 또한 인간의 기도도 솟대 위에 앉은 새가 우선 받은 후 하늘 높이 신에게 날아 올라가 전한다. 솟대 위의 새 조각은 신과 인간의 의사소통을 매개하는 신령한 존재이다.

새는 천신 숭배 사상이 담긴 모든 신앙체계에서 거의 예외 없이 이런 역할을 맡는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헤르메스나 페가수스가 날개를 달고 있었던 것은 물론, 기독교의 천사도 날개를 단 것으로 상정된다. 북아시아의 천신숭배 사상과 무속신앙에서는 그 중요성이 더욱 크다. 한 무속신앙 연구자는 현재 한국의 무당들이 받고 있는 신탁의 80% 이상이 새의 영혼, 즉 조령에 의한 것이라는 재미있는 통계를 밝히기도 했다. 그렇게 보면 새가 걸어 나와 점괘를 써넣은 쪽지를 골라 주는 ‘새점’에도 나름대로 뿌리가 있는 셈이다.

앞서 중국 상고대 은(殷)ㆍ주(周)의 중심세력이 조류토템을 이어왔을 가능성, ‘조이=부이’라는 이름으로 보아 당시의 동이족 일반이 조령 신앙을 갖고 있었을 가능성을 함께 언급했다. 중원의 동쪽 지역에 살면서 중국의 문화 원류 형성에 크게 기여한 당시의 동이와 나중에 중국 동북쪽의 이민족 집단을 통틀어 가리킨 동이를 한 덩어리로 묶어 생각하기 어려움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전자는 중국 역사에 편입돼 묻혀 갔고, 후자는 그 이후에도 독자적 역사를 이어갔다. 부분적으로 겹칠 수는 있겠지만 그런 중복이 문화적 차원을 넘어 혈연적 친연성으慣沮?이어보기는 어렵다. 넓은 의미의 동이족 전체에 퍼진 숭조 탑湛?조류토템을 가진 은ㆍ주 유민들의 직접적 이동의 결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있다. 혈연적으로도 그렇고, 고고학적 유물로 나타난 문화 토양의 차이도 크다.

북방 아시아계 고유의 천신숭배 사상과 그에 따른 숭조 풍습이 상고시대 중국 동부 지역의 조류토템과 우연히 겹치면서 이론적 틀을 갖추었거나, 기자(箕子) 동래설에서 보듯 일부 유민의 이동에 의한 문화 전파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숭조 신앙 자체도 많은 변용을 겪었을 것이다. 세발 까마귀, 즉 삼족오(三足烏)가 대표적인 예이다. 솟대의 새 조각에 오리 다음으로 많은 것이 까마귀다. 현재 한국에서 까마귀는 생명보다는 죽음과 더 밀접한 흉조(兇鳥)로 여겨지고 있지만 옛날에는 새 가운데서도 신령스러움으로는 으뜸으로 꼽히던 새였다.

각저총, 쌍영총, 강서대표, 덕흥리 고분 등 고구려 고분의 벽화에는 삼족오의 모습이 뚜렷이 남아 있다. 진파리 1호 고분에서 나온 금관 장식의 한 복판에도 삼족오가 뚜렷하다. 북방 계통인 고구려의 삼족오 신앙은 북아시아계 공통의 숭조 신앙이 세분화ㆍ정교화 과정을 거친 결과일 것으로 보인다.

삼족오는 BC 2세기 무렵에 축조된 허난(湖南)성 창시(長沙) 마왕퇴 1호 고분의 비단 그림에 일찌감치 등장한다. 이 그림은 중국 신화에 끊임없이 등장한 삼족오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담았다. ‘태양 속에 세발 달린 까마귀가 있다’는 기록이 ‘초사’(楚辭)나 ‘산해경’(山海經)에도 나와 있다.

불탄 듯 검은 까마귀의 모습에서 천신=태양신과 함께 머문 까마귀의 신성(神聖)함을 연상해 낸 결과로서 북아시아 보편의 숭조 사상과 통한다. 문제는 왜 세발인가이다. 자연에 존재하는 보통 까마귀와는 다른 특별한 까마귀를 상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음양사상에서 짝수는 음(陰)의 수이고, 따라서 불길한 숫자였다.

신령스러운 존재를 그런 불길한 수와 연관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양(陽)의 숫자인 3이 필요했다. 따라서 고구려 벽화의 삼족오는 음양사상이 들어온 이후에 정착된 관념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북방계 공통의 숭조신앙 흔적이 남은 시베리아나 몽골 지역에서 삼족오 관련 유물이 나오지 않고 있는 점에서도 그렇다.

일본에 이어져 내려오는 삼족오 신앙도 마찬가지다. 일본축구협회(JFA)의 엠블렘은 삼족오가 한 발로 축구공을 움켜쥐고 있는 그림이다. 민간 기업의 로고나 신사의 사문(社紋)에서도 삼족오를 흔히 볼 수 있다. 일본이 삼족오를 내세우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이고,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동원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뒷받침하기 위한 상징이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엉뚱한 지레짐작일 뿐이다.

8세기 초에 편찬된 ‘니혼쇼키’(日本書紀)와 ‘고지키’(古事記)에는 이미 삼족오를 가리킨 것으로 보이는 ‘야타가라스’(八咫烏)라는 신령스러운 새가 나온다. ‘야타’는 길이의 단위로 대단히 커다란 것, ‘가라스’는 까마귀를 가리킨다. 장자(莊子)가 언급한 대붕(大鵬)처럼 큰 날개를 가진,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까마귀다. 또한 먼 옛날부터 이어진 신사의 설화에 삼족오가 자주 등장하며, 지금도 삼족오를 섬기는 신사도 많다. 고구려의 강한 영향을 받은 고분 벽화에도 삼족오는 선명하게 남아 있다.

(주간한국 / 황영식 논설위원 2005-5-4)

[한·일 관계사 새로보기] 동이 (3)

신화 속의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아닌 현실의 까마귀도 일본에서는 제법 대접을 받고 산다. 일본에는 까마귀가 참 많다. 도쿄를 비롯한 대도시 어느 곳에서나 쉽게 까마귀를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언제부턴지 까마귀를 흉조로 여겨 왔지만 일본에서는 불길한 새라고 여기는 사람은 없다. 다만 지나치게 개체수가 늘어나 도시 행정의 골칫거리로 등장하면서 점차 귀찮고 성가신 새로 여겨지고 있을 뿐이다.

일본 도회지에서 급격하게 늘어난 까마귀는 대부분 큰부리까마귀다. 이름처럼 부리가 큼지막하고 몸길이가 최대 60㎝에 이르는 늠름한 새이다. 과거 우리 농촌의 들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몸집이 작은 까마귀와 달리 큰부리까마귀는 원래 숲에서 살았다. 도시화에 따른 택지개발로 대도시 주변의 숲이 급격히 파괴되자 환경이 비슷한 도심의 공원으로 서식지를 옮겼고, 대량으로 나오는 음식쓰레기를 먹이로 삼아 환경변화에 보란 듯이 성공했다.

도쿄의 경우 메구로(目黑) 국립자연교육원 등의 깊은 숲에서 떼 지어 잠자고 아침 일찍 긴자(銀座)나 신주쿠(新宿) 등 도심으로 날아 가 음식물쓰레기를 뒤진다. 육류 찌꺼기로 포식을 하고, 남은 음식을 곳곳에 숨겨 두었다가 찾아 먹는다. 쓰레기 봉지를 마구 찢어 놓는 바람에 우선 환경미화원들의 미움을 샀다.

일반인의 미움을 산 것은 번식기의 활발한 ‘주거 침입’과 공격성이다. 봄철 번식기가 되면 암수가 짝을 이루어 무리를 떠나 살림을 차린다. 나무 위에 까치집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집을 짓는다. 나뭇가지로 얽어 만든 집에 보드라운 풀잎 등으로 보금자리를 만들어 알을 낳는다. 도시에서 마른 나뭇가지 구하기가 쉽지 않다 보니 철사 옷걸이 등의 대용품을 흔히 이용한다. 아파트 건조대 등에 걸려 있는 빈 옷걸이를 훔치려고 수시로 베란다로 날아와 주부들을 놀라게 한다.

번식기에는 영역 의식도 대단히 강해서 반경 1㎞ 정도 안으로 다른 까마귀가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새끼를 키우는 동안은 둥지로 접근하는 모든 동물을 공격한다. 가로수나 동네 공원의 나무에 둥지를 틀어놓은 까마귀가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나무 밑에서 쉬려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뒤통수를 쪼여 상처가 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더욱이 개보다 영리할 정도로 지능이 높아 둥지나 자신에게 위협적 행동을 한 사람을 기억했다가 매일 출근할 때마다 경계하고 공격하는 사례도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들을 귀찮아할 뿐 크게 미워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까마귀가 가져온 생활의 불편이 현대적 반감을 자극하지만,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잠재의식 속의 조령(鳥靈)신앙을 지울 정도는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한반도에서 자연신앙(애니미즘)이나 무속신앙(샤머니즘)이 불교와 유교, 천주교와 개신교에 의해 크게 밀려난 것과 달리 자연ㆍ 무속 신앙을 이은 신도의 강한 전통이 유지됨으로써 가능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까마귀에 대한 일본인의 잠재의식은 ‘덴구’(天狗) 신앙에 비교적 강하게 남아 있다. 덴구는 우리의 도깨비를 연상시키는 일본의 요카이(妖怪)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존재다. 많은 신사의 주신(主神)으로 섬김을 받을 정도로 탄탄한 지위를 누리고 있다.

덴구는 흔히 뻘건 얼굴에 길쭉한 코를 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탈은 관광기념품으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크고 긴 코가 가장 큰 특징으로 여겨지고, 묘한 성적 연상을 부르면서 날로 코가 커지고 있다. 심지어 자식을 얻으려고 덴구 신사에 기도하는 사람들까지 있어 실소를 자아낸다. 이런 코 큰 덴구, 즉 ‘하나타카텐구’(鼻高天狗)는 뿌리가 그리 깊지 않다. 애초에는 새의 부리를 형상화한 매부리코에 등에는 날개를 단 까마귀 덴구, 즉 ‘가라스텐구’(烏天狗)에 대한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澯뵀袂릿?신의 뜻을 전하는 사자이기도 했고, 그 자체로도 신묘한 힘을 지닌 작은 신이기도 했다.

이 가라스텐구가 도교의 전래 이후 산속에 파묻혀 도를 닦던 수행자인 ‘야마부시’(山伏)의 이미지와 겹친 결과가 하나타카텐구이다. 흰 수염과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육환장을 짚고 있는 산신령 모습이다. 가라스텐구의 바탕인 조령신앙에 산신신앙이 결합돼 변용되는 과정을 떠올릴 수 있다.

일본 씨름인 스모(相撲)에도 조령신앙의 요소가 강하게 남아 있다. 현재 전통 씨름은 몽골과 한반도, 일본에 남아 있지만 제의적 색채는 스모가 가장 강하다. 일본의 역사 기록에 남은 가장 오래된 스모는 642년 백제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궁중 연회에서 이뤄진 것이지만 그에 앞서 농경의례로서 농촌에서 널리 행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봄에는 한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제의로서, 가을에는 하늘에 풍작을 감사하는 봉납의례로서 행해졌다.

일본 풍속화인 우키요에(浮世畵)에 남은 옛날 씨름꾼의 모습은 고대 로마 검투사나 전통적 일본 무사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강인해 보이는 근육질 몸매나 날카로운 눈매는 찾아보기 어려운 대신 불룩한 배와 부풀어 늘어진 가슴, 말끔하게 면도를 한 턱 등에서 전체적으로 둥글고 부드러운 느낌을 받게 된다. 투사의 이미지보다는 젖살이 오른 아기나 임신부의 모습을 떠올리기 쉽다. 이는 생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스모의 제의적 원형을 더듬게 한다.

도효(土俵)라고 불리는 씨름판 자체가 제의적 장치다. 진흙을 다져 올려 제법 높은 사각형의 단을 쌓아 놓고, 그 위에 굵은 새끼줄로 동그라미를 만들고, 그 안에 모래판을 만들어 경기를 하게 한다. 흙과 볏짚으로 엮은 새끼줄 등은 한결같이 생산과 수확의 상징물이다. 씨름판 위에 매달아 늘어뜨린 작은 지붕인 쓰리야네(吊屋根)는 천황가의 조상신을 섬기는 이세진구(伊勢神宮) 본전의 지붕을 본 딴 것으로 스모 자체가 제사의 일부임을 보여준다.

씨름꾼은 정한수를 마신 후 하얀 닥종이로 입을 닦고, 제단인 도효에 올라간다. 또 경기 직전 마지막으로 몸을 푸는 단계에서 소금을 집어 뿌린다. 물과 소금은 제의에서 대표적인 정화(淨化) 수단이다. 여성이 도효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신성한 제단이 부정을 타서는 안 된다는 뿌리 깊은 잠재의식에서 비롯했다.

그런 도효 위에서 씨름꾼은 다리를 벌리고 몸을 앞으로 숙여 서로 노려보다가 손으로 땅을 짚은 후 맞붙어 싸운다. 몸을 앞으로 크게 숙이면 허리에 엉성한 발처럼 두른 사가리(下がり)가 하늘로 곧추 선다. 닭싸움에 나선 수탉이 싸움에 들어가기 직전 몸을 낮추고 목을 앞으로 길게 뺀 채 목덜미의 깃털을 꼿꼿이 세운 모습과 흡사하다.

싸움 직전의 새가 이렇게 기를 잔뜩 끌어 모은 순간은 생기(生氣)나 영(靈)이 절정을 이룬다. 모든 종교의 제사장이 그렇듯 신성한 제단에 올라 신에게 씨름 제사를 올리는 씨름꾼도 신과 인간의 매개자가 돼야 한다. 조령신앙에서 신과 인간의 매개자로 여겨져 온 새의 모습을, 그것도 생기가 절정에 이른 모습을 형상화함으로써 씨름꾼은 그런 매개자로 화하는 것이다.

스모가 이처럼 농경의례 무대에 조령신앙이란 내용을 담아 놓은 것이라면 한반도에 널리 분포한 솟대가 조령신앙과 농경의례를 결합한 형태로 전해져 온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조류토템을 널리 공유한 광의의 동이족이 찍어 놓은 발자국 위에 이후의 역사 변천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 빗물이 고였다.

그런 흔적의 공통성은 한반도와 일본에 지금도 남아 있는 민간신앙의 뿌리를 더듬어 짐작해 볼 수도 있지만 한반도와 일본의 가장 오래 된 모습을 담아 놓은 중국의 옛 역사기록을 통해서 더욱 더 분명하게 그려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삼국지 위서(魏書) 동이전에 남은 한반도 고대국가와 왜(倭)의 모습이다.

(주간한국 / 황영식 논설위원 2005-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