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서 만나는 고구려]<5·끝> 마구

고구려인들은 말 타기와 사냥 등 무예를 중시했다. 이에 따라 마구(馬具·말갖춤)가 크게 발달했다. 고구려의 마구 수준은 매우 높았고, 백제 신라와 일본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고구려의 마구는 발전된 경제와 문화, 강한 군사력 수준을 보여 준다.

이번 고려대의 ‘고구려 특별전’에는 5세기 전반 무렵의 안장턱 테두리와 재갈멈추개, 발걸이(등자), 말띠드리개 등이 전시된다. 이 마구는 1976년 평안남도 평성시 지경동 1호 무덤에서 출토됐다. 흙 속에 오래 묻혀 있었던 탓에 나무나 천 가죽으로 된 부분은 모두 썩어 없어지고 금속 부분만 발굴됐다. 쇠로 된 발걸이를 제외하곤 모두 동(銅)으로 만들고 도금한 이 마구는 화려하면서도 말을 타고 부리는 데 매우 편리하게 돼 있다.

전문가들은 귀족계급이나 지휘관급의 마구 장식으로 추정한다.

안장턱 테두리는 3.5cm 폭의 청동 띠를 U자 모양이 되도록 접어 말안장의 앞턱을 감쌌던 것이다. 안장턱에 입힌 금도금은 지금도 잘 남아 있다.

재갈멈추개는 재갈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면서 말고삐를 당기면 말의 입 양옆을 조여 주는 역할을 한다.

말띠드리개는 나무 잎사귀처럼 생겨 흔히 행엽(杏葉)이라고 불린다. 말이 발을 뗄 때마다 철렁철렁 소리를 내면서 그 위용을 보이기 위해 말의 가슴걸이에 달았던 장식품이다.

발걸이는 안쪽을 나무로 만들고 그 위에 철판을 덧씌우는 식으로 만들어졌다. 발을 딛는 부분에는 발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3개의 도드라진 턱이 있다.

▽도움말=최무장(崔茂藏) 건국대 명예교수, 김두철(金斗喆) 부산대 교수

▽참고=북한 조선유적유물도감 제4권

[서울서 만나는 고구려]<4> 시루

황해도 안악군 오국리 안악 3호 무덤 벽화에는 고구려 여인들이 집안일을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에는 부뚜막에 놓인 큰 시루가 등장한다. 한 여인이 오른손에는 주걱을, 왼손에는 젓가락을 들고 있다. 시루에 물을 축여가며 긴 젓가락으로 음식이 익었는지 찔러보는 모습으로 보인다.

이번 고려대의 ‘고구려 특별전’에 온 시루는 평안남도 평성시 지경동 1호 무덤에서 출토됐으며 4세기 말∼5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악 3호 무덤 벽화에 나오는 시루 형태와 매우 흡사하다. 입구 쪽이 넓고 몸체의 윗부분에서 배부르다가 점차 아래로 내려가면서 좁아진다. 몸체 좌우에는 2개의 띠고리 손잡이가 달려 있고 바닥에는 37개의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다. 그릇 겉면은 윤기가 도는 검은 회색이다.

이 유물은 고구려 중기 시루의 대표적 형태다. 고구려 초기 시루는 밑바닥에 작은 구멍 수십 개가 무질서하게 뚫려 있는 데 비해 후기로 갈수록 구멍의 크기가 커지고 중앙에 하나의 동그란 구멍을 중심으로 주변에 6개 또는 4개의 구멍이 뚫린 형태로 발전해 간다.

이후 6세기 후반쯤에는 주변의 구멍 4개가 타원형으로 변하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시루와 유사하다. 백제의 시루는 좁고 긴 형태에 쇠뿔 모양의 손잡이가 달려 있지만, 시루 밑바닥의 구멍 형태는 고구려 후기의 것과 비슷하다.

시루는 우리나라 밥 문화의 발달사에서 빠질 수 없는 조리 용구로 초기 철기시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시루의 등장은 곡식 농사가 상당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 주는 징표로 볼 수 있다.

▽도움말 주신 분=박순발(朴淳發) 충남대 교수, 최종택(崔鍾澤) 고려대 교수

[서울서 만나는 고구려]<3> 불꽃뚫음무늬금동관

 

‘삼국지(三國志)’나 ‘신당서(新唐書)’ 등 중국의 옛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인들은 머리에 절풍(折風·고깔 모양의 쓰개)을 썼다. 또 벼슬을 가진 사람(사인·士人)은 새의 깃털 2개를 꽂고 금테나 은테를 섞어 둘렀다고 했다.

지금까지 출토된 고구려 장식품 가운데 관(冠)은 그 예가 많지 않다. 그중 백미가 바로 평양 청암리 토성 부근에서 출토된 4, 5세기경의 불꽃뚫음무늬 금동관이다.

띠 모양의 테두리 윗줄에는 인동초무늬를, 아랫줄에는 구슬무늬를 새겼고, 그 사이에 7개의 나뭇잎 장식을 넣었다. 테두리 위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나 바람에 세차게 날리는 구름 같은 무늬를 새긴 9개의 세움 장식(입식·立飾)으로 표현돼 있다. 이는 우리 눈에 익은 백제 무령왕의 금관 장식과 유사하다.

세움 장식 가운데는 가장자리를 불꽃무늬 대신 가위로 오려낸 다음 비틀어 꼬아 장식한 종류도 있다. 이는 고구려 장신구만의 특징적 기법이다. 맨 아래쪽 좌우에는 마치 옷고름과 비슷한 드리개를 별도로 만들어 길게 늘어뜨렸다.

이 금동관은 고구려를 대표하는 왕관으로 알려져 있으나 고구려의 왕이나 귀족이 썼던 실용품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전문가들은 고구려의 금동관이 신라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다. 4세기 말∼5세기 초 신라 무덤에서 나타나는 황금문화의 기원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있지만 그 기원은 고구려였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고구려 금동관의 특징적 요소인 금동판을 뚫어 무늬를 만드는 투조(透彫) 기법이나 촘촘히 오려 꼬는 방식 등은 신라 금관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도움말 주신 분=이한상(李漢祥) 동양대 교수, 최장열(崔章烈)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참고 북한 자료=조선유적유물도감 제4권

[서울서 만나는 고구려]<2> 명문금동판

“원하옵건대 왕의 영혼이 도솔천(兜率天)으로 올라가 미륵(彌勒)을 뵙고 천손(天孫)이 함께 만나며, 모든 생명이 경사스러움을 입으소서.”

1988년 6월 함남 신포시 오매리의 이른바 절골 유적에서 출토된 명문(銘文·새긴 글씨) 금동판에는 이 같은 문구가 쓰여 있다.

명문 가운데 ‘천손’이란 말은 중국의 천자(天子)나 일본의 천황(天皇)에 상응하는 개념. 그 이전까지 발해 문왕(文王)이 사용했던 ‘천손’이란 단어가 이웃나라를 모방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이 고구려 금동판의 발견으로 발해 ‘천손’의 원류가 고구려임이 확인됐다.

앞부분은 깨어져 없어지고 뒷부분만 남아 있는 이 금동판의 명문 중 현재 확인되는 글은 12행으로, 이 중 판독이 가능한 글자가 113자이고 떨어져 나갔거나 마모돼 식별이 어려운 글자는 26자이다.

특히 명문에는 탑을 건조한 내력과 함께 ‘○和三年 歲次 丙寅 二月二十六日’(○화 3년 세차 병인 2월 26일)이라는 작성 일자가 나와 있다. 여기서 ‘○和’라는 연호는 자획이 떨어져 나가 분명치 않으나, 북측은 이를 ‘태화(太和)’로 판독하고 고구려 양원왕(544년 또는 545년∼559년) 때인 546년 2월 26일 이 금동판을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학계는 또 이 금동판은 외척세력 간에 발생한 왕위계승 분쟁 와중에서 사망한 안원왕을 위한 추복(追福) 불탑의 탑지(塔誌)로 보고 있다. 이 불탑을 봉헌한 측은 옛 동옥저(東沃沮) 지역의 유력 가문이었으나 왕위계승 분쟁에서 패배한 세력일 것이라는 게 학계의 추론이다.

▽도움말 주신 분=송기호(宋基豪·한국사) 서울대 교수, 이도학(李道學·한국사)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참고 북한자료=조선유적유물도감 제4권

[서울서 만나는 고구려]<1> 기마모형과 사신

< 7일∼7월 10일 고려대 일민박물관(백주년기념삼성관)에서 열리는 ‘고구려 특별전-한국 고대의 글로벌 프라이드, 고구려’에는 북한의 조선중앙역사박물관이 자랑하는 국보급 유물을 포함한 국내외의 대표적 고구려 유물이 다수 선보인다. 특별전 개막에 앞서 고구려인의 웅혼한 기상과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주요 유물을 소개하는 지상전을 갖는다. >

고구려인들은 일찍부터 말타기를 즐겼다. ‘삼국지’ 등 옛 문헌에 고구려인들은 과하마(果下馬·과일나무 밑을 지나갈 정도로 작은 말) 같은 말을 많이 길렀고, 어려서부터 말을 타고 활쏘기 창던지기 등 무술을 연마했다고 기록돼 있다.

1994년 북한 강원도 고산군과 회양군의 경계인 철령의 3세기경 고구려 건물터에서 발굴된 기마모형 58점(철제 54점, 청동 4점)은 이 같은 고구려의 활달한 기상을 보여 주는 유물이다. 이번 고구려 특별전에는 철제 말과 청동제 말 각 1점과 사신(四神) 4점이 전시된다.

발굴 당시 이들 기마모형은 크게 3개의 무리를 지어 놓여 있었다. 수십 개의 기마모형이 이처럼 무더기로 나온 것은 유례를 찾기 힘들다.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말 모형이 발굴된 경우는 많으나 대부분 흙이나 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지휘관용을 본뜬 것으로 보이는 무리 중심의 대형 청동 기마모형은 두꺼운 가죽깔개와 꽃무늬를 수놓은 고급 담요 등 마구(馬具) 장식이 화려하다.

더욱이 주목할 점은 주변에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를 사방에 배치했다는 점. 사신은 일반적으로 죽은 자의 영혼을 지켜 주는 수호신으로서 고분 벽화에 흔히 등장하지만 기마대 행진이라는 현실 세계에 적용된 예는 처음이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기마대 행진 모형이 제사 의식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한다. 기마 모형이 출토된 건물터는 기마부대가 큰 싸움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세운 건물이 있었던 곳으로, 기마부대의 전승(戰勝)을 기원하는 제례행사를 진행했던 장소로 보인다는 것이다.

▽도움말 주신 분=전호태(全虎兌) 울산대 교수, 여호규(余昊奎) 한국외국어대 교수

▽참고 북한자료=민족문화유산 2003년 제2호, 조선고고연구 1994년 제4호

(동아일보 / 이철희 기자 200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