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당신라신사회'와 '백제부흥운동'

권덕영ㆍ김영관씨 각각 연구서 펴내

한국고대사학계에 오랜만에 묵직한 연구성과 두 편이 각 한 권의 책으로 나란히 출간됐다. 부산외대 권덕영(權德永) 교수가 집필한 '재당 신라인사회 연구'(일조각)와 김영관(金榮官) 서울역사박물관 전시운영과장이 쓴 '백제부흥운동연구'(서경)가 그것이다.

이들 두 단행본이 주제로 삼은 분야는 사실 일반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전자는 요즘 드라마 '해신'으로 다시 부각하고 있는 장보고가 대표한다면, 후자는 흑치상지와 복신, 도침과 같은 인물들이 얼개를 엮어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너무나 익숙하기에 연구도 많을 것 같은 이들 분야이지만 속내를 들여다 보면 만족할 만하지는 않다. 겉만 요란할 뿐 흔히 말하는 내실 있는 연구, 깊이 있는 연구는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 책은 각 주제의 종합적 성찰을 기도했다는 점이 우선 새롭다. 이 분야 연구성과는 분명 많기는 하고, 그중 일부는 단행본으로 정리되기도 했으나 그 전모를 한눈에 조망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논문집 형태를 띠고 있어 단편적이라는 단점을 극복하기 어려웠다.

권 교수는 이 책을 완성하기 위해 현지 답사도 여러 차례 했다. 혼자 중국으로 배낭 여행을 감행하기도 했다. 산둥성 일대를 돌았고, 재당(在唐) 신라인들의 흔적이 남았다고 거론된 곳은 빠짐없이 훑었다.

재당 신라인 사회를 "한국의 해외 진출사, 혹은 해외 이주사의 선구적 형태"로 간주하는 권 교수는 다른 무엇보다 장보고가 대표하는 재당 신라인들을 고대 동아시아 무역의 주역으로 적극적인 자리매김을 시도하고 있다. 즉, 재당 신라인을 매개로 동아시아 세계질서를 구현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재당 신라인에 대해 "신라 출신으로 당에 건너가 영주(永住) 혹은 그에 준할 정도의 장기 체류를 목적으로 그곳에 정착해 생업에 종사하며 살던 본인과 직계 비속에 대한 총칭"으로 정의하는 저자는 그들의 흔적을 정사류 외에도 중국의 각종 지방지와 일본사서에서 찾아 보충했다.

이 과정에서 권 교수는 신라인들의 해상무역 활동이 9세기에 당 제국의 중앙집권적 권력 붕괴에 즈음해 전통적인 공무역 체제의 붕괴와 밀접하게 연동된다는 사실을 주시한다. 국가권력의 집중화를 그 시대 국력과 동일시하는 종래 한국의 역사학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대목이다. 중심이 무너짐으로써 그 세계가 외려 외부로 확장한다는 결론을 끌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352쪽. 2만원.

단국대 박사학위 논문이 토대가 된 '백제부흥운동연구'는 백제사 대미를 장식하는 부흥 운동의 발생과 전개, 소멸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입체적 조망을 시도했다.

이를 위해 저자는 나당연합군에 사직이 멸망한 백제의 유민들의 동향을 크게 3가지로 분류했다. 첫째, 멸망 과정에서 포로가 되거나 투항한 세력이 있고 둘째, 고구려나 왜로 망명한 세력, 셋째, 백제 옛땅에 남은 세력이 그것이다. 이 중 부흥운동 주축세력을 세 번째가 된다.

부흥운동 성격에 대해서는 백제유민들이 주체가 되어 나당군을 축출하고 이를 통한 백제국가 재건을 목표로 내건 자발적 무장투쟁이라고 규정한다. 부흥운동이 일어난 원인에 대해서는 ▲나당 점령군의 약탈과 살육 자행 ▲의자왕의 비참한 항복 과정 ▲지방 군장들의 기득권 옹호 등을 들었다.

부흥운동이 특히 격렬해지는 과정과 관련해 저자는 "백제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으로 가득 찬 신라에 백제를 넘겨준다는 말이 백제 유민들을 더욱 분노케 했다"고 말한다. 백제 유민들은 지배자로는 신라보다는 당을 선호했던 것이다.

흑치상지는 애초에는 백제 멸망 직후 당군에 투항했다가 복신(福信) 휘하의 부흥군에 참여했음을 밝혀냈다.

저자는 백제부흥운동이 갖는 의미에 대해 "당의 한반도 지배야욕을 수포로 돌아가게 했으며, 또한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의지는 통일신라 말기 혼란기에 지방세력이 발생하는 요인이 되었으며, 이를 통해 결국 후백제가 출현하는 계기를 마련케 한다는 점에 있다"고 정리한다. 293쪽. 1만5천원.

(연합뉴스 / 김태식 기자 2005-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