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헤이룽장성 발해유적지 복원현장을 가다

허허로운 만주 들녘에서 ‘잊혀진 제국’을 발견했다. 1,000년 전의 궁전과 절은 사라졌지만, 전각을 떠받쳤던 아름드리 주춧돌은 흔들림없이 뿌리박고 있었다. 절터에 남아 있는 발해의 석등과 불상은 해동성국의 영화를 말해주는 듯했다.

◇ 잠 깨어나는 발해 = 지난달 25일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발해 디지털 콘텐츠화 사업팀’과 함께 찾은 발해 옛 도읍지 상경성터는 그제야 초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중국 지린성 옌지에서 북쪽으로 자동차로 4시간을 달려 도착한 헤이룽장성 닝안시 발해진. 북위 44.5도라는 지리적 위치를 실감할 정도로 시냇가에는 아직도 녹지 않은 얼음이 두껍게 깔려 있었다.

아름드리 주춧돌 그대로

닝안시 서남쪽 35㎞ 지점에 위치한 발해진은 발해의 세번째 도읍지 상경성이 자리잡았대서 붙여진 이름. 도로 곳곳에 설치된 ‘발해국 궁성 유지’라는 입간판이 옛 왕궁터임을 알렸다. 버드나무가 열지어 서 있는 상경성의 외성을 지나 성 안으로 들어서 얼마쯤 지나자 거대한 성벽이 눈앞에 나타났다. ‘발해국상경용천부유지’(渤海國上京龍泉府遺址)라는 표지석 뒤로 오롯이 서있는 궁성의 남문(정문)터인 오봉루. 복원된 남문의 기단만 높이 4.2m, 길이 40m, 너비 26m를 헤아리니 궁궐의 위용을 짐작할 만하다. 기단 위에는 직경이 1m 되는 둥그런 주춧돌 50여개가 네 줄로 배열돼 있었다.

오봉루 좌우로 난 문을 지나니 잘 정비된 밭이 펼쳐졌다. 아직 곡식을 뿌리지 않은 맨 땅. 그러나 그것은 밭이 아니라 궁궐터였다. 밭 뒤로 제1, 2, 3, 4궁전의 전각터가 이어졌다.

지난해 4월 상경성 궁성 정비에 착수한 중국 정부는 11월까지 1차 정비를 마치고 겨울철 이후 정비를 중단하고 있다. 4개의 궁전터는 이미 정비가 끝났으며 발해시대의 궁중 우물 ‘팔보 유리정’도 말끔히 단장돼 있었다. 그러나 궁궐 안 곳곳에는 파헤쳐진 회랑터와 그곳에서 수습된 돌멩이들이 쌓여 있어 이후에 발굴이 이어질 것을 짐작케 했다. 발해유적을 안내한 옌볜조선족 작가 유연산씨는 “(중국은)올해 안으로 상경성 발굴·정비를 마무리한 뒤 내년 중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할 계획을 갖고 있다”면서 “날씨가 풀리는 5월 중 다시 정비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발해 궁터 안 흥륭사 경내에 남아 있는 발해 석등과 석불은 발해 문화유적의 상징이다. 현무암을 다듬어 만든 석등(높이 6m)은 연꽃 문양 등에서 발해의 건축예술을 엿볼 수 있다. 석등 바로 뒤 삼성전에 안치된 석불(높이 3.3m)은 원형이 손상돼 아쉬웠지만, 발해 역사를 증언하는 유일한 석불이다.

◇ 중국 입맛에 맞춘 정비·복원 = 문제는 상경성 등 발해 유적 정비·복원이 임의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상경성 남문 밖에는 당나라 장안성을 그대로 본뜬 발해궁성 복원조감도가 세워져 있다.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보는 중국의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앞서 유적을 돌아본 송기호 서울대 교수는 “발해의 독자성을 무시하다보니 중원에서는 보이지 않는, 발해 온돌시설(4궁전터)의 경우 온돌 전체가 아닌 굴뚝 시설만 복원해 놓았다”고 비판했다.

“내년중 세계유산등재 계획”

중국인 학자만으로 비밀리에 이뤄지고 있는 발굴·정비도 문제다. 특히 한국인의 출입은 철저히 통제된다. 상경성 궁성 초입에는 ‘현장을 할굴(발굴)하기 위해 참관을 사절한다’는 한국어로 쓰인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상경성뿐 아니다. 상경성과 함께 세계유산 등재를 신청할 지린성의 서고성(허룽시), 팔련성(훈춘시), 육정산(둔화시)과 같은 발해 유적에도 아직 일반인은 접근할 수 없다. 이번 답사팀은 발해 무왕의 딸 정혜공주의 무덤이 발굴된 둔화의 육정산을 답사하려 했으나 경비가 삼엄하다는 얘기에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 방치된 발해 유적들 = 중국의 발해 유적 정비는 철저히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러다 보니 상경성, 서고성, 팔련성, 육정산 무덤군 등 등재 예정지 이외의 유적들은 방치돼 훼손돼 가고 있었다. 안내 표지도 없어 현지 주민들조차 발해 유적지가 있는 곳인 줄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발해의 첫 도읍지인 지린성 둔화시. 이곳에는 발해의 첫 왕성으로 알려진 오동성과 성산자산성, 강동 24개 돌유적, 영승유적 등이 남아 있으나 유적 안내판 하나 없어 전문 가이드 없이는 찾아가기 힘들다.

정혜공주 무덤도 경비 삼엄

비좁고 더러운 골목길을 따라 어렵게 찾아간 오동성 유적지는 민간에서 버린 음식·생활 쓰레기 속에 방치돼 있었다. 1981년 지린성 정부에서 한글과 중국어로 나란히 세운 비석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발해 유적지임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둔화시내를 흐르는 목단강 동쪽에 자리한 강동 24개돌 유적은 직경 40~80㎝의 돌 24개가 1~2m 간격으로 줄지어 있는 발해의 건축 유구. 그러나 유적을 보호하기 위한 철책은 심하게 녹이 슬고 철책 안에는 휴지, 공사장 폐자재 등이 널려 있었다. 게다가 이 유적은 철로 지하차도 건설에 따른 도로 확장으로 이전될 위기에 처해 있어 안타까움을 더해줬다. 공사장 인부에 따르면 주택가쪽으로 10여m 이전될 것이라고 하나 유적 성격으로 보아 원형 훼손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였다.

2001년 동북공정을 추진한 중국 정부는 지안·환런 지역의 고구려 유적정비를 완료한 데 이어 발해 유적에 대한 정비·복원에 착수했다. 그러나 중국의 발해 유적 정비는 학문적 연구를 바탕으로 한 온전한 복원이 아닌, 발해가 중국의 역사임을 홍보하기 위한 정치적 복원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성균관대 박물관 김종복 학예사는 “고구려에 이은 발해 유적 정비는 고구려가 중국사이면 발해도 당연히 중국사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며 “한국·북한 학자들을 참여시켜 발해 역사·문화에 대한 체계적인 정비·복원이 이뤄져야 할 것”고 말했다.

(경향신문 / 조운찬 기자 2005-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