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온 ‘고구려’

고구려는 ‘동북아 중심’을 최초로 실현한 나라다. 광개토왕과 장수왕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이끌었던 5세기의 고구려는 명실상부한 동북아시아 최강국이었다. 장수왕 때의 일이었다. 중국 북부를 통일한 북위에서 새해 축하 연회가 열렸다. 고구려 사신도 이 자리에 참석했다. 중국 남부를 차지한 제나라는 북위에 거세게 항의했다. 고구려 사신들을 왜 자신들과 같은 서열에 놓느냐는 것이었다. 북위의 답변은 간단했다. “고구려가 강성한 나라라서 어쩔 수 없다.”

▷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차지한 힘을 바탕으로 ‘균형자’ 역할을 확실히 했다. 중국 대륙의 남북을 나눠 가진 남조와 북위의 대립 관계를 적절히 이용해 고구려를 넘보지 못하게 했다. 남쪽에서 백제가 가야 및 일본과 동맹을 맺자 고구려는 신라와 손잡았다. 고구려가 지방정권에 불과했다는 중국의 주장은 역사에 대한 ‘억지’와 ‘무지’를 동시에 자백하는 것이다. 고구려가 자랑스러운 또 다른 점은 ‘동북아 중심’에 걸맞은 경제 수준, 문화 수준이다.

▷ 장수왕이 대동강변에 건설한 안학궁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궁궐이었다. 장안성(현재의 평양)은 20만 호에 100만 명이 사는 거대 도시였다고 한다. 고구려 하면 먼저 떠오르는 벽화는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엄두도 낼 수 없는 것이다. 고구려 벽화는 무덤 안에 회반죽을 바르고 그 위에 안료로 그림을 그리는 프레스코 기법을 택했다. 비용이 많이 들뿐더러 고도의 회화 수준과 건축기술이 요구되므로 국가 수준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 북한이 갖고 있는 고구려 유물 60점이 서울 나들이를 했다. 5월 7일 고려대에서 개막되는 고려대 개교 100주년 기념 ‘고구려 특별전’에 선보인다. 남한에는 고구려 유적이 거의 없으므로 고구려 문화를 접할 수 있는 드물고 소중한 기회다. 유물이 밝히는 고구려 문화의 찬란한 광채뿐 아니라, 고구려인이 이뤄 냈던 번영과 영광의 비결까지 함께 읽어 내는 행사가 되기를 바란다.

(동아일보 / 홍찬식 논설위원 2005-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