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 왜 빌려 주니" 짝꿍도 입시 경쟁자

20일 첫 중간고사를 치른 서울 대원외고 1학년 이모군은 "옆자리의 친구가 시험을 잘 보면 내 성적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니 친한 친구들도 경쟁자로 여길 수밖에 없다"며 "내신 때문에 서로 노트도 안빌려주는 등 학교 분위기가 삭막해졌다"고 말했다. 학부모 김모씨는 "일반고였더라면 전 과목에서 최상위 등급을 받을 수 있는 아이들인데 외고에선 한두 문제만 틀려도 등급이 하위권으로 추락해 명문대 진학에 결정적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중간고사 결과가 좋지 않으면 일반고로 전학시킬 수밖에 없다"고 했다.

올해 고교 1학년부터 적용되는 내신 위주의 새 대입제도가 정착되기도 전에 일선 고교 교육현장이 혼란에 휩싸였다.

일선 교사들은 "이번 중간고사 이후 내신성적을 잘 받기 위해 특목고에서 일반고로, 강남지역 고교에서 강북지역 고교로, 일반고에서 실업고로 옮기는 연쇄 이동이 가시화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에 따라 서울과 경기도 지역의 외고, 지방의 전주 상산고 등 자립형 사립고와 자율학교는 공동으로 대처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내신경쟁으로 인한 부작용은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 있는 특목고와 자립형 사립고 등에서 두드러진다. 서울 C외고 학부모 최모씨는 "전교 1등을 해도 5개 영역 전 과목 1등급을 받을 수 없는 현실에서 '내신 불이익 때문에 서울대는 어차피 못 간다'며 '정신적인 패닉(공황) 현상'이 나타났고, 심지어는 가출하는 학생도 있다"고 말했다. 일반고에도 여파가 만만치 않다. 서울 S여고에는 지난달 3명의 학생이 전학 왔다. 이들은 A과학고와 B외고 등에 올해 입학했던 1학년 학생으로 내신 경쟁이 상대적으로 덜 심한 이 학교로 전학 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는 기존의 재학생들로부터 '친구'가 아닌 '경쟁자'로 몰려 따돌림을 당해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기존 재학생들이 전학 온 학생들이 내신 1등급을 차지해 자신들의 내신을 끌어내린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서울 Y고 1학년 김모(16)군은 중학교 3학년 때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다. 그러나 최근 중간고사를 앞두고 책상 위에 두었던 책과 노트가 사라졌다가 필기한 중간 부분이 찢겨 없어진 채 복도에서 발견되는 일을 겪었다. 서울 강남의 한 학교에서는 학생 사물함을 부수고 노트를 훔쳐가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학교 측은 "중요한 물건은 집에 보관하라"고 당부했다. 학교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해 도입한 내신 위주의 대입제도가 오히려 학교의 정상적인 교육기능을 훼손하는 쪽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중간고사 이후 특목고 학생들을 중심으로 심리적 공황상태가 확산되면서 학부모까지 가세한 집단 반발 사태가 빚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서울대 백순근 교수는 "수험생 당사자들을 대상으로 표준화된 국가수준의 학력평가를 실시한 뒤 그 결과를 활용해 입시에서 학교 간 수준차를 반영하도록 해야 배타적인 내신 경쟁을 교육적인 경쟁으로 바꿀 수 있다"고 지적했다.

(중앙일보 / 김남중.한애란.이충형 기자 2005-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