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조선 판단 실수 한국은 되풀이 말아야"

미국 관리들이 노무현 대통령의 '동북아 균형자론'을 해명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 한국 정부 관계자에게 뼈 있는 충고를 했다. 지난 12일부터 워싱턴을 방문 중인 이 관계자는 미 국무부.국방부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및 상.하원 보좌관, 전문위원들을 만나 "균형자론의 참뜻은 한.미 동맹의 굳건한 기반 아래 동북아 평화와 번영을 추구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미국 측은"설명을 듣고 오해가 많이 불식됐다"면서도 균형자론에 대한 의문과 우려를 드러냈다.

◆ '폴란드의 실패 숙고해야' = 이 관계자에 따르면 미 국무부의 한 고위관리는 "20세기 초반 폴란드가 지역세력으로 과도하게 (자신의) 힘을 설정하려 했다가 실패한 사례가 있다. 이런 역사적 경험이 한국의 균형자 역할에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폴란드보다는 한국이 인구적.지정학적 중요성이 크지만, 스스로를 중견국가로 (바라보면서) 위치 설정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교수 출신인 이 관리는 "국무부 공식 입장이라기보다 학자적 관점에서 한 말"이라고 전제했다. 그러나 한국이 동북아의 균형자가 되기에 과연 적절한 국력을 갖췄는지 의문을 품고 있는 워싱턴 일각의 분위기를 전달한 것으로 해석된다.

1918년 독립한 폴란드는 32년 소련, 34년 독일과 각각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며 두 강대국의 중간자 역할을 자처했다. 그러나 국력이 허약해 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곧바로 독일과 소련에 분할 점령당했다.

미 국무부 관리는 또"한국은 19세기 말 조선의 전략적 판단 실수를 감안해야 한다. 조선은 스스로 헤쳐나가기보다 외세와의 연대만을 추구하는 전략적 오판을 했다"며 "현재의 한국은 그런 오판을 하지 않으리라 본다"고 말했다. 이는 한국이 스스로 서야 한다는 점에서 '균형자론'을 지지한 것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이 청.일본.러시아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벌이다 결국은 파국을 맞은 사실을 통해 '균형자 외교'의 어려움을 지적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이 말에 대해 "당시 조선이 (영토적 야심이 없는 좋은 우방인) 미국과 동맹을 맺지 않은 게 실책이었음을 지적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 미 국방부도 '우려' 간접 전달 =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미 국방부의 고위 관리도 "워싱턴의 일부 언론을 중심으로 균형자론에 대해 우려와 부정적인 생각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미 동맹을 담당한 이 관리는 균형자론에 대한 한국 정부 발표문과 언론 보도들을 밀착 취재해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지난주 한.미 간에 열린 한 회의에서도 균형자론에 관해 한국 측과 '길고 긴' 대화를 나눴다는 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그런 만큼 이 국방부 관리와는 균형자론에 대해 더 얘기할 게 없었다"며 "이 관리는 '한국 정부가 하려는 역할에 대해 충분히 합리적이라 생각한다'고 내게 말했다"고 전했다.

(중앙일보 / 강찬호 특파원 2005-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