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과 해인사 장경각

장경각은 세계문화유산이지만 팔만대장경은 지정 안돼

세계에 자랑할 만한 '팔만대장경'이 해인사에 보존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1251년에 완성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목판이 8만1258장(문화재청에서 밝힌 공식 숫자)이며 전체의 무게가 무려 280톤이다. 경판의 한 장 두께는 4센티미터, 8만1258장을 전부 쌓으면 그 높이는 3200미터로 백두산(2744미터)보다 높다. 더구나 팔만대장경을 그대로 목판 인쇄해 묶으면 웬만한 아파트에 꽉 찰 정도로 거대한 분량이 된다는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경주 역사지구, 종묘, 창덕궁, 수원화성, 해인사 장경각, 고인돌, 석굴암과 불국사 등 7개가 포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팔만대장경이 세계유산에 포함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제목에서 보이는 것처럼 엄밀한 의미에서 해인사 장경각이 포함된 것이지 장경각 안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이 지정된 것은 아니다.

팔만대장경이 포함되지 않은 것은 장경각보다 가치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는 대상은 유적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재청과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팔만대장경의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해인사장경각을 설명하기 전에 팔만대장경을 먼저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팔만대장경으로 불리는 대장경의 원래 이름은 '고려대장경'이며 '해인사대장경판'으로도 부르지만 흔히 '팔만대장경'이라 칭하므로 이곳에서도 팔만대장경이라 부른다.

 
   
 
 
해인사 전경,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어 법보사찰로 불리며 대장경을 보관하는 천혜의 장소로 알려졌다(사진 천왕장군).

참화를 면한 대장경

대장경이라는 명칭은 사실 아무데나 붙는 것이 아니다. ‘세 개의 광주리’란 뜻의 산스크리트어 ‘트리 피타카’를 번역한 ‘삼장경 또는 일체경’이라고 일컫는 대장경은 부처님이 직접 설법한 경(經)과 불제자로서 지켜야 할 생활규범을 밝힌 율(律), 이 경과 율을 해설한 논(論)이 갖추어졌을 때에만 비로소 대장경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이와 같은 삼장(三藏)이란 단어는 6세기 중국의 승우가 편찬한 '출삼장기집'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10세기 중기 이후 삼장은 동남아시아의 상좌부 전통의 불교 전적을, ‘대장경’이란 말은 동아시아 불교 전적을 나타내게 되었다. 따라서 모든 불교 전적을 의미하는 대장경이란 단어는 당나라 이후에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김종명 교수는 적었다.

일반적으로 고대 인도에서는 많은 숫자를 표현할 때 8만5000이라 하여, 인간의 번뇌가 많은 것을 8만4000 번뇌, 석가모니 부처님이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하여 부처가 되는 길을 대중에게 설법한 것을 8만4000 법문이라 한다. 따라서 부처가 설법한 경 등을 총집결한 대장경을 8만대장경이라고 하므로 엄청난 분량이 됨은 자명하다.

원래 대장경을 목판으로 처음 만든 것은 중국의 송나라 때였다. 송 태조(968∼975년)는 재위 4년(972) 대장경 판각을 명령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976년에 사망하였고 송 태종에게 계속 이어져 태종 8년(983) 완성된다. 이를 '북송칙판대장경(北宋勅板大藏經)'이라 하는데 총 13만장에 달하며 휘종(1125년)때 금나라 침입으로 모두 사라졌다.

'고려사'에는 성종 10년(991년)에 한언공(韓彦恭)이 송 태조의 대장경 2500권을 수입했다는 기록이 보이며 1022년에도 송나라에 갔던 한조(韓祖)가 538권을 더 가져왔다.

고려시대에 처음으로 제작된 '초조고려대장경'이라 불리는 대장경의 조성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현종 2년(1011)년부터 문종대(1046∼1083)를 거쳐 선종 4년(1087)까지 76년에 걸쳐 판각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동대사(東大寺)에 보관된 '교장(일명 속장경)', 동대사가 이 서적을 소장하게 된 것은 의천이 일본 승려의 요청으로 두루마리 40권을 직접 보낸 데서 기인한다.
'초조고려대장경'은 동양에서 북송의 '촉판대장경'과 '거란대장경'에 이어 세 번 째로 완성되었으며 총 1076종 5048권으로서 팔공산 부인사(符人寺)에 봉안되었으나 고려 고종 19년(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대부분이 불타 버렸으며 일부가 일본과 한국에 남아있다.

고려에서 대장경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만주의 거란병이 서울 송악성까지 쳐들어왔을 때 왕이 남쪽으로 피난 가면서 적병을 불법의 가피력(加被力: 부처나 보살이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는 힘)으로 퇴치하려는 신앙으로 대장경 판각을 발원한 것이다.

한편 과거에 '속장경'이라 불려 지던 '교장(敎藏)'은 초판 고본에 계속하여 간행된 것으로 문종 27년(1073년) 부터 선종 7년(1090년)에 걸쳐 그 목록이 만들어 진 것이다.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송나라에 갔다 오면서 수집해 온 불경과 요와 일본 등에서 수집한 불경을 합하여 4700여 권이다. 원래 의천이 수집한 것은 대장경이 아니라 교리연구서였음에도 일본인 학자에 의해 '속장경'으로 불려왔으나 2005년 교과서부터 '교장'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일본과 한국에 일부가 보관되어 있다.

거란에 이어 몽골군이 침략하자 고려정부는 곧바로 부처님의 힘으로 몽고 군대를 물리치려는 생각을 갖는다. 우선 강화에 대장도감(大藏都監) 본사(本司)를 두고 영남의 진주에 분사(分司)를 설치하여 대장경 발간을 위한 체제를 갖춘 후 고종 23년(1236년)에 시작하여 고종 38년(1251년)에 '초조고려대장경'을 바탕으로 만든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

'팔만대장경'은 13세기와 14세기에 각각 판각된 정판과 보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대장목록'에 실려 있는 8만여 개의 장경목판과 보유장경판으로 불리는 15종의 경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 모두를 '팔만대장경'으로 인식한다. 여기에는 1511종 6805권의 불전이 8만1258장의 판목(121장은 중복됨)에 새겨져 있는데 현재 국보 111호로 지정되어 있다.

'팔만대장경'의 총 글자 수는 총 5238만2960이며 보통 '대장목록'에 수록되어 있는 장경목판을 정장이라고도 하는데 정장의 구성은 총 1497종 6558권으로 여기에 포함된 불교 전적들은 10권 단위로 분류되어 있다. 이 불전들은 목판의 양쪽에 새겨졌는데 목판의 총 면수는 16만2516면이다.

이들은 원래 강화도의 선원사(禪源寺)에 보관되었으나 이조 태조 7년(1398년)에 서울의 지천사(支天寺)를 거쳐 현재의 해인사로 이관되었다.

일본도 원래 대장경을 조판하려고 여러 번 시도하였다. 그러나 50여 년이 지나도 성공할 수 없게 되자 중지하고 말았다. 이것은 당시 일본의 문화수준과 기술로서는 도저히 사업을 진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장경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었는데 조선 정부에서 억불 정책이 계속되자, 불교가 성행했던 일본에서는 고려 말부터 왜구를 막아 주고 붙잡혀 간 조선인을 되돌려 주겠다면서 대장경을 일본에 달라고 간청해 올 정도였다.

 
   
 
 
대장경판 확대, 팔만대장경은 수적으로 방대한데다가 5200만여 자에 달하는 글자가 한 결 같이 고르고 정밀한 서각(書刻)예술품이라는 점에서도 크게 평가된다.

세종5년(1422) 12월 25일,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세종이 “대장경판은 무용지물인데, 일본에서 간절히 청구하니 아예 주어버리는 것이 어떤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신들은 “경판은 비록 아낄 물건이 아니오나, 일본이 달라는 대로 들어주는 것은 먼 앞날을 내자보지 못하는 일입니다.”라고 말해 일본으로의 반출을 막았다.

기록에 의하면 일본은 1389년부터 1509년 사이에 무려 83회나 그런 간청을 하였으므로 조선에서는 이들의 끈질긴 요구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여간 골머리를 썩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여곡절을 거쳐 대장경 63부가 일본에 전해진다.

대장경판은 임진왜란 때 위기를 맞는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27일에 그토록 탐내던 팔만대장경이 보관돼 있는 합천 해인사 앞에 있는 성주를 점령했다. 그러나 홍의장군 곽재우를 비롯해 거창과 합천에서 일어난 의병들이 일본군의 해인사 진입을 막아냈고, 스님들도 승병을 모아 해인사를 지켰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큰 위기를 맞을 뻔했다. 남침한 인민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미처 북으로 퇴각하지 못한 1000여 명이 해인사를 중심으로 게릴라 활동을 폈다. 소탕작전을 벌이던 국군은 미 공군에 공중지원을 요청한다.

1951년 12월 18일 김영환 대령이 이끄는 전투기는 해인사 폭격명령을 받고 출격했다. 하지만 그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미 작전당국의 명령에 불복하고 폭격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의 전투기 F-51은 500파운드짜리 폭탄 2개를 적재할 수 있었는데 만약에 명령대로 폭격되었다면 팔만대장경은 순식간에 모두 재로 변했을 것이다.

팔만대장경은 여러 곡절을 거치면서도 참화를 면했는데 1915년, 일제강점기에는 당시 총독이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팔만대장경판 전체를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하였으나 경판의 무게가 무려 280톤이나 되어 포기하기도 했다. 경판의 무게는 나무의 종류와 길이에 따라 2.2∼4.8킬로그램으로 평균 3.1킬로그램이다. 따라서 팔만대장경 무게를 모두 합치면 280톤으로 4톤 트럭으로 옮긴다고 해도 70대가 필요하다.

대장경이 만들어지기까지

'팔만대장경'의 정판은 '대반야바라밀다경'을 비롯하여 중국의 당나라와 송나라에서 번역된 불전, 송나라의 태종이 지은 시와 게송,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 '대장목록', 불교 백과사전격인 '법원주림' '일체경음의'를 비롯한 불경에 나오는 용어들의 음과 뜻을 밝힌 책들로 구성되어 있다.

'팔만대장경'의 보유판을 구성하는 불전들은 판각 날짜가 알려지지 않은 목판이며 이들 중 10종류의 불전들은 7세기부터 13세기까지 한국 승려들이 저술한 작품이다. 또한 보판에 수록되어 있는 불전들은 '팔만대장경'에만 포함되어 있으며 '대정신수대장경'에는 수록되지 않은 것이다. 이 불교 전적들은 7세기부터 15세기 사이에 지은 것으로 여기에는 불교어 사전, 중국 황제가 지은 불교 관련 시와 게송, 중국선사의 오도송 해설집, 선불교 역사서, 대장경 목록, 공안집, 균여의 화엄학 주석서, 참회서 등이 포함되어 있다.

 
   
 
 
대장경판, 대장경판 한 장에 새겨진 글자 수는 앞, 뒷면으로 640여자다(사진 93jjh).

대표적인 대장경 판 한 장의 크기는 가로 72.6센티미터, 세로 26.4센티미터, 두께 4센티미터 정도인데 양 끝에는 나무 조각을 붙이고, 네 귀퉁이에는 99.6%의 높은 순도를 가진 구리 장식을 달았다. 글자는 대개 23줄로 각 줄마다 14자씩이다.

현종 때에 조성된 '초조대장경'은 1행 15자였는데 현존 대장경과 판식이 다른 것은 '초조대장경'의 인본을 단순히 복각한 것이 아니라 이를 더욱 보완하여 조성하였기 때문이다. '팔만대장경'에서는 간지의 연대와 고려국의 국명도 각인하였고 ‘대장도감봉칙조조(大藏都監奉勅雕造)’라는 기록도 있다. 괘선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책을 찍어내려는 용도라기보다는 두루마리로 찍어내려는 용도로 추정된다.

경판은 글자를 새기는 작업이 핵심 기술인데 능숙한 기술자가 하루 종일 매달려도 40∼50자가 고작이다. 그러므로 한 달에 유능한 각자공 1명이 경판 두 장을 만들기도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런 계산이라면 팔만대장경을 만들기 위해 동원된 연인원은 무려 100만 명이 넘는다. 여기에다 나무를 베어 오고 판자를 켜는 도우미까지 계산하면 실로 엄청난 인력과 물자가 동원된 작업임을 알 수 있다. 박상진 박사는 한마디로 고려의 운명을 걸고 온 나라 백성이 혼신의 힘을 기울려 만든 대작이라고 설명했다.

목재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골고루 잘 자라는 나무를 골라 그늘에서 잘 말려 사용했다. 주로 산벗나무(70%), 동백나무(13%)를 사용하였으나 단풍나무, 박달나무, 후박나무 등 10여 종이 섞여 있다. 일반적으로 자작나무로 경판을 만들었다고 알려졌었으나 자작나무는 경판의 마구리용으로만 사용되었다. 원목을 베어 3년 동안 바닷물에 담가 놓았다가 꺼내어 소금물로 경판을 삶은 후 그늘에 말렸다. 불경을 각인한 후에 그 위에도 옻칠을 하였다. 양끝이 뒤틀리지 않게 각목을 붙이고 네 귀는 구리로 장식하였다. 소금물은 벌레나 곰팡이 서식을 막아주고 나무진이 목질 내부에 골고루 스며들도록 해 뒤틀림이나 갈라짐을 줄여준다. 구리 판을 고정하는 데 쓴 못은 94.5∼96.8 %의 순도를 가진 단조된 제품이다. 저탄소강이라도 부를 수 있는 이 못들은 철의 가공성을 좋게 하기 위해 0.33∼0.38%의 많은 망간을 함유했다고 전상운 박사는 적었다.

마구리 고정에 쓰인 구리판의 순도가 99.6%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져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13세기에 그렇게 순도가 높은 구리를 정련한 기술이 개발되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쇠못을 만드는 기술 또한 탁월하다. 수백만 개의 질이 좋은 쇠못의 제조는 고려의 높은 철 주조 기술을 나타내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녹이 쓴 못들은 거의 없다.

재목을 고를 때도 원칙이 있었다. 적어도 50∼60년 이상이 된 나무라야 하고 겨울에 벌목했는데 그것은 겨울에 자른 것이 목질이 치밀하고 변형도 적기 때문이다. 또 같은 산이라도 그늘진 북쪽 계곡에서 자란 나무를 더 중요시했다. 영남의 진주에 분사를 설치한 이유도 좋은 목재를 주변에서 구하기 위한 뜻으로 보인다.

고려 최대의 국책프로젝트

팔만대장경을 만들기 위해 얼마만한 인력과 자재가 들어갔는지를 설명하면 모두들 놀랄 것이다. <KBS역사스페셜팀>이 산정한 내역을 보자.

우선 경판을 만들 수 있는 목재를 확보해야 하는데 대충 40센티미터 굵기에 1∼2미터짜리 통나무 한 개당 대략 6장의 목판을 만들 수 있으므로 8만여 장의 경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통나무 1만5000개 이상이 필요하다.

벌채한 나무를 이틀에 한 번 네 사람이 각판장까지 운반하는 것으로 가정하면 이때 동원된 연인원은 8만∼12만 명으로 추정된다.

다음은 목판에 붙일 필사본을 만들어야 하는데 하루에 한 사람이 1000자 정도를 쓸 수 있으므로 5000만 자를 전부 쓰려면 연인원 5만 명이 필요하다. 필사에 소요되는 한지의 양만도 16만 장, 파지 등을 고려하여 그 3배인 50만 장쯤으로 추정한다. 원료인 닥나무 채취에서 한지를 완성하기까지 하루 한 사람이 50장 정도를 만들 수 있으므로 이것에도 연인원 1만 명쯤이 동원된다.

그러나 가장 오랜 시간을 소요하는 것은 판각이다. 하루에 새길 수 있는 판각량은 30∼40자로, 5000만 자를 연인원으로 산출하면 적어도 125만 명이 필요하다. 판각에는 공덕을 쌓기 위해 자진해서 참여한 승려들이 주축이 되었지만 그 외에도 불심이 두터운 문인 가운데서 필력이 뛰어난 인사들을 선발하여 참여케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산벗나무, 대장경은 일반적으로 자작나무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으나 대부분 산벗나무로 만들어졌다(사진 박상진).

경판의 옻칠을 위해 소요되는 옻액도 만만치 않다. 경판 한 장에 5그램 정도의 옻이 필요한데 대장경판 전체를 옻칠하려면 400킬로그램 정도가 필요하다. 하루 채취량은 150그루에서 400그램이 채취되므로 이 정도 양을 채취하려면 연인원 1000명이 동원되어야 한다.

대장경판을 교정보는 사람도 필요하고 구리 장식을 만드는 사람 등도 필요하며 보조인원도 있어야 하므로 실제 제작에 동원된 사람은 더 불어난다. 팔만대장경 제작은 고려 500년간 가장 큰 국책사업이라 볼 수 있다.

몽고와의 전쟁 중에 진행된 고려 최대의 프로젝트는 당대 최고의 문필가 이규보의 문집 '동국이상국집'에 그 판각의 연유가 적혀있다. 최규성 박사의 글을 인용한다.

‘이제 재상과 문무백관 등이 함께 큰 서원(誓願)을 발하여, 이미 담당 관사를 두어 그 일을 경영하게 하였습니다. 맨 처음 대장경을 조판한 동기를 고찰하였더니, 옛날 현종 2년에 거란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매 임금은 남쪽으로 피난하였는데, 거란 군대는 오히려 송악에 머물며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임금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크게 발원하여 대장경의 판각을 맹서하자 적은 스스로 물러갔습니다.

그렇다면 대장경은 한 가지이고, 전후에 새긴 것도 한 가지며 임금과 신하가 함께 발원한 것도 같으니, 어찌 그 때에만 거란군이 물러가고 지금의 몽고는 물러가지 않겠습니까. 오직 부처님과 여러 천인들이 얼마나 보살펴 주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진실로 지성으로 추진하는 바가 전조에 부끄러워할 것이 없으니 원하옵건대 제불성현과 삼십삼천은 간곡하게 비는 바를 헤아리시고 신통한 힘을 빌려주시어 포악한 오랑캐로 하여금 멀리 도망하여 다시는 우리 국토를 밟는 일이 없게 하여 주십시오.’

이 글을 보면 널리 알려진 바처럼 불력(佛力)으로 몽고를 물리치려고 경판 제작에 나섰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를 침공한 몽골군은 매우 잔학했다.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전하다 함락당한 지역의 주민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조리 죽였고 어린아이들만 노예로 끌고 갔다. 싸우지 않고 항복한 지역의 주민들 역시 비참한 운명으로 몰렸는데 고려군과 싸울 때 맨 앞에 세우고 뒤에서 창칼로 위협하여 강제로 진격하게 함으로써 고려인들끼리 살육전을 벌이기 일쑤였다.

고종 41년 한 해에만도 고려인으로 몽골군에 포로가 된 사람이 20여 만 명이나 되었는데 죽은 사람은 그보다도 몇 갑절이라 하였음을 볼 때 고려의 피해가 얼마나 막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몽골군의 공포는 고려인들로 하여금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몽골군과 끈질기게 싸워야 한다는 신념을 심어주었고 한편으로는 힘들고 어려운 처지임에도 대장경판 조판 사업에 전 국민이 힘을 모아 매진할 수 있었다고 최규성은 적었다.

한편 '팔만대장경'이 제작된 요인이 불심 때문만이 아니라 당시의 정치상황이 개재된 정치적인 작품이라는 의견도 있다.

1232년부터 36년간 강화는 당시 무신정권의 실력자인 최우가 개경에서 옮긴 고려의 수도였다. 백성들은 강화 천도를 달가워하지 않자 최우가 민심을 수습하는 방편으로 대장경 간행사업을 벌였다는 것이다. 백성들의 돈독한 불심을 자극해 민심을 하나로 모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무장 최충헌은 무신정권에 반대하는 교종(敎宗) 승려들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그러나 최충헌은 불교 국가 고려에서 불교계 자체를 적으로 돌릴 수 없으므로 교종 대신에 선종(禪宗) 종단을 지지한다.

이런 와중에 대구 부인사에 봉안되어 있던 대장경판이 몽골군에 의해 소실되자 불교계의 민심을 잡는 방편으로 '팔만대장경'을 간행했다는 것이다. 결과론적으로 최 씨 정권의 의도는 성공하여 '팔만대장경'의 간행은 최 씨 정권과 불교계가 불편한 관계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팔만대장경'은 고려인들의 무작정적인 불심 때문만이 아니라 고려 국내 정세의 냉철한 인식이 합해졌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세계적인 유산이 될 수 있었다는 뜻이다.

 
   
 
 
대장경판의 보관 옆모습, 경판은 옆으로 세워져 한 칸에 2층씩 총 6층으로 포개져 보관된다.

그러나 당시 고려가 송이나 요나라에 비해 높은 수준의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던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고려시대 동아시아에서 대장경을 보유한다는 것은 불교문화의 수준이 매우 높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송과 요에서 이미 대장경판을 조판한 바 있기 때문에 고려가 이들을 능가할 수준의 대장경을 조판하지 않는 한 대장경조판만으로 큰 의의를 갖는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고려가 '초조대장경'에 이어 새롭게 대장경 조판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기왕에 완성된 송나라 장경이나 거란 장경에 대한 철저한 검토와 잘못된 내용에 대한 보완 작업이 필수적으로 따라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선행 대장경의 내용에 대한 교정이 가능한 전문 불교학자들을 보유하고 있어야 하는데 당시 고려는 교종 5파와 천태종이 성행한 결과 많은 교학의 대가들이 있었다. 또한 경판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제반 기술적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데 이점 역시 금속활자를 세계 최초로 발명할 정도로 발달한 인쇄술을 갖고 있었으므로 무난히 난관들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팔만대장경'의 특성

'팔만대장경'의 특성에 대해서는 다음 네 가지를 꼽는다.

첫째, 국토가 유린된 상황에서 이 커다란 불사를 통해 경전을 수호한 호법적 성격을 띤다. 특히 외침을 받고 있는 절박한 상황임에도 이를 완성하여  인류 문화사에 있어 불후의 금자탑을 이룩하였다는 것은 고려인의 끈질긴 민족정신과 신앙심 높은 불심을 엿보게 한다.

둘째, 대장경을 만드는 막대한 경비를 정부가 부담하여 국민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었고 오히려 재투자적인 면이 고려되었다.

셋째, 경전의 내용은 방대하지만 과학적인 배열과 엄격한 자료 수집에 의해 작성되었다. 당시 개태사(開泰寺)의 승통(僧統)으로 있던 수기(守基) 등이 북송판(北宋板), 거란본, 초조대장경 등의 내용을 비교 검토하여 탈자, 오자, 누락된 글자 등을 바로 잡아 가장 정확한 대장경을 만들었다. 더욱이 인류 최초의 한문대장경인 송나라 관판대장경(官板大藏經)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며 현재 전해지지 않는 거란판 대장경의 내용까지 짐작하게 해준다.

특히 '팔만대장경'은 중국의 대장경을 모본으로 했지만 '팔만대장경'에만 수록되어 있는 불교 전적들도 포함되어 있다. '법원주림'이나 '일체경음의'처럼 '팔만대장경'이 아니었으면 알려지지 못했을 불전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은 '팔만대장경'보다 훨씬 늦게 간행된 남송의 '사계대장경'이나 원나라의 '원판대장경'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고 김종명은 적었다.

이처럼 '팔만대장경'은 내용이 풍부하기 때문에 일본의 '대정신수대장경'의 모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중국의 '빈가정사대장경'과 1980년대에 편찬된 대만의 '불광대장경'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은 수적으로 방대한데다가 5200만여 자에 달하는 글자가 한 결 같이 고르고 정밀한 서각(書刻)예술품이라는 점에서도 크게 평가된다. 5200만여 자가 얼마나 큰 숫자인지는 조선왕조 500년 내내 만들어온 '조선왕조실록'의 전체 글자 수와 맞먹는다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천혜의 보관장소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곳은 해인사이다. 이 절은 순응(順應)이 당나라에서 돌아온 후 신라 애장왕 3년(802년)에 가야산에 창건하기 시작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중건, 중수가 있었으며 성종 19년(1488년)에 인수(仁粹), 인혜(人惠) 두 왕대비가 절의 중건을 도와 대장경판당(大藏經版堂)을 비롯한 대적광전과 여러 당(堂)과 요(療) 등을 세웠다. 그후 숙종 21년(1695년)부터 고종 8년(1871년)에 이르는 176년 동안 무려 일곱 번의 크고 작은 화재가 발생하였고 현대의 해인사 모습은 순조 18년(1818년)에 중건된 것이 근간이 되고 있다.

해인사를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법보사찰’로 부르기도 한다. 또한 해인사는 한국에서 가장 큰 불교종파인 대한불교 조계종의 12교구 본사로, 조계종에 속한 현대 한국 사찰 중 가장 먼저 총림으로 지정된 절이기도 하며, 동시에 대표적인 한국의 사찰 양식을 보여주는 절이기도 하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각 또는 경판전(經板殿)은 법보전(法寶殿)과 수다라전(修多羅殿), 동사간고, 서사간고의 네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안에 팔만대장경과 국보 제206호인 고려각판 2275매가 보존되어 있다.

그런데 팔만대장경을 구경하기 위해 해인사를 방문한 사람들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는 장경각의 외관을 보고 쉽게 실망하곤 한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들이 그 이름과는 달리 무슨 창고나 헛간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또 건물의 사면의 차지하고 있는 나무 격자창살 사이로 지루하게 쌓여있는 경판을 구경하는 데는 채 20분도 걸리지 않으니 싱겁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 결코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꾸밈이 없고 전혀 과학성이 없게 보이는 공간이 바로 대장경판이 750년이나 아무런 피해 없이 오래 저장될 수 있는 비결이다.

경판전(국보 제52호)은 조선 초기 개수한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다. 두 경판전은 1430미터의 가야산 중턱인 665미터 지점에서 남쪽 방향으로 앉아 있는데 북쪽은 산으로 막혀있고 남쪽은 열려있다. 습기를 많이 머금은 동남풍이 자연스럽게 건물 옆으로 흐르게 하기 위한 배치라고 볼 수 있다.

건물의 구조는 마치 종묘와 같은 일자집이다. 성종 19년 중건 시 경판당 30칸을 다시 짓고 보안당(普眼堂)이라 하였다. 경판전은 수다라장과 법보전 모두를 뜻하는데 이들은 각각 도리통 15칸과 보통 2칸(건평 165평)으로 합하여 30칸이며 기둥은 108개이다. 이는 108번뇌를 상징함과 동시에 번뇌의 집 속에 진리인 부처님의 말씀을 넣어 둠으로써 번뇌 속에 깨달음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김종명 박사는 설명했다.

 
   
 
 
법보전과 서사간장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각은 법보전(우측)과 수다라장으로 나뉘어져 보관되고 있으며 서사간장(좌측)에는 고려각판이라는 다른 경판이 보관돼 있다.

수다라장은 정면 15칸 중 가운데 칸에 문을 만들고 앞면에는 상하 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곡선으로 된 판재를 고정시켰다. 그 안으로 좌우 양측으로 경판장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있고 경판을 판가(板架)에 보관하도록 한다. 건물 후면의 개구부는 상하 인방과 문설주만 만들고 문을 달지 않아 통풍이 잘 되도록 만들었다.  평면은 기단 위에 네모지거나 자연석 위에 초석을 두어 앞뒤에 갓기둥(平柱)열과 중앙에 높은 기둥(高柱)열을 배치하였다.

갓기둥은 두리기둥으로 약간의 배흘림을 두었고 높은 기둥은 네모 기둥으로 배흘림이 없다. 건물의 가구(架構)형식은 별다른 장식이 없이 보관창고로서의 기능을 강조하였다. 높은 기둥 좌우로 걸친 대들보 위 중간부분에 각각 동자기둥(童子柱)을 세워 종(宗)보를 받쳤는데 높은 기둥의 보머리가 이 종보 중앙 밑을 받치고 있어 더욱 견고한 구조가 된다. 특히 종도리를 받드는 솟을합장(人字形 대공)이 있는데 이러한 솟을합장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도 볼 수 있다.

이 건물의 중요한 기능은 경판을 장기간 보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환기와 온도 및 습기 제거가 가장 중요하다. 따라서 건물의 통풍이 잘 이루어지도록 건물 외벽에 붙박이 살창을 두었다. 특히 벽면의 아래 위와 건물의 앞면과 뒷면의 살창 크기를 달리함으로써 공기가 실내에 들어가서 아래 위로 돌아 나가도록 절묘한 건축 기술을 발휘하였다.

즉 건물의 전면 벽에는 양측 기둥 사이에 중방을 걸치고 붙박이 살창을 아래 위로 두었는데, 아래 창은 폭 2.5미터 높이 1.0미터이고 위의 창은 폭 1.2미터 높이 0.44미터이다. 뒷면은 아래 창이 폭 1.36미터 높이 1.2미터이고 위 창은 폭 2.4미터 높이 1.0미터이다.

이러한 구조는 건물 뒤쪽으로부터 오는 습기를 억제하고 건물 안의 환기를 원활히 하는데 도와준다. 경판가(經板架)는 굵은 각재를 이용하여 견고하게 설치한 후 경판을 세워서 두 단씩 놓도록 단을 두어 공기 유통이 잘 되도록 하였다.

법보전은 수다라장에서 약 16미터 동북쪽에 떨어져 앞의 건물과 같은 규격으로 나란히 놓여 있다. 중앙 칸은 안쪽 높은 기둥열이 있는 곳까지 벽을 만들어 비로자나불상과 양측에 문수, 보현보살을 봉안하였다. 따라서 경판장에 출입하는 문은 수다라장과는 달리 분합문이 있는 칸의 좌우 양 협칸에 두 짝 판문으로 만들어 출입한다.

건물의 규모와 가구 형식은 수다라장과 같다. 붙박이창도 수다라장과 거의 같은 비율로 적용된다. 건물 정면의 아래 창은 폭 2.4미터 높이 1.0미터이고 위의 창은 폭 1.3미터 높이 0.4미터이다. 뒷면은 아래 창이 폭 1.8미터 높이 0.9미터이고 위 창은 폭 2.2미터 높이 1.1미터이다.

 
   
 
 
법보전 환기창과 환기구 아래와 위 창 크기를 달리하여 자연 통풍을 유도했다.

수다라장 앞 벽 아랫부분의 창문은 위에 있는 창문의 약 4배가 되고 뒷벽 윗부분의 창문은 아랫부분의 창문보다 약 1.5배 크다. 법보전의 경우 앞 벽 아랫부분의 창문이 윗부분보다 약 4.6배 크며, 뒷벽 윗 창문은 아래 창문보다 약 1.5배 크다. 이러한 창문 설계는 유체역학과 공기 흐름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장경각을 지었음을 증명해준다.

또한 법보전은 뒤쪽 벽 위, 아래 창 전체 면적이 앞쪽보다 1.38배 넓고 수다라장은 뒤쪽이 앞쪽보다 1.85배 넓다. 이는 법보전이 수다라장에 비해 뒤창으로 들어온 공기가 앞창으로 많이 빠져나가고 내부에 남는 양이 적다는 것을 뜻한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김동현 박사는 ‘법보전이 수다라장보다 뒤쪽 계곡에 가까이 있어 주변 습기가 많은 점을 고려하여 공기의 잔량을 적게 함으로써 습기 피해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이 간단한 차이가 공기의 대류는 물론 적정 온도도 유지하게 한다. 일례로 경판전 안에서 향을 피워보면 향이 각 전체를 한 바퀴 돈 뒤에야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판고 전체의 온도도 1.5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으며 더구나 가장 추울 때와 더울 때의 차이가 10~15도를 넘지 않는다.

수다라장과 법보전 사이 서북 끝과 동북 끝 양쪽에 서로 마주보는 동‧서 사간고는 각각 정면 2칸, 측면 1칸, 맞배3량집이다. 이들 건물 역시 수다라장과 법보전과 같이 익공형 주심포계의 집이지만 익공 쇠서가 수다라장과 같이 보머리에 붙지 않고 떠 있으며 벽체 역시 출입을 위한 문과 살창으로 되어 환기를 원활히 하도록 하였다.

바닥은 깊이 땅을 파고 숯, 찰흙, 모래, 소금, 횟가루를 뿌렸다. 비가 많이 와 습기가 차면 바닥이 습기를 빨아들이며 반대로 가뭄이 들 때는 바닥에 숨어 있던 습기가 올라와 습도 조절을 자동적으로 해 주게 되었다. 실제로 대장경을 장기 보존하는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습도라 할 수 있다. 습도가 너무 높으면 판이 썩어 들어갈 위험이 있고 너무 낮으면 갈라질 우려가 있다. 1979년 문화재관리국이 공기조화냉동공학회에 의뢰하여 조사한 바에 따르면 경판전의 습도조건은 연중 50~70%로 경판을 보관하는데 최적의 조건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학자들의 정밀 조사에 의하면 해인사 주변의 습도는 연중 인근 지역에 비해 6∼10% 가량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조건대로라면 경판이 썩기 쉽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경판이 온전히 보존돼온 것은 해발 645미터에 있는 판고가 지역적 특성상 3개의 계곡이 만나는 지점으로부터 1킬로미터쯤 북쪽에 위치, 바람이 항상 불어 자연적인 습도 조절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또 경판각의 시설 자체가 기막히게 조절 기능을 하고 있다. 현재 경판은 5단으로 된 판가 각 단에 빼곡히 세워져 있는데 이 때문에 밑에서부터 맨 위까지 경판 사이 틈을 통해 바람이 지나면서 골고루 습도를 조절해주는 것이다.

 
   
 
 
장경각 내부, 팔만대장경은 습기를 최대한 없애도록 바람이 잘 통하도록 설계된 건물에 보관됐다.

경판전의 우수성은 신판고의 실패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1979년 정부는 상당한 재원을 들여 지금의 경판전과는 좀 떨어진 위치에 신판고를 지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우선 최신 설비를 갖춘 콘크리트 구조의 새 건물로 지어졌지만 경판전과 같은 정도의 습도와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루 유지비용만도 수백 만 원씩 소비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기의 대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습도 조건이 나빠지자 결국 새 경판전으로는 쓰지 못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옻칠 사용

경판에 옻칠을 한 것도 장기간 보관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일반적으로 글자를 새기고 교정 작업을 마친 목각판은 표면에 먹물을 칠하거나 콩의 전즙과 송연으로 처리한 뒤 판가에 보관하는 것이 보통인데 팔만대장경의 경우 특별히 옻칠을 하였다. 목각판에 옻칠한 것은 세계적으로 팔만대장경이 유일하다.

옻나무에서 채취한 옻칠은 서양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동양에서만 발달된 특유의 천연도료로 옻나무 줄기에 상처를 내어 채취한 생옻은 회백색의 액체지만 공기와 접촉하면 갈색으로 변한다.

생옻의 주성분은 옻산이며 그밖에 고무질, 질소질과 수분을 포함하고 있다. 옻산은 효소반응에 의한 3차원 구조의 고분자로 산이나 알칼리에 쉽게 녹지 않으며 내열성, 내염성, 방부성, 방수성, 방충성, 절연성이 뛰어나다.  

우리나라 옻나무에서 생산되는 생옻은 세계 최고의 품질이라는 명성을 갖고 있다. 그 이유는 중국과 일본에서 생산되는 옻액의 구성성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한국산 옻산의 함량은 중국품이 72.5퍼센트 고급품이 83.4퍼센트임에 반해 중국산은 59퍼센트와 62퍼센트, 일본산은 65퍼센트와 71.6퍼센트에 불과하다. 옻산의 농도가 높으면 칠을 할 경우 도막(途膜)이 두껍게 생기고 투명성이나 광도가 좋기 때문이라고 전영우 박사는 설명했다.

옻칠은 나무뿐만 아니라 가죽, 종이, 삼베, 모시, 명주와 같은 천, 금속이나 도기 등에도 사용한다. 오늘날에는 무공해 도료로 해저케이블선, 선박, 비행기, 각종 첨단 기기 등에 산업용으로 이용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경판에 옻칠한 방법은 목각판 표면에 진한 먹을 발라 바탕인 소지(素地)를 염색한 뒤 그 위에 다시 안료가 섞이지 않은 생칠(여과와 탈수 등 초보적인 정제를 한 생옻)을 2∼3차례 하였다.

일반적인 목기와는 달리 칠 공정의 일부가 생략되었는데 이것은 칠 재료의 절약과 일손을 덜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경판의 특성상 칠막이 지나치게 두터울 경우 양각된 글자의 윤곽이 무디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한다. 조사 결과 칠의 두께는 대부분 55∼65마이크로미터 가량으로 균일하며 칠면을 깎아내기 위해 숯을 사용했다. 옻칠이 벗겨진 마구리 등이 다른 부분보다 훼손이 심한 것으로 드러나 옻칠 자체가 경판 보존에 큰 역할을 하였음을 증명한다.

 
   
 
 
대장경 계통도.

75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얼마 전까지 팔만대장경 판은 부패하거나 쥐와 좀벌레가 갉아먹는 일이 거의 없었다. 또 경판 자체가 휘는 일도 없이 원형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알려졌었다.

그러나 이태녕 서울대 명예 교수 등 전문가 10여 명이 1994년부터 2년간 실시한 연구 결과 곰팡이 해를 입거나 표면이 갈라진 경판이 다수 발견되어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세로로 심하게 휜 경판이 14%, 가로로 심하게 휜 경판이 30%에 달하였으며 경판의 26%가 금이 갔는데 이 중 금이 커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 23%나 되어 대장경 판의 보존이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

대장경 판을 보존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제기되었는데, 여기서도 석굴암과 같이 곰팡이 등 미생물에 대한 방제대책을 세우는 것은 물론 장경각의 환경을 원상회복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강조한다. 장경각의 공기 성분은 오존 20, 일산화탄소 5, 질소화합물 5, 아황산가스 0.1 이하로 모두 환경기준치 이하로 나타났다. 그러나 관람객이 늘어남에 따라 경판에 먼지가 심하게 쌓였으며 특히 바깥쪽 경판의 경우 판각한 글자가 잘 안보일 정도여서 그대로 방치할 경우 먼지가 습기를 머금어 경판이 썩을 우려가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 관람 편의를 위해 중앙 통로를 설치한 수다라전의 경우 통로 벽이 통풍을 방해한 데다 온․습도를 변화시켜 보존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지적이다. 동사간전 역시, 습기로부터 경판을 보호하기 위해 창밖에 설치한 비막이 판자가 오히려 통풍 장애만 유발한 것으로 지적되었다. 옥외나 다름없이 허술하게 보이는 환경이 대장경 판을 7백 년 이상 보존해 온 비결임이 입증된 셈이다.

전산화된 팔만대장경

팔만대장경의 문제점은 보관에만 있지 않다는데 있다.

조선시대 유일한 호불 군주라고 볼 수 있는 세조는 주요 사찰에 배분할 목적으로 1458년 역사상 가장 많은 50부의 팔만대장경 인쇄를 명했고 그 후에도 간헐적으로 간행했다. 팔만대장경은 1963년부터 1968년 사이에도 12부가 인쇄되었다. 이 가운데 4부는 일본, 1부는 미국의 캘리포니아대학교, 1부는 오스트리아, 2부는 영국에 보냈으며 한국에는 4부가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1976년 동국대학교출판부에서 48권으로 된 축쇄영인본을 출간했다.

그러나 팔만대장경이 갖고 있는 문제점은 팔만대장경이 한역 대장경 중 최고의 판본이므로 실제로 활용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판본이라는 것은 필사와 활자의 중간 단계에 불과하다. 더구나 팔만이라는 숫자가 드러내듯 분량이 방대하고 한문으로 표기되어 웬만한 전문가라도 그 전체를 파악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옻나무, 옻칠액은 줄기에 홈을 파서 채취한다(사진 전영우).

그것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최초로 활자를 발명한 나라라고 하지만 팔만대장경을 활자화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본이 1930년대에 100권짜리 '대정신수대장경'을 활자화하자 불교학의 기본 텍스트는 대정신수대장경으로 바뀌었다고 학자들은 아쉬워했다. 역사적인 가치보다도 오로지 활자본이라는 이점 때문이다.

한국의 학승과 불교학자들이 일본으로 유학 가는 이유도 일본의 대정신수대장경에 불교 공부의 대부분을 의지하기 때문이며 국내에서 번역되고 있는 대장경 대부분이 일본 것을 따른 것이라고 지적되어 팔만대장경의 활용도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결국 불교계에서도 이의 시급성을 인정하여 1997년에는 ‘팔만대장경에 새 생명을-21세기 디지털 팔만대장경을 만듭시다’라는 캠페인을 벌였다.

곧바로 해인사 고려대장경연구소에서 대장경 원본과 현대적 재해석을 거친 한글 번역문을 입력하고 대장경 인터넷 서버 구축 등의 전산화작업에 착수했다. 전산화 작업은 순조롭게 완료되어 2000년 12월에 CD-ROM으로 제작되었다. 2001년에는 팔만대장경 한문 영인본의 한글 번역본으로서 318권으로 구성된 한글대장경도 완간되었다.

한편 2004년에 고려대장경에도 오자가 있으며, 고려대장경을 모본(母本)으로 훨씬 후대에 만들어진 일본의 '신수(新修)대장경'에는 더 많은 오자가 발견된다는 비교연구결과가 나왔다.

종림 스님은 팔만대장경과 신수대장경의 글자 하나하나를 직접 비교 대조하는 일자대조 작업을 통해 팔만대장경 원문 자체에서 130여자(字), 신수대장경에서는 580여자의 오자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를테면 팔만대장경에서는 ‘시(示)'를 ‘역(亦)'으로, `보살마하살'을 ‘보살마보살'로 판각하는 등의 오류가 드러났다고 설명했다.

이런 결과는 팔만대장경의 전산화를 추진하면서 팔만대장경 전산본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신수대장경 전산본과  3차례에  걸쳐 비교 작업한 노력의 성과물로 얻어진 것이다. 그런데 학자들이 놀라는 것은 수천 만 자를 각자하면서 겨우 130자만 오자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팔만대장경을 만들면서 고려인들이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를 알려주는 증거라 볼 수 있다.

 
   
 
 
2004년 해인사에서 열린 팔만대장경 축제.

한편 서지학자 조병순 박사는 최근 발견된 8~9세기의 '발해(渤海)대장경'이 11세기에 제작된 '거란대장경'의 모본(母本)이었다고 발표했다. 서기 926년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이 발해 것을 그대로 옮긴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거란대장경을 상당 부분 참고한 13세기의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거란대장경인 ‘대방광불(大方廣佛) 화엄경 (華嚴經)’의 함차(函次)번호가 발해 불경으로 여겨지는 '대방광불화엄경' 권 제38 ‘대화령국장(大和寧國藏)’과 동일하다고 설명했다.

함차번호란 대장경의 여러 권(卷)을 묶어 천자문 순서대로 매긴 번호로, 이 순서가 동일하다는 것은 곧 같은 계통의 불경임을 의미한다. 화엄경의 31~40권에 해당하는 현존 ‘대화령국장’의 함차번호는 ‘육(育)’이다. 그 앞에 존재했을 21~30장은 앞 글자인 ‘애(愛)’가 되지만 송나라에서 청나라까지의 중국 불경은 이 부분이 ‘장(章)’으로 돼 있는 반면, 거란대장경은 똑같은 ‘애’자였다.

고려 팔만대장경을 사실상 만들었다고 알려지는 승려 수기(守其)는 1087년 완성된 고려의 '초조대장경'과 북송(北宋)의 대장경, 거란대장경을 모두 비교·교감(校勘)했다는 내용이 '고려국신조대장(新雕大藏)교정별록(校正別錄)'에 기록돼 있다. 일본의 저명한 불교학자 오노 겐묘(小野玄妙)는 “팔만대장경이 참고한 거란본은 거란에 앞선 세력(발해)이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정했지만 아직까지 그 근거는 없었다.

‘동일한 함차번호’라는 것은 거란본이 발해본을 사실상 그대로 복사했다는 얘기가 된다. 조 박사는 “거란이 발해의 궁중 서고를 고스란히 넘겨받았다는 기록이 있다”며 “여기서 고구려-발해-거란으로 이어지는 고대 북방 문화의 계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조병순 박사는
“당시 대장경은 황제의 칙령이 없이는 번역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대장경을 발간한 세력은 중원의 통치범위 바깥에 있었던 것이 된다”며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중국 측의 주장도 자연스럽게 부정된다고 설명했다.

<이종호 / 과학저술가>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국정브리핑 2005-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