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가면 미국은 일본 선택할 것"

한국정치학회(회장 양병기·梁炳基 청주대 교수)는 15일 특별 학술회의를 갖고 노무현 정부의 4강외교 정책 등을 다뤘다. 이번 학술회의는 4개 분과로 진행됐으며, 이 중 첫 번째 주제가 ‘외교정책’이었다. 이 자리에서도 정부가 표방한 ‘동북아 균형자론’을 둘러싼 논란이 벌어졌다. 이날 회의에서 나온 동북아 균형자론에 관한 정치학자들의 견해들을 정리해 봤다.

◆ 김기정 연세대 교수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의 외교적 역할을 동북아 균형자로 선언했다. 지난 2년간 노무현 정부가 추진해 왔던 외교정책 기조가 ‘동북아 균형자’라는 개념으로 정리되어 드러난 것처럼 보인다. 동북아 국가들 간 상생과 공생의 협력질서 창출에 한국이 일익을 담당하겠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균형자론이 지역 국제정치에서 권력구조의 변동, 즉 세력균형체제의 새로운 창출이나 기존 세력구도를 변경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균형외교(balancing diplomacy)론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한국은 이미 한·미동맹이라는 제도적 장치를 유지하고 있다. 동북아 균형자론이 한·미동맹의 기존 구도를 급격히 변경하면서 새로운 세력균형 체제를 만들어가려는 의도는 아니다. 한·미동맹의 골격을 해체하고 새로운 동맹관계를 모색하려는 것은 현존 한국 외교에서 결코 바람직한 대안이 아니다.

한국이 추구해야 하는 균형외교는 첫째 동북아 지역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확대시켜 나가는 촉진자(facilitator)의 역할, 둘째 국가 간 갈등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조정자 (mediator) 역할, 셋째 국제적 아젠다를 제시하는 창안자(initiator)의 역할 등이다.

◆ 김영호 국방대학교 교수

지난 2년간 정부의 외교적 노력과 성과에 대해 견해를 달리하는 평가들이 존재한다. 여기에는 평가자들의 이념적 배경이 투영되어 있으며, 이러한 견해차는 ‘동북아균형자역할론’으로 더 증폭되고 있는 실정이다.

동북아 균형자론은 개념과 표현상의 혼선으로 인해 잠시 다시 한 번 ‘자주냐 동맹이냐’는 식의 이분법적 논쟁이 재연되는 듯했지만, 정부측 노력으로 상당부분 진정된 국면에 접어든 상태다. 현 정부 대미 외교정책의 기본 목표는 ‘자주와 균형’으로 정리될 수 있다. 이는 대미 편중외교와 대북 견제위주의 대미 군사동맹 강조에서 탈피하여 외교의 외연을 넓히고 다양화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미흡한 점도 없지 않다. 우선 외교정책의 기본노선과 목표 제시에 있어 개념과 표현의 혼선이다. 이는 ‘동북아 중심국가 건설’, ‘협력적 자주국방’, 그리고 최근의 ‘동북아 균형자론’에 이르기까지 외교적 비전이나 목표 제시과정에서 자주 제기되는 문제다. 또 이라크 추가 파병의 경우, 정책 집행의 지나친 지연으로 그 효과를 상당히 약화시킨 결과를 초래하였다. (미국 영국에 이어)세 번째로 많은 병력을 (이라크에) 파병하고도 미국으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대접과 감사를 받고 있지 못한 상황이며, 파병집행 지연 과정에서 미국으로부터의 불필요한 오해와 불만을 야기한 아쉬움이 있다.

◆ 김호섭 중앙대 교수

한·일 간 외교 현안에 관해서 노무현 정권은 임기 초반 2년의 접근방법과 2005년 3월 이후의 대응은 매우 다르다. 2005년 4월 현재 한·일관계에 있어서 주요한 외교현안으로 등장한 역사교과서 검정 문제와 독도 문제는 이번에 새롭게 제기된 것이 아니다. 이번에 새롭게 부각된 것은 반복적이며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현안에 대해서 노무현 정권이 기존 정권과는 매우 다르게, 그리고 갑자기 정책을 전환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 대통령은 포퓰리즘(populism)적인 입장을 대일 외교에서도 채택하고 있다. 또 한·일 간 갈등을 축소하기보다는 일본에 대한 외교전 전선을 매우 확대하고 있다. 동북아 질서의 균형자 역할이라는 개념을 근거로 하여 중국과 군사협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것도 일본의 과거사 현안과 관련되어 있다.

물론 정책 전환은 최근 집중적·연속적으로 나온 일본 우익들과 지방정부 및 고위정치가의 망언 때문이다. 여기에는 또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는 동북아시아 질서 속에서의 한국의 역할 변화가 기본으로 깔려 있다. 동북아 균형자론은 정권 초기에 나온 자주외교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한·일 관계가 근본적으로 흔들리면 미국의 세계전략에도 어려운 선택을 강요하게 될 것이다. 한국과 일본 중에 양자택일을 하여야 한다면 미국은 한국보다 일본을 선택할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훨씬 높다.

◆ 신상진 광운대 교수

정부의 동북아균형자론은 중국과 일본의 대립구도 속에서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도모하려는 전략적 함의를 담고 있다. 북핵 문제를 비롯한 외교안보 분야에서 한·중 협력은 긴밀하게 유지되고 있다. 또 중국은 북한의 붕괴보다는 개혁·개방을 통해 안정을 도모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북한에 대한 경제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도 한국과 공감한다.

그러나 한·중은 한반도와 동북아의 미래를 형성해 나가는 방법에서 입장이 상충된다. 한국의 ‘동북아 경제중심국가’ 구상에 대해 중국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은, 북한(경제)을 중국 경제권에 편입시키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미·일의 동북아 정책에 대한 한·중의 인식 차이도 지적할 수 있다. 노무현 정부는 한·미 동맹을 정책 기조로 삼아 동북아에서 균형자 역할을 추구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중국은 한·미 동맹과 주한 미군을 동아시아의 불안정 요인으로 간주하고 있다.

동북아 균형자론은 중·일 대립구도 속에서 한국이 균형 정책을 추구한다는 것을 상정한다. 이는 한국이 중국과의 외교안보 관계를 중시할 것이란 의미다. 이런 정책을 밝힌 데 대한 중국측의 대가를 보장받아야 한다. 한·일 관계가 악화되는 상황에서 일본을 압박할 만한 카드를 중국으로부터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조선일보 / 박두식, 안용현 기자 2005-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