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불붙기 시작한 동북아 파워 게임

요즘 동북아 국제 정세가 심상찮다.

거대한 지각(地殼) 판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지각 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진원(震源)은 일본이다.

최근 들어 일본은 주변국들을 향해 잇따라 외교적 도발을 감행하고 있다.

지난 2월 말 한국을 향해 갑자기 동해의 독도 영유권 문제를 들고 나오더니, 곧 이어 동(東)중국해에서 중국과 영토 분쟁을 빚고 있는 센카구(尖閣) 제도(중국 명칭은 댜오위다오(釣魚島))에 대한 ‘영유권 고정화(固定化)’ 작업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옛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점령한 남(南)쿠릴 열도 4개섬(일본은 북방영토라고 부른다)을 러시아로부터 돌려받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와함께 4월 신학기를 앞두고 4년마다 한번씩 실시되는 중등학교 교과서 검정(檢定)을 거쳐 채택된 역사 교과서와 공민(公民) 교과서들이 왜곡된 내용으로 가득 채우져 있어 당사자인 한국과 중국은 크게 분노하고 있다. 새 교과서들은 4년 전 잘못된 것으로 지적된 내용들이 고쳐지기는커녕 오히려 개악(改惡)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교과서 제작은 출판사들이 알아서 할 일이며, 일선 학교가 자율적으로 교과서를 채택하기 때문에 정부는 간섭할 수 없다는 일본 정부의 발표와 달리 문부성이 직접 나서 왜곡된 내용을 교과서에 싣도록 지시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분노는 절정에 달하고 있다.

한-일, 중-일 관계에서 영토 문제와 역사 왜곡 문제는 언제든 터질 수 있는 폭탄이나 다름없다. 양국 관계가 별 문제없이 진행되다가도 한번 불거지기만 하면 언제든 순식간에 판을 뒤엎을 수 있는 폭발력을 갖고 있다. 그동안 여러 차례 경험을 통해 그것을 모를 리가 없는 일본 정부가 이번에 동시다발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은 다분히 고의적이라고 판단된다.

특히 한-일 관계는 최근 몇 년 동안 순탄한 길을 걸어왔으며, 올해 국교정상화 40주년을 맞아 ‘한-일 우정의 해’를 선포하고, 갖가지 기념 행사가 준비돼 있다. 지금 분위기대로라면 ‘한-일 우정의 해’는 물 건너간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면 왜 일본은 한국과 중국으로부터 거센 반발에 부닥치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같은 외교적 도발을 감행했을까? 필자는 그것을 두 가지로 생각한다. 일본 경제의 장기 침체에 따른 자신감 상실이라는 내부적 요인이 하나요, 주변국가들의 약진 특히 중국 경제가 이룩한 눈부신 발전을 보고 느끼는 두려움이라는 외부적 요인이 다른 하나다.

이 두 가지 요인으로 인해 일본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불안감이 일본 정부로 하여금 영토 문제와 역사 왜곡 문제에서 지금까지의 소극적, 수세적(守勢的) 자세에서 적극적, 공세적(攻勢的)으로 전환하도록 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2류 국가’ 추락이 두려운 일본

지난 10년 동안 일본은 장기 불황에 시달렸다. 경제적 위축 속에서 장래에 대한 불안감이 사회에 팽배하면서 민족주의 성향의 우파가 목소리를 높이는 우경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1920년대 말과 30년대 초 경제공황 때와 흡사하다. 우경화는 정치에 변화를 몰고왔다.

현재 일본 정치는 급속도로 보수화하고 있다. 사회당, 공산당 등 진보 세력이 완전 몰락한 상황에서 자민당과 민주당 두 보수 정당이 정치를 양분하고 있다. 새로 등장한 젊은 정치 지도자들은 전쟁 책임에서 자유롭다. 그들이 내세우는 ‘보통국가론’은 일본도 다른 나라들처럼 정식 군대를 갖고, 전쟁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전쟁을 영원히 포기하도록 규정한 헌법 제 9조를 개정해야 한다.

그러나 과거 일본 군국주의처럼 팽창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앞세우고 침략 전쟁을 벌이던 때와는 다르다. 그보다 훨씬 소극적이다. 일본 경제는 자신감을 상실했다. 이대로 가면 2류 국가로 추락한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다.

가장 두려운 나라는 중국이다. 현재 국내총생산(GDP)에서 세계 6위인 중국은 지난 20년 동안 연(年) 평균 9.5%의 경제 성장을 계속해왔으며, 앞으로 20년 동안 해마다 6% 이상 성장을 계속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중국의 GDP가 오는 2017년 일본의 그것을 추월할 것으로 전망한다.

일본 경제가 쇠퇴할 것으로 보는 가장 큰 이유는 급격한 인구 감소다. 최근 일본 정부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 인구는 0.01% 줄었다. 오는 2010년부터 인구 감소가 더욱 빠르게 진행될 전망이다. 인구학자들 가운데는 21세기가 끝날 무렵 일본 인구는 현재의 1억 2800만명에서 3분의2나 감소한 45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는 사람도 있다. 4500만명이라면 1910년의 일본 인구다. 이에 비해 현재 13억명인 중국 인구는 앞으로도 계속 증가할 것이며, 14억명을 정점으로 일단 멈춰 그 수준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렇게 되면 현재 10대1에서 21세기 말 30대1로 벌어지게 된다.

일본은 중국과 1대1로 맞서기엔 힘이 부친다. 해결 방법은 미국과 군사동맹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다. 미국의 힘을 빌려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미니 패권주의’다. 미국도 중국이 두렵다. CIA는 오는 2042년 경제력에서 미국과 중국이 역전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선 일본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미국은 일본을 ‘아시아의 영국’을 만들고자 한다. 국제 문제가 발생하면 언제나 미국 편에 서는 영국이 맡는 역할을 아시아에서 일본이 맡아주길 바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미국은 일본이 보유한 ‘안보 자산’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경제대국 일본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군사비를 지출하는 군사대국이다.

지난 수년간 미국-일본 안보 협력은 더욱 긴밀해졌다. 1996년 미-일 안보선언, 97년 미-일 신(新)방위협력 지침, 99년 주변사태법을 통해 미국은 일본을 동북아 안보 전략의 주요 파트너로 격상시켜 미-일 군사동맹의 적용 범위와 자위대의 활동 범위를 동북아 바깥으로 확대하는 길을 열어줬다. 일본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도 앞장서서 지원하고 있다.

일본은 일본대로 미국의 미사일 방어(MD) 체제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또 91개나 되는 미군 기지 숫자를 더 늘이도록 허용할 방침이다. 미국 워싱턴주(州) 포트 루이스에 있는 미 육군 1군단 사령부를 일본 가나가와(神奈川) 캠프 자마로 옮겨 미국의 동북아사령부로 만드는 방안을 미국과 논의 중이다.

이와함께 일본의 핵무기 보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일본은 핵무기 보유에 필요한 세 가지 요건 즉, 핵무기 제조 능력, 정확한 목표 설정 능력, 핵무기 투발 수단에서 의심의 여지 없이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지금 당장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반년 안에 핵무기를 만들 수 있다.

특히 일본이 보유한 핵 분열 및 증식로에 사용후 핵 물질 재처리 능력은 세계적 수준이며, 이를 무기 생산에 전용하면 최첨단 열핵(熱核)무기 제조가 가능하다. 여기에 일본이 보유한 군사 첩보 위성이 갖고 있는 정보 수집 능력, 그리고 H 시리즈 로킷 발사 능력을 합하면 무서운 핵 전력을 갖추게 된다.

미국과 일본의 ‘중국 죽이기’

미국과 일본이 중국 압박에 사용하는 빅 카드는 타이완(臺灣)이다. 부시 행정부의 외교 안보 전략가들은 중국의 세력 팽창을 막는 데 타이완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지난해 8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집권 공화당 전당대회는 “타이완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도록 미국은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는 내용의 강령을 채택했다.

같은 무렵 미 해군은 타이완 부근 공해 상에서 ‘2004년 여름 맥박 작전’이라는 대규모 기동 훈련을 실시했다. 이 훈련은 미국이 보유한 항공모함 12척 가운데 7 척이 참가한 전례없는 초대형 기동훈련이었다. 당시 중국 정부는 미국이 중국에 대해 19세기식 포함(砲艦) 외교를 벌이고 있다고 강력히 비난했다.

해가 바뀌어 지난 2월19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미-일 안보협력회의(SCC)는 미국과 일본이 타이완 해협에 ‘공통된 전략 목표(common strategic objective)’를 갖고 있다고 선언했다. SCC는 미국과 일본의 외교·국방 장관 그리고 양국의 외교·안보 실무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주요 외교·안보 문제를 토의하는 공식 협의기구다. 외국이 타이완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내정 간섭’으로 간주하는 중국이 가만 있을 리 없다. 지난 3월14일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는 만약 타이완이 독립을 추구할 경우 중국은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저지해야 한다는 ‘반(反)국가분열법’을 통과시켜 맞불을 놓았다.

미국은 지난 1979년 중국과 수교(修交)하면서 ‘하나의 중국’ 원칙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만약 중국이 타이완을 공격할 경우 미국은 타이완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력 지원을 포함한 필요한 조치들을 취할 수 있도록 하는 ‘타이완 관계법’을 제정했다.

타이완 관계법은 미국의 군수산업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줬다. 그동안 타이완은 미국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무기를 수입해왔다. 한 예로 지난 2001년 타이완은 미국과 패트리어트 미사일, 디젤 잠수함, 대잠(對潛) 초계기 등 각종 첨단무기 도입 계약을 맺었는데, 현재 시가로 따져서 미화 약 196억달러에 달한다.

중국과 타이완 관계에서 가장 큰 문제는 타이완 독립이다. 2000년 국민당 장기 집권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민진당(民進黨)의 천수이벤(陳水扁) 총통은 타이완 독립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이에 반해 국민당 등 야당은 독립에 반대하고 현상 유지를 원한다. 국민 여론도 둘로 완전히 갈라져 있다.

일찍부터 타이완에 정착한 본성인(本省人)들은 독립을 원하는 반면 본토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타이완으로 온 외성인(外省人)들은 반대다. 기득권 세력인 외성인은 타이완 경제를 장악하고 있으며, 본토에 엄청난 액수의 투자를 하고 있다. 타이완이 본토에 투자한 액수는 미화 1500억달러에 달한다.

천수이벤은 지난해 5월 실시된 총통 선거에서 가까스로 재선에 성공했지만 12월 총선에선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 독립 추진에 제동이 걸렸다. 하지만 불씨는 계속 살아 있으며, 언제든 다시 활활 타오를 기세다. 중국은 타이완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화전(和戰) 양면 작전을 쓰고 있다. 독립은 절대 용납할 수 없으며,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저지하겠다고 겁을 주는 한편으로 독립에 반대하는 야당 세력과 연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달 국민당 간부들을 불러 극진한 대우를 한 데 이어 이번엔 렌잔(連戰) 국민당 주석을 공식 초청했다. 언론은 이를 가리켜 제3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이라고 보도했다.

전방위 반격에 나선 중국

미국과 일본의 압박에 중국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먼저 꺼내든 것이 북한 카드다. 6자 회담에 불참하고 있는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밖에 없다. 중국은 북한 설득에 소극적 태도를 보임으로써 미국과 일본을 애태우고 있다. 러시아와 인도에도 손을 뻗친다. 러시아는 미국의 포위망 구축에 압박을 받고 있다. 과거 위성국이었던 동유럽 국가들은 모두 서방으로 넘어갔고, 옛소련에 속했던 나라들도 하나 하나 미국의 영향권에 흡수되고 있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에선 러시아군과 함께 미군이 주둔 중이다. 중국과 러시아는오는 8~9월 한반도에서 가까운 산둥(山東)반도와 서해 상에서 사상 최초로 대규모 합동 기동 훈련 ‘우의(友誼) 2005년’을 실시하기로 돼 있다.

중국·러시아·인도 3국이 힘을 합쳐 미국에 대항하는 구도는 원래 1990년대 러시아가 내놓았던 구상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중국이 더 적극적이다. 중국은 인도와 해묵은 국경 분쟁을 마무리지었다. 이어서 경제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인구 13억명의 중국과 10억명의 인도는 21세기 세계 경제를 이끌어갈 두 마리 용이다.

중국의 제조업과 인도의 정보기술(IT)이 손을 잡으면 가공(可恐)할 힘을 발휘할 것이 틀림없다. 미국도 인도 유인(誘引)에 나섰다. 지난 3월 말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인도를 방문해 전략적 파트너십 관계를 제안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달 초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가 인도를 방문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중국은 중동과 아프리카 그리고 미국의 뒷마당인 중남미까지 진출하고 있다.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에너지 소비국으로 등장한 중국은 중동에서 석유와 천연가스(LNG) 확보를 위해 필사적이다. 핵무기 개발 문제로 미국과 전쟁 직전 상황까지 가 있는 이란에 적극 투자하고 있다.

이란은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석유 개발 투자를 머뭇거리고 있는 일본 대신 중국을 새로운 파트너로 잡을 생각이다. 지난해 10월 중국 국영 석유회사 시노펙은 이란과 미화 7백억~1천억달러 규모의 야다바란 LNG전(田) 개발 계약을 체결했다. 중국은 앞으로 25년간 이란으로부터 LNG 2억5천만t을 수입하기로 합의했다.

중국은 이란과 경제 협력을 적극적으로 추진함과 동시에 미국에 대한 외교적 타격을 가할 준비도 하고 있다. 미국이 이란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도록 압박하기 위해 고려하고 있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한 경제 제재 조치에 안보리 상임이사국 중국이 비토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리자오싱(李肇星) 외교부장은 테헤란을 방문해 모하마드 하타미 이란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중국은 이란에 대한 유엔 안보리의 어떠한 제재 조치에 대해서도 비토권을 행사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동안 미국은 중국이 이란에 핵 무기와 미사일 제조 기술을 팔아넘기고 있다고 비난해왔다.

중남미에서 중국은 자원 대국 브라질을 필두로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칠레, 쿠바 등을 집중 공략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후진타오(胡錦濤) 국가 주석은 브라질을 방문, 브라질로부터 매년 쇠고기와 닭고기 미화 8억달러 어치를 수입하기로 약속하는 한편 바히아에서 리우 데 자네이루에 이르는 송유관 건설에 중국이 13억달러를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이와함께 중국과 브라질은 전략적 파트너십 관계를 맺고 지난해 100억달러였던 양국간 교역을 오는 2007년까지 200억달러로 늘리기로 합의했다. 후진타오는 중국-브라질 관계가 “개발도상국가들 사이에 적합한 새로운 국제 정치 질서의 모델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베네수엘라와의 관계는 특히 주목해야 한다. 석유 확보와 미국 골탕 먹이기를 함께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는 세계 5위의 석유 수출국으로 전체 석유 생산량의 60%를 미국에 수출하며, 미국은 수입 석유의 5분의1을 베네수엘라에 의존하고 있다. 후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피델 카스트로 쿠바 대통령과 가까우며, 노골적으로 반미(反美) 입장을 취하는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다. 미국은 여러 차례 차베스 제거를 시도했으나, 차베스는 다수인 빈민층의 굳건한 지지를 바탕으로 여전히 건재하다. 차베스는 지난해 12월 중국을 방문, 석유에 대한 광범위한 접근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해 미국을 기분나쁘게 했다.

미국의 뒷마당 중남미까지 노려

아시아 지역에서도 중국의 약진은 놀랍다. 지난 1990년 이래 중국-동남아국가연합(ASEAN) 교역량은 매년 20%씩 증가해왔다. 특히 최근 수년간은 증가세가 더욱 두드러진다. 2003년 미화 782억달러에 이어 지난해엔 1천억달러를 기록했다. 지난해 12월 중국과 ASEAN은 2010년까지 자유무역 지대를 결성하기로 합의했다.

중국은 ASEAN 10개국에 중국, 일본, 한국을 더한 ‘ASEAN 플러스 3’에서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반면에 오랫동안 ASEAN에 공을 들여온 일본은 찬밥 신세다. 중국은 ASEAN 플러스 3을 ‘동아시아 공동체(EAC)’로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며, 내년 11월 열리는 동아시아 정상 회의는 이를 위한 모임이다. 일본은 미국도 참가시키자고 주장하지만 말발이 서지 않는 상황이다.

국제 문제에서 미국에 대한 견제 역할을 자임(自任)하고 있는 유럽과의 관계도 강화하고 있다. 중국은 유럽연합(EU)에게 두 번째 무역 상대, EU는 중국에 첫번째 무역 상대로 자리잡았다. EU는 중국 시장을 놓고 미국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유럽의 에어버스와 미국의 보잉 두 개의 거대 항공기 제작회사가 민간 여객기 판매를 놓고 중국에서 벌이는 싸움은 대표적 사례다.

얼마전 EU는 오는 7월까지 중국에 대한 무기 금수(禁輸) 조치를 해제하려다 미국 정부와 의회의 강력한 반발로 일단 연기했다. 하지만 EU가 미국에 굴복한 것은 결코 아니며, 오래지 않아 무기 금수 조치가 해제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지난 1989년 6·4 베이징(北京) 티엔안먼(天安門) 사건 이후 서방 국가들은 중국에 무기를 팔지 못하게 돼 있다. 그러나 이제 시간이 많이 흘렀고, 중국에 새 지도부가 들어서는 등 상황이 크게 달라졌으므로 무기 금수 조치를 해제해야 한다는 것이 EU의 주장이다.

지난 2001년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고, 오는 2008년 베이징에서 올림픽이 치러지는 마당에 무기 금수 조치를 계속 유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무기 금수 조치가 해제되면 EU는 매년 미화 150억달러 어치의 무기를 팔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EU로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노다지라고 하겠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중국군 현대화다. 지난 3월13일 장쩌민(江澤民)으로부터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를 물려받아 명실상부한 중국의 최고 권력자가 된 후진타오는 장쩌민과 다른 새로운 군사 노선을 채택했다. △세계 군사 혁신 추세에 따른 전방위형(全方位型) 인재 발탁 △해·공군 중시(重視)를 통한 연합작전 능력 강화 △타이완 문제 중시 △국방과 경제 발전의 병진(竝進)이 그것이다. 경제 발전의 성과를 군사 부문에도 돌려 세계 수준의 군대를 보유하겠다는 뜻이다.

후진타오가 중앙군사위 주석에 취임한 다음날 전인대는 올해 국방 예산을 12.6% 늘려 2447억 위안(미화 295억달러)으로 결정하는 한편 병력을 20만명 감축, 여기서 얻어지는 돈을 하이테크 무기·장비 구입에 사용하는 법안을 승인했다.

대중국 포위망에 한국 포함시키려는 미국, 한국의 선택은?

미국은 미-일-한, 여기에 타이완까지 포함한 대(對)중국 포위망을 구상하고 있다. 한-미 안보 동맹과 미-일 안보 동맹을 결합한 미-일-한 삼각 군사 동맹은 냉전 시절부터 미국의 오랜 꿈이었다. 냉전이 끝나고 동북아에서 소련의 위협은 사라졌지만 미국 입장에서 볼 때 미-일-한 삼각 군사 동맹의 필요성은 오히려 더 커졌다.

두 세기만에 다시 동북아 패자(覇者)로 복귀를 노리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위협, 비록 과거에 비해 세력이 약해지긴 했어도 동북아와 북태평양에 대한 야심을 버리지 않고 있는 러시아, 그리고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로 무장한 북한을 막기 위해 미-일-한 군사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배상, 독도 영유권 분쟁과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로 한국과 일본이 서로 적대(敵對)하는 데 대해 미국은 불만이 크다. 특히 역사 왜곡 문제를 놓고 한국과 중국이 일본에 대해 보이지 않는 공동 전선을 구축한 데 대해 미국은 더 큰 불만을 갖고 있다.

한국 정부가 제시한 ‘협력적 자주국방’이나 ‘동북아 균형자 역할’에 대해 냉소적 반응을 보이고, 주한 미군이 보유한 장비 이전 및 축소 그리고 한국인 근로자 해고의 일방적 통보 등 최근 미국이 보이는 오만한 태도의 근저에는 미국의 한국에 대한 불만이 가로놓여 있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 미국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미국의 노선을 무조건 따를 수만은 없다.

현재 한국의 외교·안보가 지향해야 할 당면 목표는 △북한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한-미 안보 동맹 유지△주변국들과의 평화 협력 관계 유지에 둬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우리의 안보를 확실히하면서 주변국들과도 사이좋게 지내자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우리에게 어느 쪽에 설 것인가를 확실히 선택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한-미 동맹이 우리에게 중요한 존재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우리가 원치 않는 전쟁에 휘말려들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맹방인 미국에 대해서도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국제 정치를 요리하는 강대국들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싸움판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오직 관심은 누가 더 힘이 센가, 경쟁 상대를 파괴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인가뿐이다. 약소국들의 입장이나 운명 따위는 크게 개의하지 않는다.

동북아는 강대국들 사이의 치열한 싸움판으로 점차 변해가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가, 어느 쪽이 승리하고 어느 쪽이 패배할 것인가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전쟁의 참화를 피하고 평화와 번영을 계속 유지해 나갈 수 있느냐다.

<정우량 / 전 중앙일보 국제부장>

(데일리 서프라이즈 2005-4-13)

외부 필자의 컬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본 사이트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