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우총 호우가 고구려의 신라영토 진주 입증?"

역사학 박차고 점성술로 간 고구려사의 단면

나중에 호우총(壺우<木+于>塚)이라고 명명된 경주 노서동(路西洞) 고분군 소재 5세기대 신라 적석목곽분(績石木槨墳)은 흔히 한국고고학계에서 "해방 후 우리 손으로 발굴한 첫 유적"으로 꼽힌다.

1946년에 이 호우총 발굴을 주도한 이는 당시 국립박물관장인 김재원 박사였으나 그 조사를 사실상 주도한 인물은 조선총독부 관리 출신 일본인이었다.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 1909년생인 그는 조선총독부박물관 마지막 관장이었다. 그의 발표 글 중에서 가장 빠른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는 1936년 무렵에 쓴 나주 복암리 고분 논문이 있다.

그는 현재 생존해 있다. 올해로 96세. 100세를 눈앞에 둔 최근까지도 조선총독부 재직 시절 미처 정리하지 못한 한국 유적을 보고서로 작성해 내고 있다.

어찌된 셈인지 아리미쓰는 해방(일본으로는 패망)이 됐음에도 곧바로 귀국하지 않고 한국에 머물렀다. 이 박물관을 접수한 인물이 김재원 박사였다.

12일로 15주기를 맞은 김 박사는 조선총독부 박물관뿐 아니라 '아리미쓰'라는 사람까지도 '접수'했다. 한국에 머물고 있던 그를 대동하고 경주로 향했던 것. 그리고는 고분을 팠다.

주위 시선을 우려해 김 박사는 아리미쓰를 조선인이라고 둘러댔다. 이렇게 해서 식민지시대에 각종 고고학 발굴을 주도했던 아리미쓰는 해방 1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여전히 경주에서 고분 발굴을 '지도'했다.

규모라고 해야 봉분(封墳) 기준으로 지름 약 16m, 잔존 높이 약 4m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여느 신라 적석목곽분이 그렇듯이 이곳에서는 유물이 잔뜩 쏟아졌다.

덧널(木槨) 안에서는 금동관(金銅冠)과 금동 환두대도(環頭大刀)를 필두로 많은 부장품이 빛을 보았다. 많은 주목을 끈 출토품 중 하나가 발굴보고서에서 '목심칠면'(木心漆面)이라고 김재원 박사가 이름 붙인 괴상한 탈 모양의 유물이었다.

김 박사는 거무틱틱한 빛을 내고 우락부락한 사람 얼굴 모습의 이 목심칠면이 사악한 기운을 쫓는 주력이 있다고 여겨지던 중국의 방상씨(方相氏) 탈이라고 짐작했다. 이 주장은 1990년대 들어 조유전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장에 의해 붕괴된다. 방상씨 가면이 아니라 화살통이었기 때문이다.

이 호우총 유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명인 이 고분에 '호우총'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준 청동호우(靑銅壺우<木+于>)였다. 뚜껑이 몸체와 분리되는 요강처럼 생긴 이 유물 몸체 밑바닥에서는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이라는 명문이 확인됐다.

이 중 마지막 '十'은 문자라기보다 부호로 보는 쪽이 타당하다. 글자 그대로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라는 뜻이다. 을묘년(乙卯年)은 이 호우가 제작된 연대를 말할 것이며, 국강상ㆍ광개토지ㆍ호태왕(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은 광개토왕으로 알려진 고구려 제19대왕이다. 생전 이름이 아니라 죽은 뒤에 그 아들인 장수왕이나 신하들이 한껏 추켜 붙인 시호(諡號). 광개토왕비에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地'나 '境'은 통하는 말이다.

호우(壺우<木+于>)란 기능이나 모양에 의한 그릇의 분류 명칭이다.

혹자는 '국강상ㆍ광개토지ㆍ호태왕' 혹은 '국강상ㆍ광개토경ㆍ평안ㆍ호태왕'(국강상<國岡上>은 광개토왕이 묻힌 땅 이름)이란 시호나 그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를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각종 훈적(勳積)을 열거한 광개토왕 비문을 근거로 광개토왕이 정말 위대한 정복군주라고 주장한다. 거의 모든 국내 역사연구자가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는 실정이다.

고구려의 기념비인 이런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중국 남조(南朝) 왕조인 송(宋)이 원가(元嘉) 28년(451), 왜국왕(倭國王) 제(濟)란 자를 '사지절ㆍ도독ㆍ왜ㆍ신라ㆍ임나ㆍ가라ㆍ진한ㆍ모한ㆍ육국ㆍ제군사'(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辰韓慕韓六國諸軍事)라고 책봉했다는 기록을 책봉 이름 그대로 역사적 사실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국내에 거의 없다.

송나라의 왜국왕에 대한 책봉 명칭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당시 왜국왕은 통치영역이 왜를 필두로 신라ㆍ임나ㆍ가라ㆍ진한ㆍ모한의 육국에 걸치게 된다.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걸치는 대제국을 건설한 셈이다. 하지만 아무도 이것이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각설하고, 고구려가 명명한 광개토왕 시호를 새긴 유물이 신라 왕국 한복판인 신라인의 무덤에서 출토된 사실은 적잖은 의문을 던진다. 사실 삼국사기 등을 참조할 때 호우가 제작된 을묘년, 즉, 415년(장수왕 3) 무렵에 고구려나 고구려계 유물이 신라영역에서 나오는 것이 이상할 까닭은 없다. 당시 고구려는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한층 강화하고 있었고, 힘에서도 신라보다 압도적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내물왕의 아들인 복호(卜好)가 고구려에 인질로 가기도 했으며, 복호의 형으로 내물왕 장자인 눌지(訥祗)가 서기 417년, 내물왕을 이은 실성왕(實聖王)을 쿠데타로 밀어내고 왕위를 찬탈할 때 고구려 군사의 힘을 빌렸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청동호우는 그 제작시기나 그것이 부장된 호우총의 축조연대가 5세기 무렵으로 생각된다는 점에서 고구려와 신라 간에 전개된 밀접한 관계를 방증하는 유물임에는 틀림없다.

이 호우에 대해 학계는 제작지가 고구려이며, 장수왕 3년에 광개토왕을 제사지내고 이를 기념해 만들었을 것으로 본다. 이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해설이나 해석이다.

하지만 이 유물을 근거로 제시되는 다음과 같은 설명문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다.

"이는 당시 고구려와 신라 간의 교섭이 실제적으로 매우 활발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신라 내물왕 이후 고구려군의 신라 영토 진주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는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비약이다. 고구려에서 제작됐을 것임이 유력한 유물이 신라 무덤에 부장됐다고 그 유물이 고구려 군사가 신라 영토에 진주했던 사실을 입증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설명이 성립하려면, 호우총이 만들어진 무렵에 고구려군이 신라영토에 진주해 있어야 하고, 그 진주 고구려군 중 누군가가 이 청동호우를 지니고 있어야 하며, 그렇게 소유된 청동호우가 경주로 유입되어 신라사람(아마도 호우총에 묻힌 주인공)에게 전달되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중 어느 것도 확인할 길이 없다. 물론 확실한 물증이 없다 해서 추정까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추정조차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간접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청동호우가 내물왕 무렵 고구려군사의 신라영토 진주 사실을 입증하는 유물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이미 역사학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점성학이라 불러야 하며, 그런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은 역사학자가 아니라 점성자 수준이다.

그런데 역사학의 영역을 박차고 이미 점성학 단계에 접어든 이런 주장은 중국측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항하겠다며 출범한 고구려연구재단(http://www.koguryo.re.kr)이 '디지털자료실' 중 '고구려' 코너에서 국민을 상대로 홍보하고 있는 내용에 버젓이 포함돼 있다.

공자가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다(논어 위정편)"고 했던 것처럼 모르는 것은 모른다는 하는 것이 진정한 학문의 자세가 아닐까 한다.

모르는 영역을 상상력을 동원해 직접적인 증거는 물론이고 간접적인 증거조차 뒷받침되지 않는 주장으로써 마치 아는양 포장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 유물이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을 웅변하는 증거라는 다수의 견해도 근거가 전혀 없는 주장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문물이 반드시 힘의 역학 관계에 따라 문물 또한 영향을 가하는 쪽에서 받는 쪽으로 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고구려사가 자국사라고 '왜곡'하며 강변하는 중국을 향해 대항할 수 있는 도덕적 정당성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만큼은 적어도 '왜곡'에서 깨끗하거나 상대적으로 훨씬 자유로워야 한다.

집안 단속도 하지 못하면서 도둑 잡겠다고 나선다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연합뉴스 / 김태식 기자 2005-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