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비보다 150년 앞선 ''고구려벽비''

3세기대 고구려사를 보완할 수 있는 벽비(壁碑·너비 30cm)가 공개됐다. 특히 점토판에 290여자에 이르는 명문을 적고 있는 이 벽비가 진품이라면 광개토왕비가 세워진 414년보다 약 150년이 앞서는 데다 당시 북위와 고구려의 관계라든가 고구려 정치사회사를 보충해 주는 내용이 많아 진위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 벽비는 1930년대 평양 인근에서 출토된 것을 개인이 소장해온 유물로, 14일부터 10월29일까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한국토지공사 분당사옥 내 박물관에서 전시된다.

이 벽비에 동천왕 11년(237년)에 제작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벽비에는 고구려와 위나라 관계뿐 아니라 동천왕 사후 관구검이 침입하는 사건 배경과 전쟁의 추이를 이해할 수 있는 구체적 자료를 제공하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그러나 벽비 명문에 고구려 이체자(異體字)나 이두와 같은 요소가 보여 논란의 여지가 있다. 광개토왕비에도 확연하지 않은 이두적 요소가 그보다 150년 전 문자 전통에서 나타날 수 있는지가 의아스럽다는 것이다.

(세계일보 / 정성수 기자 2005-4-12)

현존 最古비 추정 고구려 벽비 공개

광개토대왕릉비(414년) 보다 이른 연대의 고구려 시대 명문(銘文)이 담긴 ‘벽비(壁碑·벽에 걸 수 있도록 구멍이 뚫려있는 비석)’를 경기 분당 신도시 한국토지공사 산하 토지박물관이 11일 공개했다.

이 벽비가 고구려 시대에 제작된 진품으로 확인될 경우 현존 최고비의 기록이 바뀌게 된다.

박물관 측은 점토판에 290여 글자가 새겨진 이 벽비에는 ‘동천왕 십일년(東川王 十一年)’이란 대목이 있어 이 때(237년)를 전후한 역사적 내용을 기술한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사 연구에 획기적 자료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벽비의 명문은 고구려식 한문법으로 쓰여져 있어 아직까지 전문가들이 해석해내지 못하고 있다. 또 일부 전문가들은 유물의 출처가 불확실하고 글자체나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며 진품으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동아일보 /이철희 기자 2005-4-12)

 

3세기 고구려 동천왕때 벽비 공개…국내 最古 금석문 추정

광개토대왕비(414년)보다 150년 가량 앞서 가장 오래된 고구려 명문(銘文)으로 보이는 국보급 유물이 공개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은 11일 공사창립 30주년기념 특별전시회(14일~10월29일)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고구려 동천왕(재위기간 227~248년) 사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벽비(壁碑ㆍ무덤 내부 벽에 부착한 묘비)를 입수했다고 밝혔다.

벽비는 점토판에 무덤 주인공이 위(魏) 관구검(毌丘儉)의 침입 당시 세운 공훈 등 역사적 사실을 총 290여자로 새겨, 중국 사료들보다 더 풍부한 역사자료를 제공하고 있다고 박물관 측은 밝혔다. 이 벽비는 1930년대 평양에서 출토돼 한 집안에서 대대로 소장해온 것이라고 박물관측은 덧붙였다.

벽비의 명문은 고구려와 위와의 관계, 특히 위 관구검의 고구려 침입을 전후한 시기의 미묘한 동북아 정세를 추정케 하는 귀중한 단서들을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東主高麗 東川王 十一… 王詔 峴晛宮 三太邑長 入漢魏 步騎二百回都’는 ‘동천왕 11년…왕이 현현궁(태자나 궁의 이름)과(또는 으로) 삼태읍장(당시 고구려의 직위)을 불러 말하기를 위나라로 기병 200을 들여보냈으니 도읍을 잘 돌아보고…’등이다.

명문에는 고구려의 이체자(異體字)나 이두 형태로 표기된 고유명사 등이 다수 포함된 데다 전후 맥락도 규명해야 할 대목이 많아 정확히 전체 의미를 파악할 수 없으나, 해독 작업이 완료될 경우 고대 동아시아 관계사와 고구려 문화사 등을 새로 써야 할 정도의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또 이 벽비가 진품으로 판명되면 고구려 백제 신라를 통틀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금석문 자료가 된다.

박물관측은 고대사 및 고고학, 한학, 서예학 등 분야별 전문가 20여명에 자문, 진품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물관 심광주 실장은 “호주 울롱공 대학에 열형광분석을 의뢰, 제작시기가 780±90년이라는 결과를 얻었다”며 “이 분석기법은 유물이 빛에 노출되면 연대가 크게 낮아지는 특성이 있어 실제 제작시기는 훨씬 거슬러 올라가는 만큼 최소한 이 유물이 위조품일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노태돈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유물의 내용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가치를 판단하기 이전에 진위 판정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면서 “진품으로 확인될 경우 한국 고대사 학계 전체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 만한 유물”이라고 말했다.

(한국일보 / 남경욱 기자 2005-4-12)

한국토지공사 창립 30주년 기념 특별전

한국토지공사 설립 30주년 기념 특별전 출품작

진위논란 동천왕(東川王) 벽비(壁碑) 공개

진품이면 한국고대사, 특히 고구려사는 '빅뱅'이다. 하지만 아직은 꺼림칙한 구석이 많다.

그래서 무척 조심스러우나 한국토지공사(사장 김재현) 창립 3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에 주최자인 그 산하 박물관은 공개를 결정했다. 그렇다고 주최측이 이들 유물을 진품으로 감정해 준 것은 아니다.

그보다 이번 기회에 이러한 유물들이 있고, 그 내용은 이러하니, 이를 계기로 진위논란을 비롯한 논쟁적인 측면을 공론의 장에 부치겠다는 의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도대체 어떤 유물들이 공개되기에 그럴까?

토지박물관이 14일 개막해 10월 29일까지 장기간 개최하는 기념특별전은 '생명의 땅, 역사의 땅-개발과 문화유산의 보존'으로 잡았다. 이 행사를 토지공사가 마련한 의도는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국토개발과 문화유산 보존이 그렇게 상치되는 것만은 아니다."

토지공사 김재현 사장은 "한 때는 개발이 무분별한 파괴를 의미하기도 했으나 이제는 자연환경과 전통문화가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개념의 개발방향이 제시되고 있다"면서 문화유산과 함께 가는 개발이라는 비전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자리에는 토지공사 사업지구 출토유물 300여 점을 비롯해 개인소장품도 일부 대여전시된다. 그중에는 2004년 토지박물관이 북한과 공동으로 실시한 개성공단 발굴품 100여 점도 아울러 선보인다.

이 대여전시품 목록에 문제의 '물건'들이 들어 있다. '동천왕(東川王) 11년 명 벽비(壁碑)'(너비 30cm), 도기로 만든 베개인 '도침'(陶枕)과 인물상인 '도용'(陶俑), 그리고 인장(도장) 등이 그것이다. 이들 유물에는 진품일 경우 고대사를 한바탕 헤집어 놓을 만한 명문이 확인된다.

몇 달 전 이들 유물과 명문을 사진 등으로 살펴본 기자로서는 의심나는 구석이 더러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들 유물의 소장가는 이 외에 '이상한' 유물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그중 일부는 고구려연구회 학술대회 등을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

어떻든 '동천왕 벽비'라는 유물은 여기 적힌 명문 내용에 벽비라는 문구와 동천왕 11년에 제작했다는 내용이 나오는 데다 그 형식이 벽에 부착하도록 구멍이 뚫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이 벽비는 점토판에 약 290여 자에 이르는 명문을 적고 있는데 진품이라면 광개토왕비보다 약 150년이 앞서는 데다 당시 북위와 고구려의 관계라든가 고구려 정치사회사를 보충하거나 새로 알려주는 내용이 많아 그 여파는 자못 클 것이다.

이 벽비에는 "魏 明帝 靑龍 癸丑 二年 東主高麗 東川王 十一年"이라고 해서 작성 시점을 서기 237년임을 표시하고자 했다. 동천왕(東川王)은 삼국사기 등의 기록을 참조하면 죽은 뒤에 그 후손과 신하들이 올리는 일종의 묘호(墓號)나 시호(諡號)일 가능성이 큰데 의문이 없지 않다.

벽비 명문에는 고구려 이체자(異體字)나 이두와 같은 요소도 보이고 있는데, 광개토왕비에도 확연하지 않은 이두적 요소가 그보다 150년 전 문자 전통에서 나타날 수 있는지도 의아스런 대목이다.

이 외에도 '晉 永和 乙巳年'(서기 345년)이라는 연대와 '大兄'(대형) 등의 고구려 관직을 새긴 도용과 '晉 高麗國騎武正郡忠南丁巳三月'이라는 명문 14글자를 새긴 도침(길이 30cm)도 전시물에 들어가 있다.

식민지시대 개성군 중서면 공민왕릉에서 출토됐다고 전하는 금제용두화형(金製龍頭花形) 잔(높이 2.6cm)도 주목을 요한다.

(연합뉴스 / 김태식 기자 2005-4-11) 

고구려 무덤 壁碑 의미와 파장

'동북공정' 막을 사료 될수도
"당시 역사·국제관계 공백 매울 귀중한 자료"
동천왕 20년 魏 관구검 침입때
무덤주인 전공기록위해 만든듯
서체·서법 특징 진품 가능성 커

명문이 새겨진 고구려의 도용(345년)

11일 공개된 고구려 벽비(壁碑)가 진품임이 공인될 경우 우리 고대사의 공백을 메워줄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벽비에 나타난 3세기 동천왕 대의 기록은 삼국사기 등에도 아주 간략하게만 기록되어 있고, 그나마 알려진 부분도 상당부분 중국측 사료에 의존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 벽비 명문의 해석이 완전히 이뤄지면 동천왕 20년 고구려가 위(魏)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의 침입을 막아내 강토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던 역사와 당시의 국제관계 등을 분명히 밝힐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내용으로 미뤄 이 벽비는 ‘도지질공(刀之叱公)’으로 읽힐 수 있는 무덤의 주인공이 전란 당시 세운 공훈을 기록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이 비에서는 광개토대왕비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던 고구려 건국자로서의 추모왕(鄒牟王ㆍ주몽)에 대한 인식도 엿볼 수 있으며, 관구검의 기공비(紀功碑)에 등장하는 졸본(卒本), 부내성(不耐城), 위나암성(尉那巖城) 등의 당대 지명들도 새겨져 있다.

이외에도 명문은 고구려의 이체자(異體字)나 이두, 고유명칭 등 3세기 당시의 귀중한 문자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한 마디로 우리 고고학과 사학계의 연구지평을 획기적으로 넓히는 엄청난 가치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진품 여부가 더욱 중요해진다. 토지박물관측이 진품으로 확신하는 근거는 열형광분석(TR Dating) 등 과학적 실험자료 외에도 여럿이다.

특히 명문의 서체나 서법이 요즘 흉내낼 수 없는 고대의 것이라는 점이다. 판독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손환일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서예사) 교수는 “벽비에 사용된 서체나 서법에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시대나 광개토왕비에 나타나는 특징들이 보인다”며 “벽비가 발굴된 1930년대든 지금이든 이러한 문장과 글씨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단언했다.



예를 들어 한(漢)대의 목간에서 보이는 필법이 자주 사용되는데, 일백 백(百)자의 경우 요즘 필법으로는 한일(一)자를 쓴 후 점을 찍고 세로 획을 그은 후 기역자를 쓰고 한일을 두개 긋는다. 그러나 벽비에서는 ‘3’자처럼 오른 쪽 획을 먼저 쓴 후 니은자를 쓰고 가운데 획을 그었다.

해년(年)의 세로 획을 왼쪽으로 휘어서 끝낸 것, 궁 궁(宮)과 마루 종(宗)의 갓머리를 둥글게 쓴 것 등은 모두 중국 고대의 필법으로 현대에서는 쓰이지 않는 필법이다. 또 광개토왕비에 쓰인 것과 같은 형태의 글자도 여럿이다.

도읍도(都)의 우부 방을 입구(口)자 2개로 표현한 것, 외성 곽(郭)의 우부 방을 도읍 읍(邑)자로 표현한 것, 뜻 의(意)자의 위쪽을 작게 아래쪽을 크게 한 ‘상소하대’형의 결구법 등이 그것이다.

현재 글자체와 현저히 다른 바람 풍(風)이나, 형상 형(形)을 우물 정(井)과 석삼(三)자로 표현한 것, 전할 전(傳)의 왼쪽 획을 두인 변으로 쓴 것 등은 이 벽비가 제작될 무렵인 중국 위진남북조시대의 필체이다. 당길 인(引)의 오른쪽 획을 칼도(刀)로 쓴 것 같이 중국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고구려만의 독특한 글자도 있다.

현대 중국에서 쓰는 간체자(簡體字)가 등장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손 교수는 “간체자는 현대에 만든 것도 있으나 90%이상을 고대 중국, 특히 위진남북조 시대에 쓰던 글자를 본떠 만들었기 때문에 이를 위작의 근거로 들 수 없다”고 반박했다.

손 교수는 “서체만으로도 진품이 아니라고 말할 이유가 전혀 없다”며 “이 벽비는 지금까지 가장 오랜 고구려 명문이 발견된 덕흥?고분보다도 앞선다”고 말했다.

벽비의 제작기법도 진품 주장을 뒷받침한다. 낙랑시대 유물을 전공한 도쿄(東京)대의 정인성 박사는 “니질 대토에 ‘셔드’라는 물질이 혼입되어 있고, 점토띠로 판을 성형한 점이나 벽비의 못을 박기 위해 구멍을 뚫은 점 등이 고대유물에서 발견되는 방식 그대로”라고 밝혔다.

반면, 서울대 노태돈(국사학) 교수는 “진품일 경우 국내 금엔옥이 제일 오래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면서 “그러나 문제점이 없을 수 없기 때문에 가치를 논하기에 앞서 진품 단정에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이 박물관의 심광주 실장은 “최근 중국이 동북공정을 진행하면서 만주의 고구려 유적에서 수많은 명문들이 나왔다는 소문이 있으나 정작 공식보고서에는 단 한 줄도 기록하지 않았다”면서 “광개토왕비라는 거대한 금석문을 남긴 慈막졀?그보다 앞선 시기에 수많은 명문을 남겼으리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 벽비를 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 토지박물관 특별전에는 이 벽비 외에도 고구려 도용(陶俑·345년), 베개인 도침(陶枕ㆍ270년), 인장 등 광개토왕비보다 이른 시기의 고구려 명문이 새겨진 유물이 다수 나온다. 고려 공민왕릉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순금잔과 고려의 범종, 청동9층탑 등 금속공예품들도 전시된다.

(한국일보 / 남경욱 기자 2005-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