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반일시위에 '네티즌 파워'

주최단체도 없이 순식간에 수만명 모여
인터넷이 민주화 시위 수단 될까 촉각

베이징(北京)의 한 외국계 회사에서 일하는 차오신(曹欣·24)씨는 9일 오전 8시쯤 친구로부터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오늘 오전 8시 반, 일본제품 불매운동 개최. 중관춘(中關村) 하이룽(海龍)빌딩 앞 광장’. 메시지를 받고 집회에 참석한 차오씨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말했다.

9일 오전 베이징 중관춘에 1989년 천안문사태와 1999년 유고 주재 중국대사관 피폭 이후 최대 인파라는 1만명 이상이 모인 대규모 반일시위는 이렇게 시작됐다. 천안문사태 때는 베이징대생 등 주동자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드러난 주동자도 없었고 모임을 알리는 대자보 등도 없었다. 대신 신랑(新浪·sina.com.cn), 써우후(搜狐·www.sohu.com) 등의 인터넷 사이트가 집회 사실을 전 중국으로 전파했다. 이메일,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도 집회 사실을 알렸고, 순식간에 1만명이 넘는 군중이 집결했다.

시위는 불과 하루 만에 베이징에서 1500㎞ 이상 떨어진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와 선전(深?)으로 확산됐다. “오전 10시 톈허체육관서 반일·일제 불매운동 시작. 플래카드와 전단 준비 완료. 붉은색 상의·머리띠를 준비. 경찰은 이 활동을 묵인했음. 과격한 행동은 용납되지 않음” 이런 지침이 ‘애국지원자(愛國志願者)’ 등 동호회 성격의 민간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왔고, 금세 수천명이 집회장소로 몰려들었다.

9일과 10일 중국에서 연이어 벌어지고 있는 반일시위는 그동안 중국에서 일어난 몇 차례 시위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주동자들이 시위를 촉발시켜 대자보를 통해 확산시켰던 과거 시위와 달리, 인터넷·이메일·휴대전화 메시지로 시위군중을 대규모로 동원해 수만, 수십만명의 동시다발 시위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작년 말 중국의 인터넷 사용 인구는 9400만명이었던 것이 올해는 1억2000만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지난 2월 말 기준 휴대전화 가입자는 3억4407만명이고, 작년 한 해 중국인이 발송한 문자 메시지는 100억통이 넘었다. 급속한 인터넷망과 이메일, 휴대전화의 보급으로 대규모 군중시위가 언제든지 가능하게 됐고, 이런 군중시위 동원시스템이 정치적 민주화나 자유화 요구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인터넷망의 위력은 2003년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때 이미 유감없이 발휘됐다. 정부의 사스 은폐 시도가 시민들의 광범위한 문자 메시지 전송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물론 지금 당장 인터넷망이나 문자 메시지 등에 의한 반정부 시위나 정치적 민주화나 자유화 요구 시위가 조직되기는 어렵다. 중국 정부가 인터넷과 휴대전화의 ‘탈(脫)통제’ ‘자유 소통’의 위험성을 인지, 대형 포털 사이트에는 예외 없이 당국의 정보 검열요원을 파견하는 등 통제체제를 갖춰놓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작년부터 문자 메시지 검열도 시작했다.

하지만 60만개가 넘는 중국 내 웹사이트와 연간 100억통이 넘는 문자 메시지를 중국 당국이 완벽하게 통제하기란 불가능하다. 홍콩 침회대 정치학과의 팅와이(丁偉) 교수는 “일부 네티즌들은 중국 공산당에 비판적인 의견까지 내놓고 있다”며 “앞으로 인터넷이 중국인들의 정치 의식을 성숙시키고 정치적 요구를 표출해 관철하는 중요 통로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홍콩 =송의달 특파원, 베이징=조중식 특파원

(조선일보 2005-4-11)

일 언론 "중국정부 묵인이 시위 초래"

일본 정부가 사죄와 피해보상을 요구했지만, 일본 언론들은 중국 정부 묵인 때문에 시위가 더욱 과격해졌다고 보도했습니다.

도쿄 양윤석 특파원입니다.

<기자>

중립, 보수 등 평소 논조를 떠나 대부분의 일본 언론들은 중국 정부가 사실상 이번 사태를 방치했다고 지적했습니다.

흥분한 시위대를 무리하게 제지하면 분노가 오히려 중국 당국쪽으로 되돌아 올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제지할 의사가 없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마이니치는 일본 대사관 앞의 기동대는 방패를 들고 있을 뿐 움직이지 않아 시위대가 보기에는 투석까지 허용한 걸로 보였을지 모른다고 보도했습니다.

아사히는 현재 중국은 수입격차가 크고 부패 등 불공정,불공평에 대한 불만이 높아 어떤 계기를 통해 공산당이나 정부에 충돌할지 모른다고 당국이 염려해 왔다고 보도했습니다.

이런 점 때문에 기존의 관제 시위와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지만, 이번 시위에 대해서는 중국 정부가 통제를 잃은 측면도 있다고 일본 언론들은 보도했습니다.

도쿄신문은 시위 주최 단체가 시위 경로 등을 중국 당국과 사전에 협의했지만, 불특정 다수가 참가하면서 일부 군중이 폭도화했다고 전했습니다.

이 신문은 휴대전화나 인터넷 낙서사이트에서 시위 정보가 확산되면서 동원하지 않은 젊은이들이나 사회에 불만을 가진 실업 노동자가 다수 합류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조선일보 2005-4-11)

中인민들 "당신, 한국인이냐 일본인이냐"

3만명 이상이 참가한 대규모 반일 시위가 지난 주말 중국 베이징과 광저우, 선전 등에서 연이어 발생했다. 1999년 반미집회 이후 중국내 집회로는 최대 규모의 이번 시위로 일본 대사관 유리창이 파괴되고 일본인 2명이 부상을 당하자 일본 정부는 강력 항의하고 나섰다. 중국 정부는 이에 유감을 표명하면서도 “자발적 집회”라고 일축, 일본을 당혹케 했다.
  
이같은 중국민중의 반일 시위는 일제불매운동의 역사적 시발점인 '5.4운동'이 일어난 내달 4일 정점에 달할 것으로 전망돼 귀추가 주목된다.
  
中 베이징 대규모 반일 시위, 1999년 이후 최대 집회
  
<요미우리신문>등 외신에 따르면 지난 9일 중국의 대규모 반일시위가 베이징에서 발생한 데 이어 10일에도 광저우와 선전에서 벌어져 반일 시위가 중국 전역으로 들불처럼 확산되는 양상을 띠고 있다.
  
우선 9일 오전 베이징 하이뎬구 중관춘 거리에 모인 1만명 규모의 반일 시위대는 일본의 왜곡 교과서 문제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 반대 등을 외치며 베이징 도심을 행진하기 시작했다. 가두의 시민이나 버스 등을 타고 있던 시민들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행진하던 시위대는 행진 도중 일본 은행 지점과 일본 음식점의 유리창을 부수기도 했다.
  
이들 시위대는 오후 2시경 일단 해산했다가 재집결해 "타도 일본" 등의 구호를 외치며 일본 대사관으로 향했다. 시위대 가운데 수천명은 무장 경찰들이 포진해 있는 저지선을 쉽게 넘어 일본 대사관과 일본 대사 공저로 몰려들었으며, 이들은 대사관을 향해 직경 15cm 이상의 콘크리트 조각과 벽돌, 패트병, 계란, 토마토 등을 던져 일본대사관 직원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일본대사관측에 따르면, 이 과정에 대사관 수위실 창은 완전히 파괴됐고 3층 건물 유리창 20여장이 파괴됐다. 아울러 대사 공저 근처에서는 저녁 늦게까지 시위대와 무장경찰들의 대치가 이어졌으며 그 근처에서는 일본제로 보이는 차량이 뒤집혀지기도 했다.
  
이날 대규모 집회는 베이징 시내 중심부를 동서로 횡단하는 대로변에서도 이어져 이날 베이징 시내 교통은 일대 혼잡을 빚었다.
  
일본 언론들은 특히 “베이징에서의 이같은 대규모 반일 시위는 1972년 중-일 국교 정상화 이래 최초”라고 강조했으며, AP 통신은 “1999년 이후 베이징에서 벌어진 시위 가운데 최대 규모”라고 보도했다. 1999년 코소보 사태 때 미군 전투기가 중국 대사관을 오폭해 중국 전역이 들끓은 바 있다.
  
반일시위 전국 확산, 일본 제품 불매 및 상임이사국 진출 반대 목소리
  
반일 시위는 일요일인 10일에는 규모가 3만명으로 더욱 불어나 중국 각지에서 벌어졌다.
  
광저우에서는 10일 오전 약 3천명의 시위대가 일본 총영사관이 있는 호텔앞에 집결해 일본 제품 보이콧 등의 구호를 외치며 패트병이나 돌, 계란 등을 던져 호텔내 일본 음식점 유리창이 깨졌다. 당시 중국 무장 경찰 1천여명이 경비를 서고 있었으나 이들의 투석 행위를 적극 막지는 않았으며 일부 시위대의 호텔 진입 시도만을 저지했다.
  
2만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오후에는 시내 일본계 유통센터로 이동해 일본계 기업의 옥외 광고 간판에 돌을 던져 파괴했다. 이들 시위대는 아울러 일장기를 불태우고 일본 제품 화형식까지 진행하기도 했다. 이들은 "일제불매운동을 통해 일본경제를 붕괴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전에서도 10일 아침부터 시내 중심부 체육관에 약 3백명이 모여 반일 구호를 외치면서 행진을 시작했다. 시위대는 길가 시민들도 참여하기 시작해 선전 시내 일본계 소고백화점 앞에 이르렀을 때는 그 규모가 1만명에 달했다. 이들은 백화점 입구 유리문을 부쉈으며 광장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일본 음식점 등에도 돌을 던졌다. 광저우와 선전에서의 집회는 이날 밤까지 이어져 시위대는 늦게서야 흩어졌다.
  
"한국인이냐 일본인이냐", 일본인 유학생 2명 부상
  
상하이 일본 총영사관에 따르면, 상하이에서는 9일 밤 일본인 유학생 2명이 중국인들로부터 폭행을 당하는 사건도 발생해 중국내 반일 시위로 인한 첫 번째 일본인 부상자로 기록됐다.
  
이들 일본인 2명은 다른 일본인 2명 및 현지 유학생 수십명과 함께 상하이 시내 음식점에 들어갔으나 음식점안에 있던 중국인들은 이들 유학생 가운데 몇 명을 불러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를 확인했다. 그 과정에서 이들 일본인 1명이 “일본인”이라고 답하자, 그 순간 맥주병 따개와 재떨이 등이 날아와 일본인 유학생 2명 머리에 가벼운 부상을 입혔다.
  
상하이에서는 이밖에 일본 총영사 공저 앞에 있는 게시판 유리가 깨어지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중국 서부 쓰촨성 청두에서도 반일 시위가 벌어져 일본계 슈퍼 앞에서 항의 시위가 열렸으며 이에 일시 영업이 중단되기도 했다. 청두에서는 지난 2일 비슷한 시위가 벌어져 슈퍼 유리창이 깨지는 피해를 당했었다.
  
日 “매우 유감” 강력 항의, 中 “중국에겐 책임없다"
  
중국내 반일시위가 그 강도를 더해가자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중국 정부에 강력한 항의 의사를 전달했다.
  
마치무라 노부다카 일본 외상은 10일 왕이 주일중국대사를 외무성으로 불러 “일련의 파괴활동은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강력 항의했다. 마치무라 외상은 이어 “중국 정부는 파괴 활동을 제지하지 않았으며 필요한 경호를 하지 않았다”면서 공식적인 사과와 피해 배상, 재발방지, 그리고 일본인과 일본 기업의 안전 확보 등을 요구했다.
  
일본정부는 그동안 '텐안먼 사태'의 재연을 우려해 중국정부가 대규모 반일시위를 허용하진 않을 것으로 낙관하다가, 주말 대규모 반일시위가 발발하자 크게 당혹해하는 분위기다.
  
왕이 대사는 이같은 일본 정부의 항의에 대해 “과격한 행동에 대해서는 중국 정부도 찬성하지 않으며 원하는 것이 아니다”고 유감의 뜻을 밝혔다. 그는 그러나 “관계 개선을 위한 대화 과정이 빨리 강화될 필요가 있다”면서 일본인과 일본 기업에 대한 철저한 보호를 약속하면서도 명확한 사과 의사는 표명하지 않았다.
  
진강(奏剛) 중국 외무부 부대변인은 여기서 한걸음 더나아가 10일 베이징에서의 대규모 반일 시위에 대해 논평을 통해 “이날 집회는 역사 문제에 있어서 최근 일본의 잘못된 태도와 행위에 불만을 품고 있는 베이징 시민들의 ‘자발적’인 시위였다”며 "오늘날과 같은 중-일 관계를 출현시킨 책임은 중국측에 없다"고 일본측 요구를 일축했다.
  
일본 '5.4운동 공포'에 시달려
  
일본측은 중국민중의 격노와 중국당국의 미온적 대처를 볼 때 중국의 반일시위가 앞으로 계속 증폭되다가 '5.4운동' 86주년이 되는 내달 4일에 정점에 달하지 않을까 크게 긴장하는 분위기다.
  
일본의 마이니치신문은 이와 관련, 10일 "9일부터 10일에 걸쳐 베이징으로부터 중국 각지로 확산된 중국의 반일항의 데모는 일본제품불매운동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며 "일제불매운동은 1919년의 '5.4운동'에서 전개된 것이 처음"이라며 반일시위가 5.4운동 기념일때까지 계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 신문은 "중국정부는 5.4운동을 '반제국주의운동'으로 공식인정하고 있어 데모가 파괴행위로 발전해도 정부가 미온적 태도를 보이는 배경이 되고 있다"며, 중국정부가 사실상 반일데모를 묵인하고 있는 게 아니냐고 분석했다.
  
미국의 지원만 믿고 영토분쟁과 역사왜곡을 자행한 일본이 스스로의 덫에 걸려든 양상이다.

(프레시안 / 김한규 기자 2005-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