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고슴도치론이 동북아 균형자론으로

2003년 6월 한.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입장을 조율하던 양측 실무진은 동북아 구도 인식 문제를 놓고 막판에 맞섰다. 일본은 '동북아의 한.미.일 3국 공조'를 천명하자고 했다. 한국은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이란 개념을 제시했다. 일본은 한국을 미.일 진영으로 끌어들이려 한 반면 우리는 '한.중.일 중심의 동북아 구도'를 강조한 것이다. 일본의 '3국 공조'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으로 공동성명(13일)에서 거론됐다. '동북아 평화와 번영'은 16일 기자회견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양국 협조 강화가 필요하다"는 방식으로 언급됐다. 노 대통령의 논리는 21개월 뒤인 지난 3월 22일 3군 사관학교 연설에서 '동북아 균형자론'으로 정리됐다.

"고슴도치가 돼야"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노 대통령의 균형자론엔 '과거 반성'과 '미래 고려'의 두 축이 결합돼 있다고 한다. 과거 반성의 핵심은 100년 전 대한제국의 실패를 반복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가 전한 노 대통령의 발언은 "100년 전 이 땅의 주인으로서 가치있는 존재가 되지 못했다. 일본은 우리 허가없이 만주로 진주했다. 다시 그럴 순 없다"는 것. '남을 공격하진 않아도 남이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는' 고슴도치와 같은 나라가 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집권 뒤 자주 거론한 '고슴도치론'이 동북아 균형자론과 연결된다는 설명이다.

"동북아는 큰 경제판"

미래를 위한 축은 동북아 경제판을 위한 전략이란 논리다. 한.중 교역규모는 연 1000억 달러, 한.미는 900억 달러다. 한.일간 교역도 이에 못지 않다. 미.일, 미.중 교류 등 상호 교차 교역을 합하면 동북아는 대규모 경제판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을 안정적으로 엮어내는 정치적 연계가 부족하다는 것이 노 대통령의 생각이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중국.북한과 한.미.일 사이의 안보 갈등은 경제적 의존관계를 위협한다.

한 정부 관계자는 "한.중.일 3국의 경제적 얽힘을 활용하면 협력 관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며 "노 대통령의 균형자론은 동북아의 안보와 경제 두 분야를 순기능적으로 연계시켜 나가자는 전략론"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또 "균형자론에는 전통적 세력균형론과 유기적인 구조 역할론이 섞여 있지만 '힘으로 균형을 강제한다'는 세력 균형론이 아니라 '역할로 상황을 만든다'는 역할론에 비중을 두고 있다"고 설명한다.

"한.미 동맹 약화 땐 중국이 우리를 무시"

이런 인식은 중국을 둘러싸고 한.미 간 갈등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미국은 미.일 동맹을 중심으로 한 대중국 포위망에 한국이 참여하길 바란다"며 "그러나 한.중 간 한해 교역이 1000억 달러에 달하는 지금 포위망에 들어가면 우리 경제가 살 길이 없다"고 말한다. 중립적 위치에 서려는 한국을 미국이 못마땅해 하는 것이 갈등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그러나 "한.미 동맹이 없으면 중국은 즉시 한국을 무시할 것임을 잘 알고 있다"며 "균형자론의 실천을 위해서도 한.미 동맹은 절실한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중시는 '미국과 동맹을 강화하면서 중국과의 관계도 넓힌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나 균형자론엔 아직 각론이 충분치 않다. '한.미 동맹을 중심으로 자주 국방력을 키운다' '동북아 갈등을 없애기 위해 국제사회가 동의하는 대의 속에서 문제를 제기한다'는 정도다.

(중앙일보 / 안성규 기자 2005-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