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레이 기고]일본의 역사왜곡을 말한다 ②고대史

지난 5일 문부과학성이 발표한 일본 교과서 검정 결과를 보면, 한국의 수정요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문제를 회피하는 데 급급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후소샤판 역사교과서의 국제관계면을 보면, 고대 일본은 7세기 이래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 있었지만, 삼국과 통일신라는 중국에 조공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종속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나라의 복속국이었던 신라는 독자적 율령을 갖지 못했고(신청본 42쪽), 대화개신 이후 중국과 다른 연호를 계속해서 사용한 나라는 동아시아에서 일본밖에 없었다(39쪽)고 자부한다.

그러나 신라의 율령에 골품제도 등 고유한 제도에 관한 규정이 분명히 들어 있었을 것이고, 신라 현실에 맞게 율령을 고쳐나간 사실은 ‘삼국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런 무단적인 서술을 할 수 있고, 검정 과정에서 아무런 조치가 없었는지 아연할 뿐이다.

중국에 대한 외교정책에서 한반도와 왜(倭)가 서로 달랐던 것은 한반도가 중국과 육지로 연결돼 있는 지정학적·군사적 조건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봐야 한다. 그리고 조공·책봉관계는 전근대 동아시아의 독특한 외교 형식인데, 조공을 하면 복속된 것이고 하지 않으면 독립국으로서 고유문화를 보존할 수 있다는 이분법 논리는 역사 인식의 빈곤성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대방군의 중심지가 서울 근처에 있었다(27쪽)는 내용도 전혀 바뀌지 않았다. 대방군의 치소를 서울 부근으로 보는 견해는 일부 중국 사료에 ‘백제 시조가 대방군의 옛 땅에서 건국했다’는 기록이 전하고, 서울의 풍납토성 등에서 출토된 중국계 유물을 근거로 하여 일본 학계에서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서울·경기 지역의 중국계 유물은 대방군의 것이 아니라 백제가 중국과 벌인 문물 교류의 흔적으로 보아야 한다. 소수설에 불과한 서울설을 채택한 필자들, 그리고 이를 내버려둔 검정위원들의 의도가 궁금하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됐던 ‘임나일본부’설에 관해서는 일부 표현을 바꾸거나 삭제하도록 했다.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의 지배를 인정받으려고” 중국에 조공했다(33쪽)는 표현을 “한반도 남부와 맺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라고 바꾸고, “가야에 거점을 두었다”는 부분을 삭제한 것이다. 그나마 한국 학계의 수정 요구를 부분적으로 반영했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일본 세력이 한반도에 진출하여 고구려와 맞섰고 이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물을 도입할 수 있었다는 왜곡된 해석은 그대로이다. 오히려 서술 분량이 늘어났으며, ‘광개토대왕릉비’, ‘송서’의 관련 사료를 제시하여 주장을 보강했다. 그런데 이 자료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능비의 신묘년 조는 일본의 활동을 과장하여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질적인 침략 세력인 왜군을 격퇴한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현양하기 위해서였다. ‘송서’의 기록도 왜 정권이 자칭한 것이어서 일본측의 외교 전략을 감안해야만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복합적인 텍스트를 무비판적으로 인용한다면, 독자들은 사료를 글자 그대로 믿고 잘못된 확신마저 가질 수 있다.

신청판의 고대사 서술은 이처럼 논리의 도식성과 한국사에 대한 편견, 부적절한 자료 이용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검정 과정에서도 제대로 정정하지 않은 채 통과시켰다.

일본의 앞날을 책임질 청소년들이 열린 마음으로 자국과 이웃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게 하려면 먼저 학부모와 교사들의 각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일본의 전문 역사학자들도 보다 합리적인 견해가 교과서에 반영될 수 있도록 적극 나서기를 촉구하고 싶다.

<김창석 / 강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경향신문 2005-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