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의 창] 흔들리는 아시아 공동체

말레이시아의 전 총리 마하티르 모하마드는 입담 좋기로 유명하다. 총리로 재직할 때 그는 중국과 일본을 두 마리 코끼리에 비유해 진한 농담을 한 적이 있었다. "중국과 일본이란 코끼리가 싸우면 아시아라는 들판은 박살이 날 것이다 . 그러나 두 마리가 서로 사랑을 나누면 같이 뒹굴다 더 박살이 날 것이다."

마하티르 말마따나 최근 중국과 일본의 패권주의 경쟁을 보면 아시아 미래가 순탄치 않아 보인다. 일본은 '유사법제'를 통해 재무장의 길로 접어들었고, 중국은 '반국가분열법'에 의해 대만에 대한 무력사용의 길을 열어 놓았다. 일본이 미국을 등에 업고 중국을 견제하려고 한다면, 중국은 러시아와 화해를 통해 일본을 구축하려고 한다.

북핵 문제로 막혀 있는 한반도에 미국과 일본이라는 기존 세력과 중국과 러시아라는 신흥 세력 사이에 대립각이 세워지고 있다. 다시금 100년 전 강국(强國 )정치의 소용돌이가 나타나고 있는 듯싶다.

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지역 중 하나다. 인구 규모, 공업생산, 무역 거래 등에서 여섯 대륙 중 단연 앞을 달린다. 총인구는 세계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공업생산량은 세계의 반 이상을 넘으며 무역거래량은 세계에서 제일 높다. 흥미롭게도 일본 중국 싱가포르 한국 대만이 지닌 외환보유액은 무려 2 조달러에 달한다.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지역인 셈이다.

그러나 이 국가들을 묶어주는 지역공동체가 없다. 아태경제협력체(APEC)라는 매우 느슨한 협의체가 있을 뿐이다. 북미의 미국 캐나다 멕시코를 위시해 동북아의 한국 중국 일본 그리고 동남아 국가 등 21개 나라가 회원이다.

APEC은 소(小)지역주의라 할 ASEAN과 NAFTA를 포함하면서 점진적인 통합을 추구하는 개방적 지역주의 성격을 갖는다. EU, NAFTA, MERCOSUR가 역외국가를 차별하는 것과 달리 APEC은 열려 있는 지역주의를 지향한다.

만약 APEC이 단단한 조직을 갖는 공동체로 나아간다면 그 정치ㆍ경제적 잠재력 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세계 주요 나라들이 APEC과 제휴를 모색하고 있는 이유도 아시아권과 결합해 정치ㆍ경제적 이득을 극대화하려는 데 있다. 미국은 APEC에 참여해 이미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EU는 아시아ㆍ유럽정상회의( ASEM)를 통해 미국에 대항하고 있다.

그러나 16년의 연륜을 지닌 APEC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지금까지 합의한 것에 비해 성과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요즘 한ㆍ중ㆍ일 사이의 역사갈등을 보면 아시아에서 지역공동체 미래는 더욱 요원해 보인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나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은 모두 두 나라의 팽창주의적 민족주의에 기인한다.

중국이 '중화경제권'에 대한 야심이나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고 단언하기 어려운 것이 아시아의 현실이다. 민족주의가 약화되는 탈( 脫)근대 시대에 동북아시아에 유독 국수적 민족주의에서 출발한 팽창주의 바람이 분다.

APEC의 공동체화는 경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정치적 차원에서도 필요하다. 한ㆍ 중ㆍ일 사이의 과도한 국가 경쟁을 조정할 수 있는 역할을 미래의 APEC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에는 식민지 시대의 과거 청산이 아직 끝나지 않은 채 역사적 앙금이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전후 미국 헤게모니에 의한 아시아 지배는 독자적 지역 공동체 출현을 더디게 해왔다.

국가주의적 전통이 강한 곳이 또한 아시아다. EU와 같은 완전통합체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EU와 같은 완전통합체는 아니더라도 협력과 공존을 위한 공동체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팽창적 민족주의 분출에 따른 국가 경쟁을 막아줄 수 있는 기능을 지역공동체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11월에 부산에서 개최될 APEC 정상회의에 거는 기대가 크다. 한국이 의장국이다. 우리가 주도해 가시적인 성과를 담보할 수 있는 '부산선언'을 끌어내야 한다. 경제 외교 안보 환경에 관한 비전과 실천 프로그램을 내보일 필요가 있다.

한국은 지난날 식민주의 희생자로서 오늘의 팽창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보편적 발전의 청사진을 제시할 소명과 역량이 있다.

[임현진 서울대 기초교육원장ㆍ사회학과 교수]

(매일경제 2005-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