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韓-中학자 美서 ‘고구려史’ 또 격돌

5일 미국 하버드대 패컬티 클럽에서 고구려사 관련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다.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해 한중간 마찰이 빚어진 이후 서구권에서 한중 양국 학자들을 초청해 학술회의를 갖기는 처음이다.

한중 양국 외에도 일본 미국 호주 프랑스 학자 등 16명이 참가한 이번 학술회의는 7일까지 계속된다. 북한에도 초청장을 보냈으나 북한 당국이 허가하지 않아 이번에는 참가하지 못했다고 대회를 주관한 하버드대 한국학 연구소의 마크 바잉턴 박사가 밝혔다.

회의에서 고구려사 귀속문제를 둘러싼 한중간의 열띤 토론이 기대됐으나 참가자들은 학술 심포지엄의 성격에 맞춰 조심스러운 접근 태도를 보였다.

주제발표자인 서길수 교수(서경대)는 “한국측으로선 그동안 외국학자들에게 ‘고구려사는 한국사’라고 새삼스럽게 말할 이유가 없었지만 중국의 동북공정 이후 이를 밝혀둘 필요가 있어 7명의 학자가 참가했다”고 말했다.

중국에선 고고학자 3명만 참가했다. 이들은 첫날 문답 때 고구려사 귀속보다는 유적 문제에 집중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동북공정에 참여하고 있는 웨이 춘쳉 교수(중국 지린대)는 6일 발표할 ‘중국 내의 고구려 고고학’ 논문에 고구려가 중국 지방정권이었다는 내용을 포함시켜놓고 있다.

그는 종전의 주장대로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뒤 설치한 한사군 가운데 하나인 현도군 땅에서 고구려가 생겨났고 △중국 중원왕조와 고구려 간에 책봉·조공 관계가 있었다는 점 등을 논거로 들고 있다.

서길수 교수는 이에 대해 “고구려 왕조 705년간 중국에는 시대별로 한, 수, 당나라를 포함해 35개 국가가 있었는데 그렇다면 고구려가 중국 어느 나라의 지방정권이었느냐고 의문을 제기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하버드대 바잉턴 박사는 첫날 주제발표를 통해 “현도군과 고구려에 대해선 한(漢) 왕조가 고구려 지도층의 지배권을 인정한 대신 고구려가 공물과 노역을 바쳤다는 점에서 일종의 조공관계였다”면서 “그러나 고구려는 이 관계가 만족스럽지 않게 되자 무력으로 단절했다”고 지적해 중국측의 논거를 흔드는 견해를 폈다.

(동아일보 / 홍권희 특파원 2005-4-6)

“발해인 스스로 고구려 계승국 인정”

중국의 동북공정이 중국사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한 뒤 국내외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고구려 역사에 관한 대규모 국제 학술회의가 5일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열렸다.

한국, 중국, 미국, 일본 등 6개국 16명의 전문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7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회의에서는 고구려의 기원과 발전과정, 국제정세, 고구려 고분의 구조와 미술 등 8개 분과로 나눠 주제발표와 토론이 진행됐다.

첫날 ‘역사와 역사문헌’ 분과에서 ‘고구려의 계승으로서의 발해’라는 주제발표를 한 송기호 서울대 교수는 “발해사의 정체성을 추적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발해인의 자의식”이라며 “문헌자료를 볼 때 발해 지배층은 건국 때부터 멸망 후까지도 지속적으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생각해왔다.”고 밝혔다. 송교수는 또 “당시 신라, 당나라, 일본 등 주변국들은 발해가 기본적으로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송교수는 “전체적으로 볼 때 발해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고구려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일부 나타나는 말갈 요소만 강조해 발해를 말갈계 국가로 규정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역사·고고학적 관점에서 고구려의 기원’분과에서 ‘한의 현도군과 고구려 국가형성’에 관해 주제발표를 한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의 마크 바잉턴 박사는 “한사군 가운데 하나인 현도군과 고구려는 (중국의) 한 왕조가 고구려 지도층의 지배권을 인정해주는 대신 고구려가 공물과 노역을 바친다는 점에서 일종의 조공관계였다.”고 분석했다. 바잉턴 박사는 그러나 “이런 관계는 고구려 사회가 중국의 영향으로부터 독립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했으며 고구려 자체의 탄생에 기여했다.”고 지적했다.

한국국제교류재단과 코리아소사이어티, 하버드대 옌칭연구소·아시아센터, 라이샤워 일본학연구소, 페어뱅크 동아시아연구센터가 공동후원하는 이번 회의는 서구에서 열린 최초의 고구려사 관련 국제학술회의다.

(서울신문 2005-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