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소국 콤플렉스

역사상 처음 나라를 오랑캐에게 빼앗기는 치욕을 당한 일제강점 35년에 우리는 ‘약소국 콤플렉스’라는 마음의 병을 얻었다.

이제는 그것이 오랜 역사적 유산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체념하고 있다.

과거 7년 동안 한나라당과 과점신문들이 색깔시비를 일삼고, ‘주한미군 재배캄를 감축이나 철수로 둔갑시켜 세상을 불안하게 한 것도 뿌리깊은 약소국 콤플레스를 정략적으로 이용한 것이었다.

사실 우리는 역사상 세 차례 오랑캐에게 패배한 뼈아픈 기록을 남겼다.

첫 패배는 백제가 당(唐)나라 침공군과 4년 동안 혈전 끝에 패망(풍왕·豊王3년·663년)했고, 5년 뒤 고구려가 당나라 침공군과 싸우지도 않고 항복(보장왕·27년·668년)한 것이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군에 포위된 당나라 군대는 신라가 식량과 옷을 보급해 줘 위기를 모면했다.

백제로서는 이기고도 진 전쟁이었다.

두 번째 패배는 병자호란(1636∼1637년)에서였다.

청(淸)태종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12월9일(음력) 압록강을 건너 16일 남한산성을 포위, 이듬해 정월 30일 인조가 치욕의 항복을 했다.

세 번째 패배는 대한제국 말 일제의 강박으로 고종황제가 퇴위(1907)한 뒤 전국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지만, 나라가 일본오랑캐에게 넘어간 치욕이었다.

우리는 승리도 세 차례 기록했다.

첫째 고려는 세 차례 대요(大遼)라는 거란의 대군을 패퇴케 했다.

성종 12년(993년)에는 80만 대군을 싸우지도 않고 물리쳤고, 7년 뒤(1010년)에는 40만 대군이 개경(開京)을 유린했지만, 다시 8년뒤(1018년) 10만 대군을 격파해서 살아 돌아간 자가 불과 수천 명이었다.

유례 없는 몽골과 40년 전쟁

둘째 우리는 세계전쟁사에 보기 드문 큰 승리를 기록했다.

유라시아대륙을 석권한 몽골과 40년 동안(고종 18년·1231년∼원종11년·1270년) 싸움 끝에 대등한 혼인동맹형식으로 전쟁을 끝낸 것이었다.

셋째 우리는 16세기말 두 차례에 걸친 왜(倭)의 침공을 참패케 했다.

임진왜란(선조 25년·1592년)엔 15만, 정유재란(선조 30년·1597년)때엔 왜군 14만이 쳐들어왔다.

그러나 조선의 의병과 이순신의 수군(水軍)에 쫓기고 식량보급이 안돼 왜는 60%의 사상자를 낸 끝에 참패했다(2004년 3월10일자 ‘왜구 대 친일파’ 제하의 본란).결국 우리가 약소민족의 약소국이라는 콤플렉스는 근거 없는 패배주의적 마음의 병일 뿐이다.

물론 우리가 강대국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결코 약소국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세계에 유례 없는 40년 혈전 끝에 몽골의 무자비한 기마부대를 물리친 세계유일의 나라가 고려임을 기억하는 게 좋다.

한반도를 초점으로 전후 반세기 넘게 굳어져온 동북아의 국제역학구도를 뒤집어엎는 노무현대통령의 발언이 파문을 던지고 있다.

육군3사관학교 연설(22일)과 인터넷 ‘청와대 브리핑’에 올린 ‘국민여러분에게 드리는 글’(23일)에서 말한 한국의 국제적 역할 전망이 그것이다.

3사관학교 연설이 보다 포괄적인 국제적 역학구도를 말했다면, ‘국민에게 드리는 글’은 직설적으로 한·일 관계를 다뤘다.

그러나 두 관점 모두 한국의 국제적 역할 전망이어서 결국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탈3국 동맹론…그 꿈과 현실

노 대통령이 말한 한국의 새로운 위상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한·미·일 3각동맹의 틀을 벗어나 제3자적 입장에서 “캐스팅 보트를 행사한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보다 구체적으로 ‘동북아의 균형자’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한·미·일 3각동맹에 비판적인 노 대통령의 발언은 우선 국내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무모한 탈(脫)3각동맹론, 고립만 부른다”(김우상 연세대교수·24일자 조선일보)라거나, “국가원수가 어떻게 이웃우방에게 외교전쟁과 같은 말을 할 수 있나”(공노명 전 외무장관·25일자 조선일보)라는 비판은 지극히 보수적인 입장이다.

그 중에서도 “외교전쟁”론을 비판한 필자는 한·일 관계의 현실에 눈을 감고 교과서적 의전(儀典)만 따지고 있다.

일찍이 ‘왜구’라는 해적활동 외에는 동북아국제사회에 참여한 경험이 없는 일본에게 의전적 설득은 아무 의미가 없다.

대통령이 ‘외교전쟁’을 경고한 것은 너무 늦은 경고다.

적어도 수교 40년 동안의 경험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

“무모한 탈(脫)3각동맹론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의 ‘캐스팅 보트에 대한 꿈’은 약소국 콤플렉스청산을 말한 첫 의제설정이라는 의미가 있다.

아름다운 미래를 꿈꾼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다만 우리가 지금도 북방3각동맹과 냉전시대 연장선상에 살고있다는 현실을 잊지 않는다면, 꿈은 머지않아 현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미디어오늘 200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