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는 아편이다”

[인터뷰특강/ 21세기를 바꾸는 상상력 3]

박노자와 함께한 ‘새로운 동아시아를 만드는 상상력’… ‘한국’이라는 국가와 당신을 동일시하시나요?

3월23일 박노자 교수의 인터뷰 특강이 열렸다. 지난 몇주 동안 손꼽아 기다려온 이날, 회사에서 조금 일찍 나간다는 것이 급한 일 때문에 오히려 10여분 늦었다. 씩씩거리며 특강이 열리는 곳까지 한달음에 달려가보니 역시 강의는 시작됐다. 예상대로 350석 규모의 강당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눈을 부릅뜨고 청중 사이를 몇번이고 기웃거린 뒤에야 겨우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자리를 잡고 한숨을 돌리는 순간, 빠르고 째지는 듯한 고음의 우리말이 들려왔다. 박노자 교수였다. 지면을 벗어나 마주친 그의 모습은 오랜 펜팔 친구와 처음 만난 것 같은 떨림을 주었다.

마약 중독자들 정신 차리세요?

특강의 주제는 ‘민중의 동아시아를 위하여’였다. 한·중·일 동아시아 민중연대의 필요성과 연대 방안을 모색해보는 시간이었다. 그는 “아직도 동아시아인들이 한국, 북한, 중국, 일본이라는 국민적 커뮤니티에 배타적인 소속감을 느끼며 그 체제에 그대로 묶여 있는 관계로, 국경을 벗어나 같은 민중, 같은 노동자, 같은 인간으로서의 중국인이나 일본인을 만나지 못한다”고 말했다. 동아시아인들을 국가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는 “우리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과 일본과의 독도 문제를 중·일 일부 우경화 세력이나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으로 보지 않고 국민 전체의 생각으로 치부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또 “피지배층이 지배층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양상을 보인다”며 “동아시아는 지금 민족주의라는 마약에 취해 있다”고 동아시아의 현 상태를 진단했다. 동아시아 내셔널리즘, 민족주의가 우리 몸에 배어 있다고 보면 된다. <실미도>나 <공공의 적2> 같은 민족주의적 영상이 우리나라에서 높은 흥행 성적을 거두는 것과 우리 기업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는 중국·베트남 노동자들의 아픔에 아랑곳하지 않는 무관심이 현 상황을 잘 말해준다.

그는 짧은 강연 동안 “(민족주의) 마약을 끊고 민중이 살아나야 한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동아시아의 진보 지식인 집단이 앞장서 3국 네트워크를 통한 민중적 교류를 증대해 차별 없는 동아시아 민중의 역사를 만들자”고 말했다.

이어 김갑수씨의 사회로 진행된 질의 응답시간. 강연에 집중하고 있던 참석자들은 “마약 중독자들 정신 좀 차리고 자리 정돈하세요”라는 사회자의 말에 긴장을 풀고 웃음을 터뜨렸다.

1시간20여분 동안 사회자와 참석자들은 박노자 교수에게 12가지 질의를 쏟아냈다. 동아시아 민중의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와 박 교수 개인에 대한 물음에 대해 박 교수는 열정적인 손놀림과 하이톤의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진솔하게 풀어놓았다.

안성에서 올라온 첫 번째 질의자는 ‘민족주의와 관련해 인간의 불평등이 이루어지는 원인’에 대해 물었다. 박 교수는 “사람에게 내재돼 있는 폭력적인 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동료까지 죽일 수 있는 잔인함”을 원인으로 들고 “인간은 폭력에 대한 혐오감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 학기를 끝으로 백수가 될 거라는 학생은 “자본의 지배를 벗어나 국제적인 연대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를 물었다. 박 교수는 “자본통제는 비밀경찰이 나서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밀접한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지난해 수능 부정사건 조사에서 휴대폰 추적이 이용된 것에서 알 수 있듯 국가나 지배계층이 자본통제를 이용해 우리를 지배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통제가 완벽해지려고 할수록 벗어나고 싶은 민중의 반항도 커진다”며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반전시위 같은 자본에 의한 전쟁 반대 활동을 예로 들었다.

“만해 한용운은 그냥 인간이었다”

다음 질의자로 나선 여대생은 “민족주의 마약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은 박노자 교수를 존경하는데 박 교수가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인지”를 물었다. 박 교수는 “유교에서 말하는 측은지심, 즉 남을 보면 가슴 아프고 측은한 마음을 바탕으로 민족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존경하는 사람은 만해 한용운”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사회자 김갑수씨가 “만해 한용운이 민족주의자였는지 아니면 불교 사회주의자였는지를 말해달라”며 짓궂게 물어보자, 박 교수는 “제가 보기에는 그냥 인간이었다”고 응수해 참석자들의 박수를 받았다.

박노자 교수를 보게 되어 기쁘다며 러시아어로 자기 소개를 한 05학번 새내기 남학생은 박 교수의 북한관을 물었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북한은 수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북한 하면 김정일만 떠올린다”며 “북한을 흑백논리로 보지 말고 다양하게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남북한이 계속 교류하고 북한 지식인들이 국제적 교육을 받게 해 내부로부터 인권신장 등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는 토양 마련에 도움을 주자”고 덧붙였다.

마지막 질의자는 질의 기회를 놓치기 아쉬운 두 남학생의 ‘가위바위보’라는 치열한(?) 경쟁을 통해 뽑혔다. 이 학생은 북한 문제를 언급하며 “북한과 가까워지면 미국하고는 멀어지는 형국”이라며 “계속 미국을 멀리하고 북한을 감싸야 하는지, 아니면 미국과의 관계에 더 치중해야 하는지 헷갈린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우선 남북한이 감군과 군비 감축 등을 통해 화해 무드를 만들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미국은 자신의 정책기조에 따라 실체가 변하기 때문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답변을 했다.

이번 특강은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동아시아 민중에 대해 잠시나마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동아시아의 민족주의가 얼마나 심각하고 또 계급 갈등이 얼마나 심화돼가는지 그리고 나 자신이 얼마나 ‘민족주의’라는 마약에 길들여졌는지 되돌아볼 수 있었다. 밤 9시30분이 훌쩍 넘은 시각. ‘민족주의 마약’을 어떻게 끊느냐는 숙제 때문인지, 갑자기 쌀쌀해진 밤바람 때문인지, 강당을 빠져나가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무거워 보였다.

▣ 글 박정호/ 9기 독자편집위원
▣ 사진 박승화 기자

(한겨레21 2005-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