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랑의 東北亞]<上> 불안한 세력균형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치 지형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미국과 일본 간 동맹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고 수준의 결속을 보이면서 중국과의 사이에 미묘한 대치전선이 형성되고 있다. 중국과 일본은 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힘을 키우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첨예한 갈등은 한미일 공조의 틀에도 영향을 미칠 조짐이다. 동북아의 불안정성이 점점 커지는 바탕에는 각국에서 발흥하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이 내건 ‘할 말은 하는 자주 외교’ 노선은 미국 일본 중국과의 관계를 모두 불편한 긴장관계로 몰아가고 있다. 핵문제로 동북아 정세를 흔드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도 별다른 성과가 없다. 이대로 가다간 한국이 외톨이가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마저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외교대란(大亂)’이다. 격랑에 휩싸인 동북아 세력경쟁의 실태와 원인, 대책을 2회에 걸쳐 싣는다.》

▽ 민족주의의 충돌이 동북아 불안으로 = 박철희(朴喆熙)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냉전시대에 ‘공동의 적’의 뒤에 가려져 있던 각국의 민족주의가 최근 수년간 전면에 부상했다”며 “한국의 좌파 민족주의, 일본의 우파 민족주의, 중국의 중화민족주의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면서 충돌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및 역사왜곡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갈등, 일본과 중국의 센카쿠 열도(중국은 댜오위다오·釣魚島라고 부름) 분쟁,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으로 인한 한중 갈등은 모두 각국의 민족주의가 부딪치는 접점이다.

28일 40여 명의 일본 민간시찰단이 해상보안청의 호위를 받으며 상륙한 ‘오키노토리(沖ノ鳥)’ 섬도 일본과 중국의 영토 민족주의가 충돌하는 현장. ‘오키노토리는 암초에 불과하므로 섬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중국에 맞서 일본은 도쿄만에서 1740km 떨어진 이 돌섬을 기점으로 삼아 방대한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확보했다.

일본의 우경화는 이미 돌이키기 힘든 대세다. 1990년대 이후 10여 년간의 불황기에 일본 정계 등을 장악한 우익세력이 꾸준히 민족주의를 강화시켜 왔다는 게 이원덕(李元德)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의 분석. 이들은 과거사에 대한 죄책감 없이 팽창적 민족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민족주의는 가장 편협한 형태인 쇼비니즘(국수주의·國粹主義)의 양태를 띠고 있다.

중국은 경제성장에 따른 주민의 욕구와 소수민족 문제를 제어하는 통로로 중화민족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국가 지도부도 사회주의권 몰락 이후 국가 정체성을 떠받치는 이데올로기로 민족주의를 고양하고 있다. 특히 경제적 자신감을 바탕으로 19세기 이후 패배의 역사를 만회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이는 대외정책 기조가 ‘도광양회(韜光養晦·재능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림)’에서 ‘화평굴기(和平굴起·평화롭게 우뚝 일어섬)’로 바뀐 데서도 잘 드러난다.

중국의 ‘단대공정(斷代工程·하, 은, 주 등 전설상 중국 고대왕조의 역사화)’과 고구려사 왜곡에 관한 ‘동북공정’, 55개 소수민족 역사를 모두 중국역사로 간주하는 ‘통일다민족국가론’이 모두 민족주의 발현에 따른 산물이다.

이에 대해 일본 방위청의 싱크탱크인 방위연구소는 최근 보고서에서 중국의 해양진출과 민족주의 대두를 경고하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중국에선 포털사이트 시나닷컴이 주도하는 일본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 반대 서명에 1000만 명이 서명하는 등 인터넷상에서도 민족주의가 드세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취임 초부터 자주외교를 표방하며 ‘할말을 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드러낸 데 대해 주변국가에서는 결국 민족주의가 강화되는 현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일본과 중국은 한국이 통일될 경우 특유의 민족주의가 폭발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 미국의 동북아 전략과 한중일의 대응 = 미국은 빌 클린턴 정부 시절 친(親)중국 제스처를 보였으나 최근에는 일본과 동맹을 강화해 중국을 견제하려는 전략에 가속도를 내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미국은 중국이 더 성장했을 경우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일찌감치 일본과 손잡고 대비책 마련에 나선 것 같다”며 “미일과 중국 사이에는 갈등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달 미일 외교·국방장관 회담에서 대만문제에 협력하기로 하는 등 중국의 군사력 팽창에 공동 대응하기로 한 것이나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미국이 공개 지지한 것은 이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 미국의 동북아 미군 재배치도 대만 사태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일본이 최근 한국 중국과의 마찰을 마다하지 않는 것도 굳건한 미일동맹이라는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

중국은 미일동맹에 맞서 대만 독립 저지를 위해 무력 동원을 합법화하는 반분열법을 만드는 등 대비책을 세우고 있다.

노 대통령의 ‘동북아 균형자론’은 동북아의 위험 요인을 평화구도로 이끌겠다는 구상이다. 한국이 미국과의 관계 설정에 있어 중국과 일본의 중간쯤 되므로 한미동맹을 강조하면서도 ‘자주’와 ‘균형자’를 내세워 독자노선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 논리의 연장선에서 한미 관계는 오히려 소원해지고 있다.

특히 동북아 균형자 역할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은 한국의 ‘이상’과 ‘능력’ 간의 괴리를 지적하고 있다. 한 전직 고위 외교관은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꿩도 먹고 알도 먹겠다는 계산이지만 자칫 둘 다 놓치고 외교적으로 고립될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고 우려했다.

윤종구 기자, 황유성 특파원, 박원재 특파원

브레이크 없는 中-日-러 군사력 경쟁

최근 몇 년간 진행되어 온 동북아 각국의 군비 증강은 ‘브레이크 없는 질주’와 같다. 중국과 일본 러시아가 군비 경쟁에 몰두하면서 동북아의 새로운 냉전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일본 자위대의 경우 질적으론 미국 러시아에 이은 세계 3위의 첨단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첨단 90식 전차(240여 대)와 F-15J 203대, F-2 공격기 65대를 운용 중이다. 여기에 최신형 E-767 조기경보기 4대와 E-2C 호크아이 조기경보기 13대를 보유, 완벽한 방공태세를 갖추고 있다. 또 한국은 8대뿐인 대잠초계기를 99대나 보유해 세계 최고 수준의 대잠수함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

올해 끝나는 신중기 방위력정비계획에 따라 공중급유기(4대)와 경항공모함으로 평가되는 1만3500t급 헬기탑재호위함, 작전 반경이 대폭 늘어난 신형 초계기까지 도입하면 일본은 원거리 타격 능력을 갖추게 된다.

중국도 1990년대부터 군 현대화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러시아제 최신예 SU-27, SU-30 전투기를 200대 이상 도입했고 자체개발한 J-10 전투기를 지난해 실전 배치한 데 이어 신형 Y-8 조기경보기도 도입할 예정. 또 초음속 대함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구축함과 순항미사일을 탑재한 핵잠수함 등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70여 척의 잠수함을 보유하고 있다.

중국이 올해 개량형 SU-30과 IL-78 공중급유기, IL-76 수송기 등을 도입하는 것은 대만해협의 제공권 장악과 대만상륙작전을 고려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 밖에 350기 이상의 핵탄두와 이를 운반할 수 있는 폭격기 400여 대, 중단거리 탄도미사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아시아 최강의 핵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중국은 나아가 2010년까지 사거리 1만5000km급 신형 ICBM을 개발하고 현재 350기 안팎인 중단거리 미사일을 600기까지 늘릴 계획.

러시아는 최근 최신 레이더망도 피할 수 있는 스텔스 대함미사일을 개발한 데 이어 여러 개의 핵탄두를 탑재하고 초음속 비행으로 미국 미사일방어(MD) 체제를 뚫을 수 있는 신형 ICBM도 개발 중이다. 또 신형 ICBM을 탑재할 수 있는 차세대 핵잠수함 2척을 건조해 내년 중 실전배치할 계획이다. 러시아의 핵 전력은 ICBM 735기, 전략핵잠수함 13척, 핵탄두 3150여 기, 장거리 폭격기 78대 등으로 구성된다.

대만의 군사력은 질적으론 중국과 대등하거나 앞선다는 평가. 대만은 미라주와 F-16 등 200대의 신형 전투기와 다수의 해군 함정을 보유 중이며 중국의 미사일 공격에 맞서 신형 패트리어트(PAC-3) 미사일도 배치했다.

윤상호 기자

(동아일보 2005-3-29)

[격랑의 東北亞]<下> 한국의 전략 문제없나

참여 정부 출범 후 한국은 여러 차례 주변국들에 얼굴을 붉혔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반미감정이 중요 이슈로 불거졌던 2002년 대통령선거 당시 후보로서 ‘꼭 미국에 가야 대통령 되나’는 발언을 해 기존 질서에 대해 포문을 열었다. 노 대통령은 당선 후에도 주한미군의 감축과 역할 변경 등 한미동맹의 재조정 문제에 관해 거리낌 없이 ‘할 말’을 했다. 최근 독도 문제 등으로 갈등 관계에 있는 일본을 압박하는 데도 전면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한국 외교는 일관성을 잃고 있다. 이 때문에 주변국에서 한국의 외교적 언행을 신뢰하지 않는 현상도 나타난다. 한국의 외교 위기는 한국이 자초한 측면도 있는 셈이다.

▽ 이상을 좇는 한국 외교 = 노 대통령이 새로운 외교정책 비전으로 제시한 ‘동북아시아 균형자론(論)’은 미국의 세계전략 변화와 동북아 역내에서의 일본과 중국의 경쟁으로 촉발된 동아시아 ‘새판 짜기’에 대한 응전(應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미국과는 동맹관계를 유지한 채 대등하고 호혜적인 수평관계를 지향하고, 중국과는 미래지향적 파트너십을 맺으며, 일본과는 교류 협력을 계속하되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우경화하는 데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논리다. 노 대통령은 나아가 북한을 포용해 한반도 평화정착을 이루겠다는 원대한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에 입각한 외교가 냉철한 현실 판단과 치밀한 전략을 통해 실리를 추구하는 대신 이념과 명분을 더욱 중시하는 데 대해선 우려가 적지 않다.

익명을 요구한 한 외교관은 “노 대통령 개인의 신념이 너무 강해 외교부의 직언이 먹히지 않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다른 외교관은 “지도자의 퍼스널리티(성향)가 외교에 너무 많이 투영되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 냉담한 주변국들의 시선 = 노 대통령의 ‘호통 치는’ 외교에 대한 미국 일본 중국 등 주변국들의 평가는 냉랭하다. 주한 미국대사관의 한 직원은 “노 대통령이 충격적인 말을 쏟아내고 있어 대사관은 눈코 뜰 새가 없다”고 말했다.

외교안보 부처의 한 고위당국자는 “일본 당국자들은 기본적으로 한국을 신뢰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노 대통령과 한국 외교관들의 말이 다른 데서 빚어진 현상”이라며 씁쓸해 했다.

일본은 특히 북한 핵문제가 엄연히 국제 현안임에도 한국 정부가 국제 사회의 대북 압박에 반대하고 북한을 두둔하는 듯한 행태를 취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은 30일 ‘빗나간 외교전쟁’이란 사설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한국호를 어느 영향권으로 운항하려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며 “베이징과 더 가까워지려고 노 정권이 중국에 애교를 부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중국은 한국이 미국과 거리를 두고 중국에 접근하려는 것에 대해 의아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최근 동아시아 연구원이 내놓은 ‘일본의 안보 선택과 한국의 진로’라는 전략보고서는 “중국 스스로가 미국의 대안이 아니라고 하는 시점에서 한국이 나서서 중국을 대안이라고 할 필요가 없다”며 “미국과 일본을 외면할 경우 한국은 역으로 중국이나 북한으로부터 외면 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 동북아 균형자론의 허와 실 =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이날 청와대 브리핑 자료를 통해 “참여정부는 균형자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한미동맹을 기본 토대로 삼는다”며 “공고한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동북아 평화번영의 시대를 앞당기겠다는 것이 참여정부의 구상”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한미동맹을 유지하면서 균형자 역할을 하겠다는 구상에 대해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김근식(金根植) 교수는 “균형자라는 개념은 동맹에서 한 발짝 빠져나와 새로운 역할을 모색하겠다는 의사표시로, 균형자와 동맹은 양립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서울대 외교학과 하영선(河英善) 교수는 “균형자가 되려면 한쪽에 무게를 실을 경우 무게중심이 이동할 수 있어야 하는데 냉정하게 평가한 우리의 국력이나 외교적 역량에서는 현실적이지 않은 이야기”라고 말했다.

하 교수는 “100년 전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고 일본을 무릎 꿇게 하려면 일본이 근대국가 형성 과정에서 부국강병을 추구하면서 치밀하게 국력을 쌓아 온 교훈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북아의 격랑 속에서 표류하고 있는 한국 외교는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한미동맹 유지 △중국 일본과의 평화 협력 기조 유지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한국이 지향해야 할 목표로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김우상(金宇祥) 교수는 ‘중추적 동반자(pivotal partner)’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김 교수는 “균형자의 역할보다는 한국의 지지가 지역질서를 만드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보다 협력적인 개념이 중추적 동반자”라며 “모처럼 잡은 방향이 공염불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국가 역량의 강화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동아일보 / 하태원 기자 2005-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