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도경’…中황제에 보고된 12세기 고려의 초상

고려도경 / 서긍 지음·조동원 외 4인 공역/526쪽·3만5000원·황소자리

“옛 사서에 따르면 고려의 풍속은 사람들이 모두 깨끗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들은 항상 중국인이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한 뒤 집을 나서며, 여름에는 하루에 두 번씩 목욕을 한다. 흐르는 시냇물에 모여 남녀 구별 없이 물굽이에 따라 속옷을 드러내는 것을 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고려인들이 현대인 못지않게 청결을 중시했고, 남녀유별을 강조한 조선시대와 달리 이성 간에 자연스럽게 어울렸음을 알 수 있게 해 준 이 기록은 외부 관찰자의 시선에서 나온 것이다.

원제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인 고려도경은 1123년 고려를 방문했던 중국 송나라의 관료 서긍(徐兢·1091∼1153)이 이듬해 송 휘종에게 바친 40권짜리 보고서다. 선화(宣和)는 당시의 연호이고, 봉사(奉使)란 사신의 임무를 수행했다는 의미다. 고려도경은 고려 풍물을 그림(圖)을 곁들여 쓴 글(經)이라는 뜻.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일러스트레이션 보고서라 할 만한 이 책은 극적인 운명을 겪었다. 완성된 지 3년 뒤 금의 공격으로 송의 수도 개봉이 함락당하면서 휘종과 그의 아들 흠종이 납치된 ‘정강(靖康)의 변’ 때 유실됐다가 10년 뒤인 1137년에 발견됐기 때문이다.

1167년 서긍의 조카 서천이 그림은 사라지고 글만 남은 이 책을 운남(雲南) 성 징강(징江)에서 판각본으로 출간했다. 그중 한 권만 남아 있다가 청(淸) 건륭제 때 발췌 내용이 사고전서본(四庫全書本)으로 남았고, 1931년 원문 영인본으로 출간된 책 중 하나가 미국 하버드대 옌칭도서관에 있다가 1970년 국내에 소개됐다.

성균관대 사학과 조동원(65) 교수가 주축이 돼 고려사 전공자 5명이 매달린 이 책은 서로 다른 세 가지 판본을 비교해 완역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국내 번역서를 능가한다.

이 책의 맨 앞에서 고려 건국 전후의 역사와 왕계를 기록한 부분은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을 반박하는 중요 사료다. 왕성 내 문궐과 궁전, 관복과 의례, 고려 실권자들의 풍모와 성격, 군사와 병기, 종교, 신분제도, 토지제도, 풍속과 생활용품, 배와 도로 등 교통 사정까지 박물지적 정보를 담고 있어 고려사 연구에 필수적인 저서다.

고려시대 임금이 황제의 빛깔인 황색 겉옷을 입었다는 기록은 고려의 자주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 임금부터 가난한 백성까지 빈부의 차이 없이 흰 모시옷를 입는다는 기록에서는 백의민족의 전통도 확인할 수 있다.

당대의 권신 이자겸과 석학 김부식에 대한 기록도 흥미롭다. 훗날 난을 일으켜 정국을 어지럽히는 이자겸에 대해 “참소를 믿고 이득을 즐기며 집에 썩는 고기가 수만 근”이라며 한탄했다. 반면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에 대해선 “장대한 체구에 얼굴은 검고 눈이 튀어나왔다. 두루 통달하고 기억력도 탁월하여 글을 잘 짓고 역사를 잘 알아 학사들에게 신망을 얻는 데에는 그보다 앞선 사람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이 밖에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탄, 고려군의 놀라운 활 솜씨에 대한 서술, 글을 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남다른 교육열에 대한 기록은 한국인의 전통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동아일보 / 권재현 기자 2005-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