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촉즉발! 한·중·일 역사교과서 전쟁

동아시아 패권을 다툰 '총칼 전쟁'이 끝난 지 100여년이 지난 지금 미래를 차지하려는 소리 없는 '역사교과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세계화 반발 따른 신국가주의 바람인가, 각국 우익세력의 반란인가

‘역사 교과서는 미래를 여는 창.’

동아시아의 역사교과서 문제를 다뤄온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역사교육연대)에서 강조하는 말이다. '미래의 창'인 역사교과서를 놓고 2005년 봄, 한-중-일 3국간에 일전이 벌어지고 있다. 일본과 한국-중국은 근대사 문제로, 중국과 한국은 고대사 문제로 상대국의 역사교과서에 대해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일본에서는 우익사관을 훨씬 더 반영한 후소샤(扶桑社)의 새 역사교과서가 오는 4월 검정을 거친다. 동북공정 추진으로 한국은 중국의 역사교과서에 대해서도 고대사 서술과 관련해 경계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1894년 청-일 전쟁, 1904년 러-일 전쟁 등 동아시아의 패권을 다툰 과거의 전쟁이 끝난 지 100여년의 세월이 흘러 '미래'를 차지하려는 '역사교과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포성은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총칼이 동원되지 않은 '소리없는 전쟁'은 벌써 시작됐다. 전문가들은 “과거의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역사교육은 가까운 미래에 전쟁을 낳을 수도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들은 역사교과서에 대해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역사교육연대 양미강 상임운영위원장은 “역사교과서는 역사인식을 재생산하고 사회의 일반적인 인식이 투영되는 만큼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역사교육과)는 “어느 나라든 역사인식의 형성은 학교에서 이뤄지며, 그 통로는 역사교과서“라고 지적했다. 역사학 교수 출신인 강창일의원(열린우리당)은 “역사교과서 문제는 국가 구성원의 정신적 기반을 만들고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가장 큰 정치“라고 말했다. 강의원은 역사교과서가 정신적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교과서는 정신적 무기 될 수 있어“

일본의 우익단체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은 2001년 우익사관으로 기술된 새 교과서를 만들면서 “지금은 일부에서 비판이 있지만 이 교과서로 공부한 학생들이 성인이 된 몇십년 후에는 뜻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고 한다. 이들이 지원한 후소샤 교과서는 일본 시민사회의 반발과 주변국들의 항의로 일선 학교에서 채택에 어려움을 겪었다. 새역모는 4년 후를 다짐했다.

올해 '4년 후의 복수'가 시작되고 있다. 후소샤의 새 역사교과서에 대한 검정 결과가 4월 초 발표될 예정이다. 현해탄을 건너 후소샤 교과서의 역사왜곡 내용이 하나씩 들려오고 있다. 역사교육연대는 3월 11일 기자회견을 열고 후소샤 역사교과서 개정판이 '일제 식민지 통치가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역사왜곡 내용을 담고 있다고 공개했다. 또한 일제의 창씨개명이 강제로 이뤄진 사실을 뺀데다 2001년 판에 기술된 '많은 조선인이 끌려갔다'라는 표현을 아예 삭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공민(사회) 교과서에는 '독도가 국제법상 일본의 영토'라고 명시해 논란을 빚고 있다. 이 교과서의 화보에는 독도전경 사진이 실렸다.

여기에 더욱 기름을 끼얹은 것은 일본 당국의 반응. 일본의 나카야마 나리아키 문부과학상은 지난해 11월 “일본 교과서에서 종군위안부나 강제연행 같은 표현이 줄어든 것은 잘된 일“이라고 주장했다가 비판여론에 밀려 사흘 만에 공개사과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리아키 문부상은 지난 1월 “자학적인 교과서가 엄청나게 많다“고 발언, 또다시 물의를 일으켰다. 3월 6일에는 문부과학성 정무관인 시모무라 하쿠분 자민당 의원이 “근린제국조항이 생기는 바람에 자학사관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3월 4일 마치무라 노부타카 일본 외상이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중국의 애국주의 교육은 곧 반일교육이므로 중국의 역사교육에 대한 개선을 구체적으로 요구하겠다“고 발언, 중국측을 자극했다.

중국의 역사교과서도 동북공정의 추진으로 우리에게는 최근 경계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교육부의 의뢰로 중국역사교과서 38종을 분석한 결과 18종의 교과서에서 한국 고조선과 고구려 등의 고대사 관련 조항이 전혀 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보고서에는 “이러한 양적인 축소보다 더 우려되는 것은 교과서의 지도에 보이듯이 과거 중국의 영토를 과장하여 표시하는 한편 고려 이전의 한반도를 마치 중국이 지속적으로 지배한 것으로 표기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나타나 있다. 박선영 포항공대 교수(중국 근-현대사)는 “동북공정은 학자들의 연구가 이뤄지는 1차적인 과정이며 동북공정의 연구성과가 교과서에 반영되는 2차적인 과정을 예의주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최근 동아시아에서 역사교과서 문제가 불거지는 것에 대해 '세계화'를 큰 요인으로 보고 있다. 1980년대 후반 동유럽의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이념 대립이 희석화되고 1990년대 들어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국가의 개념이 점차 희미해지면서 '신국가주의'를 주창할 필요가 생기게 됐다는 것이다.

김한종교수는 “이념의 대치되는 개념으로 국가의 이익을 강조하게 됨으로써 역사교과서에 대한 국가주의자들의 개입이 문제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강창일의원도 “글로벌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각국의 우익 세력이 국가와 민족의 개념을 강조하고 있다“며 최근의 역사적 기류를 설명했다.

세계에서도 특히 동아시아라는 특정 지역에서 역사교과서 논쟁이 일고 있는 것은 제국주의 몰락 이후 근대화를 제대로 체험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라는 분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식민지(한국)와 반식민지(중국), 제국주의(일본)를 경험한 세 국가가 1945년 종전 이후 동-서 냉전이라는 새로운 틀로 대립구도를 형성, 제국주의의 폐해를 제대로 체험할 틈을 갖지 못한 것이 중요한 원인이 됐다. 승전국인 미국이 일본에서 제국주의 청산보다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반공 전초기지 건설에 더 큰 비중을 둠에 따라 가해국인 일본에서부터 제대로 된 과거청산이 이뤄지지 않았다.

중국 동북공정 성과 반영 주시해야

역사교과서 문제는 영토문제로 인해 더욱 예민한 사안이 되고 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독도, 일본과 중국 사이에는 센카쿠열도(조어도), 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간도문제가 서로 얽혀 있다. 영토분쟁의 교과서 반영 여부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인 셈이다.

이런 역사교과서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시민단체가 앞장서고 있다. 2001년 4월 '일본교과서바로잡기 운동본부'로 시작된 역사교육연대가 좋은 사례. 한-중-일 시민단체와 역사학계가 중심이 된 이 단체는 3국간의 공동적인 역사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5월에는 3국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집필하는 한-중-일 공동 역사부교재를 발간한다. 양미강 상임위원장은 “3국의 시민단체와 학계 사이에 신뢰를 구축해 평화를 추구하는 역사의식을 이끌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역사교과서 문제를 일본과 한국-중국의 대립으로 볼 것이 아니라 전쟁세력과 반전평화세력의 대립으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본의 경우 양심적인 시민단체가 참여하고 있지만 일본 사회의 전반적인 우익화로 점차 어려운 환경에 직면하고 있다. 4년 전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 때보다 지금 더 여건이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강의원은 “일본에서는 역사교과서 문제에 정치인들이 개입하고 있는 만큼 역사학계에서뿐만 아니라 정치권도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양위원장은 “일본에서는 4년마다 교과서가 개정되는데 매번 비난만 퍼붓는 것에서 끝나면 되지 않는다“며 “국가적 차원에서 특정기구를 통해 장기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위원장은 또 “국가가 할 수 없는 영역도 있는 만큼 3국의 시민단체는 시민단체 나름대로 역사인식의 공유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뉴스메이커 / 윤호우 기자 2005-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