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포럼] 한국의 고립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몇 년 전 세미나 참석 등 사적인 볼 일로 중국 상하이를 방문했을 때다. 그의 방중 소식을 접한 당시 장쩌민 국가주석이 베이징에서 급거 상하이로 날아와 그를 영접했다. 부시는 장 주석의 호의에 흡족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고, 아들 부시 대통령에게까지 그의 사람 됨을 치켜세웠다고 한다. 강대국 중국의 국가주석이 미국 전직 대통령의 개인적인 방문조차 소홀함이 없이 챙긴 것은 언뜻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중국 외교력의 한 단면에 지나지 않고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유일 초강국 앞에선 강대국 중국도 한편으로 머리를 조아린다면, 그건 비굴함이 아니라 냉엄한 국제현실을 꿰뚫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미국이 중국의 인권과 민주화 문제를 들먹일 때마다 중국당국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지만 적정 범위 내에서 격을 갖춰 한다. 중국의 대미 전략 카드보다는 미국의 대중 카드가 훨씬 많고 효과적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대만을 활용해 중국의 민주화를 촉진하고, 중국을 이용해 지난해 대만에 40억달러의 첨단 무기를 팔았지만 어느 쪽도 미국을 탓하질 않는다.

국제관계는 힘이 진리다. 그것이 우리네 선비의 정도(正道)는 아니지만 앞으로 수십년은 통용될 하나의 테제로 남아 있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중국은 적어도 국제정치학자들이 미국과 거의 대등한 국력을 가질 것으로 점치는 2030년까지는 미국의 독기 서린 입김을 피할 것이다. 힘의 비교우위 또는 절대우위의 인정을 거부한다면 그건 고립과 몰락을 의미한다. 소련이 그랬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이 그 전철을 밟은 걸 보면 뜨악하다.

미중 관계를 긴 서설로 시작한 것은 다름이 아니다. 우리 정부의 호언과 과대의 실체를 짚어보자는 것이다. “핵 개발이 자위적 수단이라는 북한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 “ 주적(主敵)을 밝히라”는 하이드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장의 말에 대한 정동영 통일장관의 정면 반박, 그리고 편향된 반미 분위기가 가져온 결과는 무엇인지 성찰해봐야 한다. 말은 다 일리가 있는 법이지만, 처지를 헤아리는 지혜가 부족하다면 설화(舌禍)가 되어 돌아오는 법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몰라서 “독도는 일본 땅”이라며 한일 간 독도·역사교과서 분쟁에 은근히 일본 편을 들겠는가. 과거 김영삼 대통령이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가르치겠다”고 속시원하게 외친 후 몇 년 지나 1997∼8년 외환위기를 맞았을 때 일본은 우리에게 달러 한닢 꿔주지 않았다. 일본이라면 구원투수가 되고도 남았지만, 그들은 한국의 처절한 요청에 묵묵부답했고 우리는 망가졌다.

정부 사람들이 미국이 밉다고 중국을 격찬했지만 돌아온 건 중국의 고구려·발해 역사 왜곡이었다. 지금 중국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엉터리 민주주의’, 한국문화를 ‘저질문화’로 대문짝만하게 보도한다. 외피적인 한류 열풍 속에 한국 비하의 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면 두려운 일이다.

미국과 일본의 패권주의가 싫어 북한의 민족공조에 더 호응하지만 그들 역시 남한의 짝사랑에는 제한적이다. 동네 슈퍼마켓 주인 같은 남한보다는 거상(巨商) 미국과 거래하는 게 빵 한 쪼가리라도 더 얻어먹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 고위 관리들의 메아리 없는 과언(過言), 그것은 용감무쌍인가 ‘당랑거철’인가. 아니면 무절제한 흥분인가, 고립무원의 외마디 절규인가. 100년 전 역사의 질곡을 헤맬 때보다 더 황량한 상황이지만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 그 까닭은 뭘까? 정치와 외교력 박약의 소치로밖에 해석할 도리가 없다면 불행이다. 친미· 친중· 친일의 사대에서 벗어나야겠지만 반미·반중·반일이 해법은 아니다. 고립 탈피의 대안이 있다면 용미(用美)·지중(知中)·극일(克日)의 프로정신일 것이다.

(세계일보 / 조민호 논설위원 2005-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