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현실 풍자 ‘학교대사전’ 펴낸 이세준·주덕진·백인식군

대한민국 청소년이 세상의 이목을 끌 수 있는 방법 두 가지. 공부를 엄청나게 잘해 외국 명문대에 합격하거나, 일진회 같은 폭력서클에 가입하거나. 묵묵히 학교를 다니며 친구들과 도시락을 까먹고, 오르지 않는 성적에 가슴아파하는 대다수 청소년들은 사회적 시선의 한가운데에 놓이기 힘들다. 그 평범한 10대들의 삶과 고민을 적나라하게 담은 ‘대한민국 10대 생태 보고서’라 부를 만한 책이 10대들 손으로 꾸며져 세상에 나온다.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열아홉 동갑내기 이세준(李世濬)·주덕진(朱德賑)·백인식(白寅湜)군 세 명이 학교에서 흔히 접하는 사물과 현상을 가나다순으로 풀어낸 ‘학교대사전’(도서출판 이레)을 이달 말 출판하는 것.

600여개의 표제어로 구성된 이 사전은 열악한 학교환경과 입시 위주 수업, 부조리한 교육정책, 학생들의 일상을 이렇게 풍자한다. ‘의대:성적이 높은 공대 지망생들이 진학하는 학교’ ‘도시락:안 가져온 사람은 있어도 점심을 굶는 사람은 없게 되는 신기한 식사’ ‘골품제도:성적의 높고 낮음에 따라 반장, 부반장, 전교회장 등의 출마를 규제한 신분 제도’ ‘인플레이션:내신에서 90점대의 점수를 받고도 석차가 50% 밖인 현상’ ‘가치전도 현상:개념을 익히려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풀기 위해 개념을 익히는 현상’….

“학교에 대한 막연한 비판이나 불평은 아니에요. 학생들도 문제의 원인일 수 있죠. 답답한 현실을 글로 정리하다 보니 스트레스가 풀리더라고요.”

‘사전편찬’이라는 엄청난 작업은 이들이 서울 경기고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작년 봄, 야간자습시간에 시작됐다. 이세준군이 ‘관성의 법칙’을 ‘수업시간에 한번 자는 사람은 계속해서 자는 원리’로 끼적인 낙서를 서로 돌려보다 묘한 재미를 느낀 세 친구들은 자신들 주변의 많은 일들을 이런 식으로 풀어보기 시작했다. 우울한 고3들이 벌인 이 ‘지적(知的)인 장난’은 교사와 부모 몰래 1년간 이어졌다. 수능을 끝낸 이들은 이를 정리해 지난 1월 인터넷 홈페이지 ‘학교대사전’(www.schooldic.wo.to)을 열었고, 반응은 폭발했다. “배꼽 빠지는 줄 알았다” “어쩜 10년 전 나 학교 다닐 때랑 하나도 안 변했냐” “웃으면서 봤는데 다 보고 나니 왠지 눈물이 난다”는 등의 의견들이 무수히 달렸다.

교육현실에 대한 촌철살인의 풍자와 학생다운 신선함이 톡톡 튀는 이 사전의 저자들은 즉각 언론과 출판계의 ‘수배대상’이 됐지만 대입(大入)준비에 바빠 신원을 드러내지 않았다. 주덕진군은 서울대 공대에 입학했고, 이세준군과 백인식군은 각각 국문과와 공대에 진학하기 위해 재수를 시작했다.

“공교육을 희화화한 주인공들이 강남의 명문고 출신임이 밝혀지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 것 같으냐”는 질문에 이군은 “강남은 사교육 1번지일 뿐 공교육 1번지가 아니다. 한국의 평준화 고등학교는 다 똑같다”고 말했다.

“고교시절 내내 ‘모두들 왜 이런 무의미한 경쟁을 하는 걸까’ 하는 답답함이 있었어요. 지금은 이 사전이 재미있다고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옛날 이야기’로 잊히길 바랍니다.”

(조선일보 / 정시행 기자 2005-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