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듯 웃는듯 ‘신비의 미소’
⑩ 금동반가사유상 웃주름 리듬감 조형미 절정
중국·일본 압도 불가사의 경지
금속제 대형상도 유일부이

슬픈 얼굴인가 하고 보면 그리 슬픈 것 같이 보이지도 않고, 미소짓고 계신가 하고 바라보면 준엄한 기운이 입가에 간신히 흐르는 미소를 누르고 있어서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함을 뼈저리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이 부처님의 미덕이다… ’ 우리 조각사의 최고 정점에 서있는 국보 78호와 83호 금동반가사유상에 대해 미술사가인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1916~1984)은 솔직한 필치로 마음을 움직이는 감상기를 남기고 있다. 그가 덧붙여 말한대로 두 반가사유상이 ‘ 인자스럽다, 슬프다, 너그럽다, 슬기롭다 하는 어휘들이 모두 하나의 화음으로 빚어진 듯 머리 속이 저절로 맑아 오는 것 같은 심정을 일으키는 것은’기법을 초월해 지극한 경지의 신앙심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상의까지 걸쳐입은 장식적 분위기의 78호와 상반신은 알몸인 채 토실하게 살이 오른 사실적 분위기의 83호는 서로 형식은 다르지만 한결같이 신비스럽고도 온화한 미소로 세계 조각사의 한봉우리를 차지하고 있다.

반가사유상이란 의자에 앉은 자세로 오른 다리 굽혀 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오른손 뺨에 대고서 생각에 잠긴 보살, 부처의 상을 뜻한다. 이 양식은 애초 고대 인도의 작은 왕국에서 태어난 부처, 곧 싯다르타 태자가 궁성 밖에서 민중들의 생로병사를 보고 고뇌에서 벗어날 길을 고민하게 되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이 고사가 조각상으로 새겨져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해지고, 다시 6~7세기 한국, 일본에 전래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흥미로운 것은 삼국시대 우리 민족이 반가사유상 자체를 극락세계를 구현할 미륵불의 현신으로 여겨 신앙대상으로 숭배했고, 그 결과 중국과 다른 단독상 형식의 대형 반가사유상들을 숱하게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제작기법면에서도 삼국시대의 반가사유상은 중국과 일본을 압도한다. 특히 유려한 선율 같은 옷주름의 곡선미, 회화적인 매듭선, 갸날픈 몸매에 고개 숙인 채 상념에 빠진 두 국보 반가상의 자연스러운 조형미는 지금도 불가사의하기만 하다. 80cm가 넘는 대형반가상을 금속제로 만든 것은 중국에서도 전례가 없다. 조각거장 미켈란젤로는 ‘작품은 돌 속에 원래 숨어있는 형상을 살려내는 것’이란 명언을 남겼지만, 이들 두 상은 금속을 녹여 주조한 뒤 앉아서 사유하는 고난도 자세를 지극히 자연스러운 형상미로 빚어낸 것이기에 성취는 더욱 빛난다. 한국 미술사학의 비조인 우현 고유섭(1905~1944)은 그의 최초 논문인 <금동미륵반가상의 고찰>(1931)에서 당시 이왕가 박물관 소장이던 83호상의 미감을 이렇게 분석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연약한 양 어깨는 여성적이요, 양 팔의 곡선미는 십분 사실적이다. 나는 이 가는 팔목과 몸이 완곡히 잇닿는 가슴·어깨 부분에서 조선적인 맛을 느낀다…입은 옷은 율동하며 그 조형의지가 절정에 달하고 있다…대개 금동조각상의 경우 옷의 표현이 뻣뻣하게 옆선으로 가려하고 단면도 끊어지듯 직각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는데, 이 상만은 옷자락선이 둥글한 리듬감으로 넘치고 회화적 요소가 풍요하니 석굴암의 선구적 도상임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그는 논문 말미에 서구 미술사학의 대부로 불리우는 빙켈만과 부르크하르트가 조선에서 미술사를 쓴다면 반드시 반가상에서 시대적 모뉴멘트를 발견할 줄 믿는다는 맺음말을 썼는데, 이런 미학적 분석이 바탕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두 반가사유상은 국내 학계에서 제작지가 삼국 중 어디냐를 둘러싸고 50년 이상 해묵은 논란을 빚어왔다. 두 조각상을 세상에 처음 내놓은 것은 1910년대 남쪽조선을 돌며 문화재를 도굴해갔던 일본인 골동상으로 전해진다. 1912년 현 중앙박물관의 전신인 총독부 박물관과 이왕가 박물관이 기증, 구입의 형식으로 입수해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데, 고약한 것은 이들 사유상 또한 도굴 등으로 불법반출된 까닭에 출토지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충청도 시골, 경주 남오릉, 안동 등 여러 추정만 횡행하고 있는 것이다. 제작처도 일제시대부터 지금껏 83호의 경우 백제·신라, 78호의 경우 고구려·백제·신라설 등이 학계에서 복잡하게 엇갈려왔으나 결론이 날 조짐은 별로 없다. 두 반가사유상이 미륵불상인지, 태자상인지에 대한 정설도 갈무리되지 않았다. 실제로 92년 백제 유물관인 국립부여박물관 재개관 때 개관전 도록도판에 83호 반가사유상을 넣었다가 근거 없다는 일부 전문가들의 반발로 도록에서 다시 빼는 해프닝도 있었다. 우리 민족의 뿌리깊은 종교적 기질이 녹아있는 반가사유상은 하나이면서도 셋이었던 고대 삼국 공예문화의 숨은 차이에 얽힌 비밀을 출토지 논란과 함께 떠안고 있는 셈이다.

(한겨레신문 / 노형석 기자 2005-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