쯩자매, 군사를 일으키다

[김재희의 여인열전]

신라에서 박혁거세가 알을 깨고 나왔을 무렵, 낙랑 공주가 고구려의 호동에게 깜박 속아 제 아버지 나라의 자명고를 찢어버렸을 무렵, 베트남은 벌써 200년 넘게 한(漢)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 시절 하노이 서북쪽 어느 고을에 쯩짝과 쯩니라는 쌍둥이 자매가 사이좋게 살다가 언니 쯩짝이 먼저 시집갔는데, 식민지 총독이던 한나라 태수는 식민통치에 불만을 표시한 쯩짝의 남편을 본보기로 살해하고 그를 겁탈했다.

이에 스물을 갓 넘긴 쯩짝은 동생 쯩니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적들의 손에서 조국을 해방시킨다. 쯩자매는 먼저 자신들의 지략과 용기를 증명하기 위해 호랑이를 잡아 그 가죽을 벗겨 거기에 봉기를 유도하는 선언문을 작성해 군사를 모았는데, 군대 지휘를 모두 여성에게 맡겼다 한다. 둘은 각각 코끼리를 올라탄 채 전투를 이끌었고, 그들의 어머니와 임신 중이던 여성까지 포함해 용감하고 지혜로운 36명의 지휘관으로 구성된 8만의 베트남 군대는 식민지 백성의 수모와 불행을 분연히 딛고 일어나 중국군에 맞섰다.

쯩자매가 이끄는 전투는 계속 승전고를 울리며 65개 성을 되찾았고, 가혹한 중국의 착취에 고통받던 베트남 사람들은 식민세력의 폭압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했다. 백성들의 환호 속에 언니인 쯩짝이 왕으로 추대되고, 자매는 해방된 조국을 함께 다스리며 꿈같은 세월을 보내지만, 후한 광무제는 3년 뒤 다시 군사를 동원해 베트남을 침략했다.

두 자매는 다시 전투에 나섰고 베트남 인민들 또한 똘똘 뭉쳐 맞섰으나, 중국은 너무 큰 나라였다. 쯩자매는 서기 43년, 지금의 하노이 부근에서 최후의 전투를 치르는데, 이때 베트남 군사 수천명이 생포돼 목이 잘리고 1만명 이상이 포로가 되었다. 쯩짝과 쯩니는 적군의 손에 들어가 능욕을 당하는 대신 홍강의 지류인 핫강에 투신하는 자결을 택했다(음력 2월6일, 베트남 사람들은 이날을 쯩자매의 죽음을 애도하는 민속 축제일로 기념하고 있다).

쯩자매의 3년 천하는 이로써 막을 내렸고, 베트남은 그 뒤 900년간 중국의 지배하에 고통받다 972년에야 독립의 꿈을 이룬다. 하지만 그들이 일으킨 독립전쟁은 한나라의 지배에 대한 베트남 최초의 대규모 저항운동이라는 의미 외에, 이후 중국에서 파견 나오는 태수들의 악정과 수탈에 대한 항쟁운동의 끊임없는 도화선으로 작용했고, 나아가 제국주의 프랑스와 미국의 침탈에 맞서서도 끈질기고 지독스런 항쟁을 벌인 저항정신의 뿌리가 됐다.

“남자 영웅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복종했지만 두 자매는 당당히 서서 나라의 원수를 갚았네.” 15세기 베트남의 한 시인이 쯩자매를 위해 바친 시의 한 구절이다. 논개와 유관순, 잔다르크와 쯩자매의 삶과 죽음은 과거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인류에게도 거룩한 분노와 우주적 담대함의 표상으로 그 빛을 발할 것이다.

(김재희/ <이프> 기획위원)

(한겨레21 2005-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