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의 성공 열쇠는 작가다

‘세잎 클로버’는 시청률 부진 때문에 초반에 연출자를 교체했다. 그리고 교체된 연출자는 기자들에게 “한회에 다섯 번 웃기고 한 번 울리겠다”고 호언했다. 이 말을 접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것은 작가의 몫이라고 판단됐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세잎 클로버’의 가장 큰 실패의 원인은 진부한 스토리, 상투적 캐릭터, 뻔한 상황설정을 내세운 극본 즉 작가에게 있었다.

며칠 전 ‘한강수 타령’의 작가 김정수씨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힘들어 하는 김작가의 상황을 목소리로나마 읽을 수 있었다. 김정수씨같은 대작가도 작품이 잘 풀리지 않으면 피를 말리는 사투의 작업을 벌인다.

이내 생각의 촉수는 김정수씨와 이금림씨와 만났던 첫 만남으로 뻗친다. 김정수씨는 이 자리에서 딸 아이의 말을 했다. “아이가 정말 힘든 방송 작가는 절대 안 되겠다고 하네요. 엄마에게 자라면서 들었던 말은 “나가 놀아” “조용히 해”였다“는 겁니다.” ‘은실이’ ‘지평선 너머’ 등을 집필한 이금림씨는 “내가 아이들을 키운 것이 아니라 세월이 키웠다”는 말로 방송 작가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극본을 쓰는 동안 피조차 검붉은 색으로 변한다는 두 중견 작가의 말은 시청자는 편안한 안방에서 프로그램을 보지만 작가는 그 시간을 수많은 고통으로 수놓아야한다는 것을 체감하게 해준다.

드라마와 다큐멘터리를 비롯한 교양 프로그램, 코미디, 오락 예능 프로그램 등 방송에 있어 작가의 역할은 엄청나다. 그래서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이라고 칭한다. 그만큼 방송에 있어, 프로그램의 완성도에 있어 작가는 절대적이다.

방송은 개인 작업이 아니라 공동작업이다. 작가, 연출자, 연기자, 스태프 등 적게는 수십명 많게는 수백명이 하나의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투입된다. 또한 시청자의 반응인 시청률에 따라 프로그램의 방향이나 내용이 변경되고 제작진이 교체되는 척박한 우리의 방송환경 속에 자신의 개성을 발현하며 독특한 작품 세계를 지향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아무리 잘 나가는 작가라도 시청률에서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하면 그는 방송사로부터 차가운 외면을 받는다. 또한 연출자와의 의견 대립과 시청자의 반응에 따라 작가 자신이 당초 기획하고 전달하려던 메시지를 변경하거나 내용 자체를 교체하는 극단적인 경우까지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이러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 노력과 성실, 그리고 창작의 고통과 피눈물로 앤드류 사리스가 작가로서 평가하는 세 가지 기준, 즉 현저한 개성, 방법론으로서 스타일에 입각한 탁월한 기술, 심오한 내적 의미를 담보하는 작가들이 빛을 발하고 있다.

대사의 한 단어, 한 단어에 심혈을 기울이며 자기 글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김수현, 교통사고로 피를 흘리면서도 흩어진 극본 원고를 방송사로 보낼 정도로 드라마에 애정을 부여하는 김정수, 치매, 맞벌이 부부의 애환 등 드라마마다 녹록치 않는 의미를 주려는 이금림, 초등학교 학력으로 순전히 몸으로 느낀 삶들을 드라마에 녹여내는 이환경, 저것도 글이라고 썼냐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기 위해 숱한 밤을 불면으로 보냈다는 김운경, 가볍고 자극적인 소재의 드라마의 범람 속에서도 굳은 심지와 맑고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드라마에 담아내는 노희경, 굵은 남성적 선과 섬세한 여성의 심리를 농축해 잘 드러내는 최완규 등은 이러한 대표적인 작가들이다.

드라마 작가 못지 않게 교양, 오락프로그램의 작가들 역시 시청자에게 이름 석자 알리기 힘든 상황이지만 그들은 시청자들에게 또 다른 프로그램의 존재 의미를 주기 위해 방송사 구석진 곳에서 오늘도 피보다 진한 땀을 흘리고 있다.

미안한 말이지만 이러한 작가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들 작가들의 한 쪽에는 거대한 집단의 작가들이 있다. 바로 시청률을 위해서라면 당초 의도했던 작품 세계를 헌신짝 버리듯 하는 작가들이 그들이다. 극단의 자극성과 선정성, 폭력성으로 완전무장해 시청자의 눈을 어지럽히는 작가들, 자신의 작품을 복제하는 것도 모자라 재탕, 삼탕하는 매너리즘에 젖어 있는 작가들, 프로그램이 무슨 예술이냐며 의미와는 담을 쌓고 지내는 작가의식 하나 없는 작가들이 브라운관을 주도하며 종횡무진하고 있다.

작가들은 분명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 밭에 정서와 감성의 씨를 뿌리는 농부다. 만약 농부가 뿌리는 그 씨가 사람을 해하는 독초이면 수많은 사람들의 심전(心田)에는 독초가 자란다. 그리고 그 씨가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약초라면 약초가 된다. 요즘 우리 마음의 밭에 독성이 너무 강한 수많은 독초가 자라고 있다. 그 독초를 뿌리는 작가들의 홍수 때문이다. 그 독초로 인해 나날이 정신은 혼탁해지고, 정서는 황폐화되며, 감성은 자극적이 돼가고 있다.

최근 KBS 특집극 ‘유행가가 되리’로 또 한번 호평을 받은 노희경은 “작가는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매개체 인 것 같다. 신에게서 먼저 깨달음을 얻고 이것을 인간에게 전해주는 매개체 말이다”라는 표현을 건넨 적이 있다. 노희경의 표현에서 연상되는 것은 작가는 인간에게 유용한 불(드라마)을 건네주고 신들의 미움을 받아 절벽에 걸려 끊임없이 독수리들에게 간을 쪼이는 고통을 감내하는 프로메테우스가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유감스럽게도 프로메테우스 같은 작가는 점점 더 줄어만 간다. 안타까운 일이다.

(마이데일리 / 배국남 기자 2005-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