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최고의 예술작품은 고대 한국인이 만들었다

인간에게 소유 욕구가 자리 잡자 자신의 몸에 무언가를 장식하거나 갖고 다니는 장식품들이 태어났고, 무언가를 전달하고 표현하겠다는 욕구가 생기자 현대인의 감각으로 보아 예술 즉 그림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생겼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소위 고대 예술이 태어나는데 전자는 작은 조각품이나 생활용구로 볼 수 있고 후자는 바위그림과 같은 예술작품으로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두 분야 모두 세계적인 유산을 갖고 있다.

전자는 후기구석기시대의 흥수아이가 발견된 충북 청원군 문의면 노현리 두루봉의 또 다른 동굴인 제2동굴에서 출토된 소형 인물상이며 후자는 울산 대곡리 반구대 바위그림이다.

놀랍게도 두루봉에서 발견된 소형인물상은 무려 20만 년 전의 인간이 만든 작품으로 추정되어 지금까지 알려진 인간의 작품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년대가 높다. 또한 반구대 바위그림은 단일 바위그림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이며 수많은 동물들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 고대인들의 교과서라는 말도 있다.

세계 최고의 조각상으로 볼 수 있는 소형 인물상을 설명하기 전에 대곡리 반구대의 많은 그림 중에서 가장 고고인류학자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는 성기를 고추 세우고 있는 남자의 그림을 중점적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그림은 크로마뇽인이 그린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에서도 발견된다. 시대와 장소를 달리하는데도 불구하고 같은 개념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데 학자들이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반구대의 그림을 보다 이해하기 쉽도록 라스코 동굴의 그림부터 설명한다.

 
   
 
 
충북 청원군 문의면 노현리 두루봉 동굴 출토 뼛조각 인물상, 20만 년 전 구석기인들이 사슴뼈에 새긴 이 조각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물 조각상으로 볼 수 있다.


<세계를 놀라게 한 크로마뇽인의 그림>

프랑스 남서부의 오리냐크 지역에는 크고 작은 30여 개의 선사 시대 동굴이 있는데, 그 중에서 라스코 동굴이 가장 유명하다. 동굴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대체로 1만5000년 내지 1만7000년 전으로 추정한다. 오리냐크의 라스코 동굴은 1940년 어린이들의 호기심 때문에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 고장의 나지막한 언덕에는 조그마한 구멍이 있었는데 어린아이들은 그곳에서부터 다소 멀리 떨어진 산 중턱에 있는 작은 성까지 통하는 길이 있다고 믿었다. 마르셀을 포함한 네 명의 소년은 정말로 통로가 있는지 탐험하기로 결정한 후 우선 지름이 약 60센티미터 가량 되는 조그마한 구멍에 돌을 떨어뜨려 보았다. 그랬더니 한참 후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와서 상당히 깊은 구멍이라는 것을 알았다. 소년들은 그곳을 파헤쳐 사람의 몸이 들어갈 만하게 만든 다음 한 사람씩 기어서 동굴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곳은 그들이 처음에 상상하던 것과 같이 성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아니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을 놀라게 한 것은 동굴 깊숙한 곳에 수많은 동물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동굴의 그림 내용을 곧바로 학교 선생님에게 보고했다. 그것이 바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라스코 동굴을 찾아낸 전말이다.

필자가 현장을 방문했을 때 안내인이 설명하는 라스코 동굴의 발견에 얽힌 에피소드가 믿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이 동굴 입구와 연결되었을 것으로 생각한 성이 너무나도 멀고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동굴 중에 하나가 우연하게 발견되었다는 것이 시사해주는 것은 매우 크다. 엄밀한 의미에서 아이들이 당초에 상상하던 성까지 연결되는 통로는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갖고 있었던 상상력은 틀린 것이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성까지 연결되는 통로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조그마한 구멍을 판 후에 동굴로 들어갔고 결국은 성까지의 통로보다 더 중요한 동굴을 발견했다. 다소 허무 맹랑한 상상력이나 꿈 이야기를 모두 경원시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동굴 발견했던 1940년 당시 프랑스는 독일에 점령된 독일 점령 지구와 독일 정권에 의해 세워진 비시 정권이 직접 통치하는 지구로 나뉘어져 있었다. 라스코 동굴이 위치한 지역은 비시 정권의 통치 지구여서 독일 점령 지구로부터 피난을 온 사람들이 많았고 전쟁 기간 중에는 연합군의 지원 무기 은닉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라스코 동굴은 전쟁이 끝난 1948년부터 비로소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기 시작한 지 12년이 지난 1960년부터 푸른곰팡이들이 기생하고 석회암 암벽에도 하얀 얼룩이 생기자 라스코 동굴은 1963년에 동굴 벽화의 일반 공개를 금지했다. 그 후로는 정부 기관의 추천장이 있는 전문가에 한해서 하루 6명 이내의 인원에게만 동굴 벽화의 관람이 허용되고 있다. 그리고 일반 관람객을 위해서는 동굴이 발견된 바로 옆 장소에 라스코 동굴과 똑같이 모방한 동굴을 만들어 공개하고 있다.

동굴을 처음으로 발견한 마르셀이라는 소년은 1980년대 말 필자가 현장을 방문할 때까지 동굴의 관리인으로 봉사했다.

 
   
 
 
라스코 동굴의 누워있는 사람과 들소.

라스코 동굴을 비롯한 선사시대의 바위그림들이 인류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간이 인간답게 생활할 수 있는 여건, 즉 그림들을 그릴 수 있는 문화생활 여건이 조성되려면 적어도 청동기로 접어들어야 한다고 믿었는데 그 속설이 깨졌기 때문이다.

학자들에 따라 청동기가 기원전 7~8천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학자들도 있지만 대체로 기원전 4~5천 년 전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라스코 동굴의 경우 그림이 그려진 시기를 15000년에서 17000년 전으로 추정하며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은 14500년 전으로 추정하지만 프랑스 쇼베 동굴의 벽화는 무려 3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타제석기를 사용하던 구석기인들이 현대인들도 그리기 어려운 정교한 그림을 그렸다는데 놀라움보다도 인류의 문화생활 여건이 생각보다 오래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증거라는데 큰 가치가 있는 것이다.

라스코 동굴의 입구에 있는 중앙 홀에는 유명한 말과 황소들이 그려져 있다. 조사 결과 벽화는 모두 800점이 넘었다. 들소, 야생마, 사슴, 염소 따위가 주로 그려져 있고 드문드문 고양이나 주술사로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중앙 홀에 그려진 검은 소는 가로가 5미터도 넘는다. 빨강, 검정, 노랑, 갈색을 칠한 채색화가 많지만, 홈을 판 선각(線刻) 그림도 있다. 벽화의 짐승들은 하나 같이 역동적이고 생생한 모습을 띠고 있다. 뛰어 다니는 들소, 쉬고 있는 사슴,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는 말 등 그림들은 지극히 사실적이다. 지구상에 서식하던 어느 동물과도 닮은 데가 없는 일각수 그림은 상상의 동물을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동굴 안에 그려진 것은 당시에 그들의 기술로 사냥이 가능했던 사냥의 대상물일 것으로 여겨진다. 사자나 이리 따위의 맹수는 결코 사냥의 대상물이 아니기 때문에 많이 그리지 않았으며 또 이 무렵에 무수히 번성하고 있었던 순록(馴鹿)도 사냥하는 데 별로 힘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많이 그리지 않았으리라고 추측한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사냥의 광경을 그린 그림 등을 감안할 때 동굴 벽화란 두 가지 목적으로 그려졌다고 추정한다. 첫째는 주술 용도이고 두 번째는 사냥시의 요행을 바랬다는 것이다.

우선 벽화에 묘사된 동물의 형상이 토템으로서 아마도 그 형상들이 상징하는 힘과 속성에 일체감을 느끼는 집단이나 부족에 의해 의식이 진행되는 중에 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들소나 코뿔소들은 인간보다 힘이 세고 위험하므로 동물들의 힘을 억누르거나 줄이기 위해 사냥에 앞서 뭔가 주술적인 행사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이런 예는 현대에도 종종 볼 수 있다. 독일의 인류학자 프로베니우스가 1905년 아프리카를 탐험했을 때의 일이다. 예비 식량이 바닥나자 안내원인 피그미족에게 영양을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피그미족은 수렵이 주업이라 영양 한 마리쯤은 쉽게 잡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피그미족은 오늘은 준비가 안 되었으니 다음 날에 사냥을 하자고 거절하는 것이었다. 다음 날 피그미족은 새벽에 적당한 장소를 잡고 의식을 치르기 시작했다. 먼저 주문을 외면서 집게손가락으로 영양의 그림을 그린 다음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아침 햇살이 땅 위에 그려 놓은 그림 위에 비치자 영양의 그림을 향해 활을 쏜 다음에야 사냥에 나섰다.

두 번째는 사냥꾼들이 사냥물을 많이 잡을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나 묘사된 동물이 더 많이 나타나도록 하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호모엘렉투스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는 조각, 15만~0만 년 전에 생존했던 원시인류 호모에렉투스에 의해 조각된 것이라는 설명도 있지만 자연 풍화현상에 의해 우연히 사람 얼굴 모양이 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빙하기 직후의 인류는 동굴 안에서도 햇빛이 비치는 곳이라든가 바위틈에서 생활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런데 동굴 그림들은 동굴 안에서도 깊숙한 구석에 그려져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더구나 벽화 속의 그림들은 흙이나 나무로 만든 받침대를 사용해야만 손이 닿을 수 있는 높이에 그려져 있다. 이것은 예술적인 목적으로 벽화를 그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들이 예술적인 감각을 고려하여 그림을 그렸다면 들소나 사슴들을 동굴 입구에 그렸을 것이다.

그런데도 현대인들이 일부러 들어가기조차 꺼려할 정도로 깊은 구석이나 들어가더라도 나오기가 위험하고 힘든 은밀한 장소에다 그림을 그렸다. 이것은 동굴 그림에 있어 벽에 그려진 형상 자체보다는 벽화가 그려진 벽면의 위치와 벽화에 실제로 배치된 형상들의 형태를 더 중요시했다는 뜻이다.

현대인들도 들어가기가 두렵고 설사 들어갔더라도 나오기가 위험하고 힘든 그런 은밀한 곳에다 그림을 그린 이유를 고고학자 혹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벽화를 그린 화가들은 우선 사자와 거대한 곰의 서식처로서 화랑으로 쓰일 동굴을 찾아야 했다. 또 고작 횃불이나 동물과 고래 기름 등불을 밝혀놓고 작업을 시작해야 했다. 그러다가 불이 꺼졌을 때 부싯돌로도 불을 켤 수 없는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이들이 익숙한 외부 세계와 동굴 입구에 있는 가족들의 생활공간과 멀리 떨어진 땅속 깊숙한 곳에 동물의 형상을 재현하려는 의지가 얼마나 강렬했는지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짐승을 실제와 꼭 닮게 그렸다. 이 시대의 기본 생활 수단은 수렵과 채취였다. 그래서 무엇보다 자연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특히 짐승들의 동작과 습관을 자세히 관찰할 필요가 있었고, 짐승들을 재빠르게 죽일 수 있는 용기와 기술을 익혀야 했다.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었다는 뜻이다. 무리 중에 그림을 제법 잘 그리는 사람이 동굴에 남아 짐승들을 그림으로써 동료들의 용기를 북돋워 주었을 것이다.

고대 인류에게 있어서 들짐승들은 사냥의 대상인 동시에 신비스러운 동물이었다. 그 당시에 인간의 존재 가치는 오히려 동물보다 낮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동물들이 있어야 자신들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틀림없이 동물을 인간보다 더 중요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렇지만 인간은 동물이 갖지 못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숫자가 늘어나고 동물의 습성을 파악하여 손쉽게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양식과 필수품을 얻을 수 있게 되자 고대 인류는 원시적 용맹성과 자연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는 대신 합리적 사고를 갖게 된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동물들을 용맹스럽게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가축으로 사육하는 묘수를 발견하는 것이다.

가축을 사육하면서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자 더 이상 주술적인 의미의 그림은 필요 없게 된다. 인간은 고대 인류가 지녔던 그림 솜씨를 잊어버리고 만다. 인간이 크로마뇽인의 그림 솜씨를 되찾게 된 것은 그들이 동굴 그림을 그린 지 적어도 몇 천 년 후의 일이다.

<성기를 과장한 한국인>

라스코 동굴 벽화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다른 동굴에서 찾아볼 수 없는 크로마뇽인의 그림이라는 것을 앞에서 설명했다. 한 남자가 창에 찔려 창자가 쏟아져 나온 들소 옆에서 두 팔을 벌린 채 뒤로 커다란 성기를 내보이며 벌렁 자빠져 있는 모습이다. 들소에게 치명상을 주기는 했지만, 자신도 역시 상처를 입고 쓰러진 상황을 그렸는데 성기가 과장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프랑소와 보르드 교수는 이 장면에 대한 해석을 두 개의 가설과 연결시켜 설명했다.

“이 그림은 하나의 공상과학소설과 유사하다. 새를 토템으로 삼은 사람이 들소사냥 도중에 죽었을 때 코뿔소 토템을 가진 그의 친구들이 이 동굴에 와서 친구의 죽음과 친구를 대신한 복수하는 장면을 그렸다. 그 들소는 창과 화살을 맞았고 아마도 코뿔소의 뿔에 받힌 듯 창자가 터져 나왔다.”

반구대의 바위그림에도 성기를 과장되게 그렸다. 반구대 바위그림은 70미터 높이의 바위벼랑 한 부분을 캔버스로 삼아 그렸는데 그림은 높이 2.5미터, 너비 9미터에 이르는 부분에 밀집돼있으며 단일 바위그림으로는 세계 최대의 작품이다.

황규호는 학자들이 반구대 바위그림을 언제 그렸는가를 정확히 단정하지는 못하지만 대체로 신석기인과 청동기인들이 연이어 한 자리에 만들었다고 추정한다고 적었다. 학자들이 이들 그림을 신석기인들과 청동기인들이 시대를 달리하여 그렸다고 추정하는 것은 그림의 수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곡리에 일찍 들어온 신석기인들은 쪼기로 평면그림을 그렸고 뒤이은 청동기인들은 신석기인들과는 수법을 달리한 선그림을 그렸다는 설명이다.

 
   
 
 
농경문청동기 확대도.

신석기인들은 고래를 중심으로 한 물짐승과 사슴 위주의 뭍짐승을 주로 그렸다. 고래떼 위쪽과 사슴떼 위쪽에는 각각 사람 한 명 씩을 배치했다. 반면에 청동기인들은 교미하는 멧돼지, 거꾸로 뒤집힌 큰 고래는 물론 포획 장면의 짐승과 줄무늬가 난 짐승들을 표현했다. 이곳에 두 종류의 인물상이 있는데 하나는 성기를 내민 남자로 신석기 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며 다른 하나는 청동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는데 얼굴이 크게 클로즈업되어 있다.  

먼저 청동기인의 얼굴을 설명하면 얼굴그림은 전체윤곽이 팽이모양의 삼각형이다. 눈썹과 코가 유난히 길고 눈은 크다. 얼굴윤곽이 삼각구도라는 점에서 턱이 뾰족해 보여야 할 텐데,턱이 빈약스럽지 않은 이유를 황규호는 입가에 위엄이 담겼기 때문으로 설명했다. 귀는 왼쪽 하나만을 달랑 새겼는데 수염도 적당히 자라 얼굴이 범상치 않다. 그래서 얼굴의 주인공을 대곡리 청동기인집단의 우두머리쯤으로 추정한다.

성기를 내민 남자의 그림은 반구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소 시대는 늦지만 대전에서 출토된  ‘농경문청동기(農耕文靑銅器)’에도 따비를 이용해 밭을 갈고 있는 남자의 성기가 과장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청동기는 하반부가 떨어져 높이 7.3센티미터, 너비 12.8센티미터에 두께 1.5밀리미터 크기이며 앞뒷면에 광택이 나고 제작수법이 정교하다.

성기를 내놓고 있는 그림은 뒷면에 그려져 있는데 왼쪽 구간에는 사람이 손을 앞으로 내밀고 머리 뒤에는 가늘게 상투 같은 것이 달려있다. 오른쪽 구간에 밭고랑을 따비로 갈고 있는 남자는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 듯 머리가 오른쪽으로 몰려 길게 뻗치고 있다. 또한 따비질하는 발치 아래로 여러 밭고랑을 상징하는 가로줄을 그어 놓았는데 남자 몸뚱이 전체에는 힘이 가득 들어있고 성기가 삼각형으로 불뚝 튀어나왔다.

밭고랑 밑에는 금방 땅을 내려찍을 듯 두 손으로 괭이를 높이 받쳐 든 인물을 배치했으며 청동기 앞판의 왼쪽에는 상투가 달린 사람이 손을 내밀고 있다. 밭갈이하는 사람은 남자, 괭이질하는 사람은 여자를 표현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 농경문청동기는 기원전 3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밭가는 형상은 이 시기에 이미 본격적인 농경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특히 따비와 괭이를 사용했다는 것은 고도의 농경문화가 정착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나뭇가지에 새가 앉아있는 형태인데 이것은 새가 인간의 영혼을 하늘로 안내한다는 상징적인 의미 내지는 시베리아 지역에 널리 퍼져있던 샤먼의 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추정한다. 특히 스키타이 문화 즉 북방문화의 유입을 뜻한다고도 설명된다고 이강승은 적었다.

농경문청동기에서 남자의 성기를 불뚝 튀어나오게 한 것은 풍어와 풍요로운 수확을 기원하는 일종의 주술사 역할을 하고 있다고 김종대는 설명했다. 즉 보다 많은 수확을 기대하면서 그림에 자신들의 염원을 표현했는데 그것을 남자의 성기로 구현한 것이다(고대인들이 풍만한 여자를 그리거나 조상을 만든 것도 같은 의미로 추정).

크로마뇽인이 그린 라스코 벽화도 같은 의미로 그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라스코동굴과 한반도의 바위그림과는 거의 1만여 년이 차이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갖고 있었던 생각은 유사했다고 볼 수 있다.

크로마뇽인이 그린 그림은 인간이 매우 오래 전부터 고의적 즉 어떤 의도를 갖고 제작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고 앞에서 설명했다. 그렇다면 인간이 언제부터 그림이나 조각품을 만들기 시작했을까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예술 작품 제작에 관한 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앞선 증거를 갖고 있다. 바로 두루봉에서 발견된 중기구석기시대의 인물상으로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알려진 세계 최고의 예술작품이다. 추정연대가 무려 약 2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년대만으로 보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조각상인 것이다.

<세계 최고의 예술품은 선조들이 만든 한국인상>

 
   
 
 
볼롬보스에서 발견된 7만 년 전 추상화.
흥수아이가 발견된 장소 인근인 제2동굴에서 발견된 인물상은 사슴 왼다리 위쪽 뼈를 쪼아 조각한 것으로 높이 27밀리미터, 가로 41밀리미터, 무게 49.8그램에 불과한 뼛조각이다.

비록 코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눈과 입은 뚜렷이 표현되었고 귀도 어느 정도를 형상화했다. 두루봉 뼛조각 인물상은 한마디로 귀여운 모습인데 누가 보더라도 인간이 인공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얼굴 전체를 둥글게 만들 작정을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여의치 않자 관절부분을 다듬어 평행을 이루게 했다. 왼쪽 모서리를 떼어내려고 쪼았던 흔적이 본의 아니게 귀가 되어버렸다. 눈과 입은 뾰족한 새기개를 가지고 만들었는데 오른쪽 눈은 2번, 왼쪽 눈은 1번을 쪼았다. 입 만큼은 5번 정도를 쪼아서 벌린 입을 만들어냈다.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이 서로 차이를 보이고 볼록한 면을 얼굴이 되도록 한 것도 다분히 의도적이다. 아래턱은 약간 길쭉하게 표현했는데 품에 넣고 다녔던 지닐 예술품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인물조각상이 출토된 두루봉 동굴 역시 석회암으로 되어 있다. 이융조 교수팀이 지난 1976~8년까지 3차례에 걸쳐 발굴했다. 불을 피우는 화덕자리와 숯, 열매를 깨는데 썼던 돌망치, 짐승의 가죽을 벗기거나 자르는데 사용한 긁개와 자르개 등의 석기도 발견되었다.

이 동굴에서는 지금은 멸종되어 사라질 젖소·쌍코뿔이·큰원숭이·사슴 등의 뼈도 나왔는데 이들 모두 고온에서 사는 동물로 이 지역이 과거에는 아열대기후였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많이 잡힌 사슴의 이빨을 분석한 결과 사슴사냥은 9~10월에 성행했으며 이 동굴에는 5식구가 2천7백일 정도 살았다고 추정되었다.

구석기나 신석기인들도 장식품을 패용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데 그 대상으로 자신과 닮은 것 즉 인간 형태도 선호하는 물품 중에 하나일 것이라는 추정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얼굴에는 눈·코·입이 달려있다. 사람의 몸을 대표하는 부분이 얼굴이기도 하다. 얼굴은 인격을 상징하거니와 저마다 독특한 특징을 갖는다. 그래서 원시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얼굴을 신앙의 대상으로도 삼았다고 볼 수 있으므로 더욱 인간이 만든 작품에 대한 비중이 커진다고 볼 수 있다.

오스트리아의 인류고고학자 요하네스 마링거는 가족일원의 머리뼈 즉 조상의 머리뼈를 빌려 수호신의 역할을 기대했다고 주장했다.

두루봉 조각상도 이와 같은 용도일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런 와중에서 자신과 비슷한 사람의 얼굴을 그리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말을 역으로 말한다면 조그마한 인물상이지만 바로 우리의 선조들이 바로 우리들의 얼굴을 묘사했다고도 볼 수 있다고 황규호는 적었다.

두루봉 동굴에서 발견된 조그마한 인물상을 인간이 만든 작품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지금까지 인간이 그린 가장 오래된 예술작품을 7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했기 때문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서 290킬로미터 떨어진 블롬보스 동굴에서 인간이 그린 추상화가 그 주인공이다. 이 추상화는 철광석의 일종인 ‘오커(ocher)’의 표면을 평평하게 한 다음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해 균등한 간격으로 대각선 여러 개를 긋고 다시 반대방향으로 대각선을 그어 마름모꼴과 삼각형을 표현했다. 학자들은 이 작품을 증거로 인류가 그동안 알려진 것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추상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해왔다.

물론 2001년 이탈리아 북서부 보르조나스카 지방에서 고고학자 피에트로 가이에토 박사가 발견한 사람 얼굴 형상의 암석이 15만〜20만 년 전 생존했던 원시인류 ‘호모에렉투스(Homo erectus)’에 의해 조각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자연 풍화현상에 의해 우연히 사람 얼굴 모양이 된 것이 아니라, 암석의 한쪽은 턱수염이 있는 얼굴, 반대쪽은 턱수염이 없는 얼굴로 깎아낸 것이라는 설명이다.

가이에토 박사는 문제의 돌과 암석에는 2개의 눈과 입, 넓적한 코가 분명히 나타나 있다며, 당시 인류가 제례(祭禮) 의식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며 선사(先史)시대인 15만 년 전 멸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원시인류 ‘호모에렉투스’가 조각을 할 능력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조각상을 본 많은 고고학자들은 원시 인류가 예술에 필요한 기호나 상징을 생각해낸 것이 아니라 단순한 지질학적 변형에 의해 인간이 만든 것처럼 보일뿐이라고 반박한다. 설사 인간의 작품이라고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두루봉 조각상보다 다소 늦은 연대이다.  

한편 프랑스 북서부 코자르니카 동굴에서 보르도대학 장 뤽 구아델리 박사팀이 발굴한 기호가 새겨진 것으로 추정하는 동물뼈도 있다. 양이나 소의 뼈로 길이 8센티미터에 나란한 선 모양의 홈이 깊게 패어 있는데 추정 년도가 무려 140만 년 전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의식적으로 만든 작품이라기보다는 아무 의미 없이 임의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140만년전 기호가 새겨진 것으로 추정하는 동물뼈, 프랑스 북서부 코자르니카 동굴에서 발견된 것으로 양이나 소의 뼈로 길이 8cm에 나란한 선 모양의 홈이 깊게 패어 있다.

두루봉에서 발견된 조그마한 조각상이 얼마나 인류사에서 큰 가치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들의 습성 중에 하나는 외국인들의 발표는 그대로 믿지만 우리나라에서 발표된 것은 일단 의심한다는 지적도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한국인의 과거사를 왜곡하던 습성이 전해져 내려온 것이라는 설명도 있지만 우리 것이 무조건 좋거나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올바른 행동이 아님은 분명하다.

<뉴허량(牛河梁)의 여신>

선조들이 그린 인물상에 대해 좀 더 설명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두루봉의 인물 조각상을 제외하고 이후의 유적지에서 고인과 신인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조각품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음 타자는 거의 20만 년이 지난 중국 랴오닝성(遼寧省)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 유물 중에서 발견된 여신상이다. 따링허(大凌河)가 지나는 능원현과 건평현에 걸쳐있는 뉴허량(牛河梁) 유적으로 이 지역은 고조선의 근거지라 알려져 있으며 중국에서 연대가 가장 앞서는 것이다. 기원전 3500년 전으로 밝혀진 홍산문화 유적에서 여신묘(女神墓)와 적석총, 제단 유적과 함께 여신상이 발굴되었는데 <중국사회과학원>의 왕웨이 교수는 홍산문화의 유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오랫동안 사람들에 의해 문화 발전이 낙후된 곳이라고 여겨졌던 중국 동북 지역의 서부에서 지금으로부터 5천여 년 전에 발달한 문화가 꽃피었다는 것에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이로써 선사 시대 사람들의 문화와 사회와 발전 수준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고 있다.’

동방의 비너스라고도 불린 여신상은 여신묘에서 발견되었는데 흙을 빚어서 사람 크기로 만들어 구운 소조등신상(塑造等身像)이다. 여신상 얼굴은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우측 귀와 코허리가 약간 훼손되었으나 얼굴 윤곽을 알아보기에는 별지장이 없다. 두상의 길이는 22.5센티미터, 얼굴 넓이는 23.5센티미터로 실제 사람 크기만 하다.  

 
   
 
 
뉴허량의 여신상, 중국 요령성 능원현과 건평현에 우하량 신석기유적에서 나온 여신상으로 코허리를 빼고는 근대 한국인의 얼굴과 유사하다.

얼굴은 선홍색을 띠고 입술은 붉게 채색되어 있으며 머리 뒤쪽 부분은 평평하여 벽에 걸어 놓기에 좋은 형태이다. 둥글넓적한 얼굴에 광대뼈가 튀어나왔고 눈꼬리는 위로 올라가 있으며 눈썹은 선명하지 않고 콧대는 낮고 짧으며, 코끝과 콧방울은 둥그스름하다. 입술은 비교적 큰 편이고 윗입술은 얇으며 입가는 둥글고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가 미소를 머금고 있으며, 아래턱은 둥글면서 뾰족하다. 눈은 제법 크게 만들었고 옥구슬을 눈동자로 박았다.

왕웨이는 여신상의 얼굴 생김새는 뚜렷하게 몽골 인종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황규호는 빈약한 코허리를 빼면 우리들과 비슷한 얼굴임을 곧바로 알 수 있다고 적었다.

중국 동북지방 유적 가운데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교외의 샤오잉쯔(소영자)청동기 유적에서도 예술적으로 뼈를 조각한 인물상이 출토되었다. 흔히 골제인물상으로 부르는 이 조각품은 청동기시대 초기의 돌널무덤(석관묘)에서 나왔다. 짐승의 뼈를 소재로 얼굴모양을 다듬고 나서 그 밑에다 긴 꽂을대를 갖추었다. 마치 머리통이 큰 비녀를 연상시키는 이 조각품의 길이는 18센티미터, 얼굴에다 부릅뜬 눈, 불거져 나온 광대뼈, 굳게 다문 입을 새겨 전체적으로 고집스러운 인상을 풍긴다.

돌널무덤에서는 옥으로 만든 부장품도 함께 발견되었고 움집터에서는 민무늬토기(무문토기)도 쏟아져 나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간주된다. 이 유적은 1937년 일본의 괴뢰정권이라 불리는 만주국이 있을 때 일본인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이 당시 한반도에는 청동기가 없었다는 일본인들의 식민사관에 의해 샤오잉쯔 유적도 청동기가 아니라 석기시대라고 터무니없이 년대를 올려 잡는 해프닝이 벌어진 유적으로도 유명하다.

함북 웅기군 굴포리 서포항에서 발굴된 유적은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가 겹친 복합유적이다. 아래층에는 신석기인들이 살았던 삶의 터전이 겹겹이 쌓여 있는데 그 윗층 즉 청동기인들이 살던 층에서 남성인물상이 발굴되었다. 찰흙을 빚어 구운 테라코타인데 4점이나 된다. 이 가운데 키가 가장 큰 인물상은 12센티미터이고 그 다음은 9센티미터 7센티미터 순이다.

특이한 것은 얼굴의 기본구도는 모두 역삼각형인데 몸체는 제 각각 다른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삼각형의 얼굴 모서리 부분에 구멍을 뚫어 눈과 입을 표현했는데 현대 작가들의 추상조각이나 마찬가지이다. 눈과 입을 생략한 것도 있는데 남자의 성기를 뜻하는 듯 중앙에 불거진 돌기가 붙어있다. 배꼽으로 보기에는 자리를 너무 낮게 잡아 마음먹고 표현한 남성 성기로 해석한다.  

서포항인들은 장방형의 반움집 안에서 살았는데 여러 가지 생활용구들도 함께 발견되었다. 짐승의 뼈와 돌을 가지고 만든 물건들은 예술적 심미안을 가지고 있는데 큰 짐승의 정강이 뼈에다 기다란 삼각형 무늬를 맞물려 연속으로 새긴 바늘통은 요즘 공예전에 내놓아도 입상할만한 예술품이라는 지적도 있다.

서포항유적에서 나온 뼈피리에는 각별히 눈길이 가는데 현대인들이 불고 있는 전통악기 피리와는 달리 13개의 구멍이 나 있다. 이 태고의 피리는 우리 최초의 악기로 보아도 좋을듯 한다. 서포항 유적을 고조선 시대로 본다면 고조선시대에 악기를 사용했다고 추정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종호 / 과학저술가 

이종호 :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국정브리핑 2005-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