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발해의 꿈

발해가 우리 역사라고 주장한 사람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득공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발해를 그저 신라와 이웃한 나라쯤으로 여겼다.

발해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은 신당서(新唐書) 등 중국의 역사서에서 비롯됐다.

그렇지만 시조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의 후예로 밝혀지면서 발해는 움직일 수 없는 우리 역사가 된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통일신라와 발해가 병존한 시기를 "남북국시대"라 칭할 정도로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발해의 후손들이 금(金)을 세우고 후금(後金)을 거쳐 중국 전역을 통일한 청(淸)으로 이어졌다는 사실(史實)을 들어 중국에 대한 우리의 연고권을 주장하기도 한다.

특히 중국이 동북공정에서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로 왜곡해 편입시키려 하는 현실에서 우리의 대응논리로 발해를 활용해야 한다는 얘기다.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발해 뗏목탐사"는 이와 무관치 않았다.

탐사대장 방의천씨가 "우리 땅의 뿌리를 찾는 일은 곧 나 자신의 뿌리를 찾는 일"이라고 말한 대목을 봐도 그렇다.

지난 1998년에 이어 "발해의 꿈"이 또 한번 난파된 것은 애석한 일이기는 하나 ,앞으로 도전이 계속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하면서 성공에 대한 염원이 더욱 커지는 것 같다.

역사서를 보면 발해는 일본에 36번 사절을 보낸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항해를 할 때는 바람이 절대적이어서 일본에 갈 때는 늦가을 부터 초봄에 걸쳐 부는 북풍을, 귀환할 때는 늦봄부터 여름 사이에 부는 남서풍을 이용했다.

그렇다고 뗏목을 타고 간 것은 아니다.

수 백명을 실을 수 있는 군선을 만들 정도의 조선술이 발달했었다고 한다.

뗏목은 범선 제조비용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아 불가피 선택한 것이라고 한다.

후원자가 선뜻 나서지 않은 탓이다.

1천3백년전의 우리 조상의 삶을 찾아 장정에 오르는 일은 그야말로 의미있는 일임에 틀림없으나 혹자는 안전을 너무 소홀히 한 무모한 탐험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다만 한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무모한 탐험을 통해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경제 / 박영배 논설위원 2005-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