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에 밀린 후한서의 복권을 위하여

기수연씨, '후한서 동이열전 연구' 출간

전한서(前漢書)를 편찬하는 반고(班固)에게 약 2세기 앞선 선배인 사마천(司馬遷)과 그의 사기(史記)는 그가 지향한 모델이자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런 반고도 그를 뛰어 넘으려 안간힘을 쓰는 까마득한 후배를 만났다.

범엽(范曄.398-445). 남조(南朝) 명문 출신인 그는 송(宋) 왕조에 출사해 야심만만하게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린다면 "천하의 기작(奇作)"을 꿈꾸었다.

범엽은 말년이 대단히 불행해 결국 모함에 걸려 사마천이 궁형(宮刑)의 치욕을 당한 것과 비슷한 처지로 전락해 결국 옥사하고 만다.

사마천이 궁형의 분노를 삭이며 사기 편찬으로 그 출구를 찾았듯이 범엽 또한 이러한 고난의 와중에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80권, 지(志) 10권의 총100권짜리 방대한 후한서(後漢書)를 옥사 직전에 완성한다.

송서(宋書) 권69에 수록된 그의 전기인 범엽전(范曄傳)에 의하면, 자만심이 대단했던 범엽은 후한서가 "한서(漢書)를 능가하는 작(作)"이라고 확신했다.

이처럼 범엽은 곳곳에서 반고를 겨냥한 언급들을 남겨놓았다. '타도 한서'를 위해 범엽은 전대(前代) 어느 역사서도 시도하지 않은 작업들을 감행했다.

예컨대 후한왕조를 돌이킬 수 없는 붕괴에 빠뜨린 파벌집단을 정리한 당고열전 항목을 편성하는가 하면 환관(내시)들을 역사의 전면에 내세운 환자열전, 문학가들을 모은 문원열전, 도사들의 전기인 방술열전, 은둔해 살아간 사람들을 위한 일민(逸民)열전과 열녀들의 이야기인 열녀전도 만들었다.

이런 후한서에서 매우 주의할 것은 범엽이 그보다 약 150년 전에 서진(西晉)시대 진수(陳壽. 233-297)가 편찬한 위ㆍ촉ㆍ오 삼국의 정사인 삼국지(三國志)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쉽게 말해 후한서를 쓰는 범엽에게 삼국지 정도는 경쟁 상대로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한데 한국학계에서는 전한서 대(對) 후한서의 구도가 아니라, 후한서 대 삼국지를 맞세워 어떤 것이 사실에 충실한가 아닌가 하는 기이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삼국지와 후한서가 도대체 어떤 관계에 있기에 한국고대사 전공자들이 후한서와 삼국지, 그것도 이들 둘을 '한 통속'으로 취급해 둘 중 어느 기록이 맞느니 틀리느니 하는 논쟁에 휘말려 있을까?

두 사서 모두 동이열전(東夷列傳)을 수록하고 있고, 그것들이 부여ㆍ고구려ㆍ한(韓. 삼한)과 같은 소위 한국고대사와 관련되는 지역 혹은 왕조들에 대한 기록이며, 더구나 그 동이열전 기록이 상당 부분 겹치고 있기 때문이다.

전해종 서강대 명예교수 조사에 따르면 두 사서의 동이열전 중 전체 4분의 3 정도가 합치되고 있다. 후한서 동이열전을 기준으로 할 때 삼국지 동이열전에 보이지 않는 내용은 4분의 1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중복' 현상에 대한 학계의 설명은 간단하기 짝이 없었다. 150년 뒤에 출현한 후한서가 삼국지를 베꼈다시피 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식민지시대 이래 한국고대사에 주력한 일본인 역사가 미시나 아키히데(三品彰英)는 삼국지 동이열전 중 한전(韓傳)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진왕(辰王)이라는 존재가 후한서 동이열전에 보이는 현상에 대해 "궤상(机上)의 조작", 즉, 범엽이 책상 머리에 앉아 가짜로 만들어 낸 것이라고 단언했다.

전해종 교수 또한 "후한서 동이열전은 대부분 삼국지 동이전 기사의 개편일 뿐"이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거의 없는 작품"이라고 했으며, 두 동이열전 한전(韓傳)을 비교한 역사학자 천관우는 후한서 한전이 내용상의 원형을 왜곡한 개악을 감행했다고 비판했다.

천관우가 말한 내용상 원형은 말할 것도 없이 삼국지 동이열전의 한전을 말한다.

삼국지 동이열전을 중시하면서 후한서의 그것을 경시하는 현상은 급기야 삼국지에는 보이지 않으나 후한서에만 보이는 기록들에 대한 말살 움직임을 낳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후한서 고구려전에만 보이는 구려(句驪.고구려)에 의한 후한 광무제 건무(建武) 25년(서기 49) 봄의 우북평(右北平)과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 일대에 대한 침략 기사. 이들 지명은 현재의 베이징과 산시성(山西省)에 속한다.

이들 지역이 고구려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서 학계에서는 "믿을 수 없다"는 딱지를 붙이곤 했다.

또 다른 사례로는 후한서 부여국전에만 보이는 것으로 부여왕 시(始)가 후한 안제(安帝) 영초(永初) 5년(서기 111)에 보병과 기병 7-8천 명을 거느리고 낙랑(樂浪)을 침입해 그곳 백성과 관리를 죽였다는 기록을 들 수 있다.

이 때 낙랑이 학계 통설처럼 지금의 평양 일대에 있다면 도저히 나오기 힘든 기록이다. 이럴 때마다 학계가 늘 애용하는 수법이 있다. 기록이 잘못됐다고 하면서 '맞는' 기록으로 개작하는 수법이 그것이다.

부여에 의한 낙랑 침략 기록에 대해 도쿄제국대학 교수였던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가 1932년 '부여고'(扶餘考)라는 논문에서 낙랑을 현도로 '바로잡은' 이래 그 제자인 이병도를 필두로 이기백, 전해종까지 모두 이케우치를 추종하고 있다.

1970년대 이후 김해를 필두로 하는 옛 가야 영역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결과 창원 다호리와 김해 대성동 유적 등지에서 기원전후 각종 철기 유물이 쏟아졌다.

이런 조사성과를 바탕으로 고고학계와 역사학계는 가야가 '철의 제국'이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했다. 마침 이 때는 일본학계가 오래 전부터 주장하던 소위 임나일본부설 타파를 위해 국사학계가 온몸을 던진 시대였으므로, 시뻘건 녹이 가득 슨 철제 무기들을 내세워 일본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봐라. 너희들이 지배했다고 하는 가야는 이렇게 일찍 철기 문명에 도달했는 데도, 너희 일본이 어찌 감히 가야를 지배할 수 있단 말이냐?"

'철의 제국' 가야라는 국사학계의 신화를 뒷받침한 양대 기둥은 다호리 유적 등 을 필두로 하는 고고학적 출토 유물과 함께 삼국지 동이열전 한전 중에서도 가야 문화권이라고 할 수 있는 변진(弁辰), 즉 변한(弁韓) 조 다음 기록이었다.

"(변진에서는) 철이 나는데 한(韓)과 예(濊)와 왜인(倭人)이 모두 와서 사간다. "(國出鐵, 韓ㆍ濊ㆍ倭人, 皆從取之)

그렇다면 이런 삼국지 기록은 믿을 만한가? 우선 이 기록은 그 자체에서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변진에서 나는 철을 와서 사 가는 주체 중 하나로 한(韓)을 거론하고 있는데, 변진도 한(韓)에 속한다. 그러니 이 기록은 A가 철을 생산해서 A가 사간다는 뜻이 되어 버린다.

이와 대동소이한 구절이 후한서 동이열전 한전에도 보인다. 한데 이 후한서에서 제철 왕국은 변진(변한)이 아니라 신라가 속한 진한(辰韓)이다.

즉, 후한서 한전 중 진한 조에서는 "(진한에서는) 철이 나는데 예(濊)와 왜(倭) 와 마한(馬韓)이 모두 와서 사 간다"(國出鐵, 濊ㆍ倭人ㆍ馬韓, 幷從取之)라고 돼 있다. 그 자체 엉망진창인 삼국지에 비해 후한서가 조리정연함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이를 통해서도 후한서 동이열전이 삼국지 동이열전을 전재했다는 학계의 주류적인 설명은 말이 되지 않음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철을 생산해 이웃나라에 '수출'하는 주체가 삼한 중 변진이냐 진한이냐 하는 문제는 한국고대사의 지형도를 바꿀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이 지점에서 종래 한국 학계는 진한을 지목한 후한서를 버리고 삼국지를 선택한 것을 물론, 이런 문제투성 이의 기록을 발판으로 '철의 제국' 가야 운운하는 과대포장까지 일삼았다.

철 생산과 관련한 상반되는 기록 중에서도 후대에 편찬된 후한서가 사실에 가깝다는 방증은 한원(韓苑)이라든가 태평어람(太平御覽)과 같은 후대 기록에 삼국지가 아닌 후한서와 같은 기록이 인용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요컨대 후대에 편찬된 후한서가 삼국지를 베낀 것이 아니라, 삼국지도 후한서도 모두 같은 원전을 동시에 인용했으며, 이 인용 과정에서 삼국지가 혼란을 일으켜 거기에 수록된 기록이 엉망이 되어 버린 반면에 후한서는 그렇지 않은 셈이다.

그건 그렇고 잘못된 삼국지 기록을 토대로 변진, 즉, 가야가 철의 왕국이었음을 주장한 고고학계나 고대사학자들은 후한서 기록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까?

한 고고학자에게 문의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철 생산국이) 변진이건 진한이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진한이건 변한이건 비슷한 시기에 철기 유물이 다량 출토되고 있는데 그게 무에 대수냐?"라고 했다.

기원 전후 무렵에 철을 다량 생산하고 그것을 이웃 나라들에 수출까지 한 주체가 진한인가 변한인가가 왜 중요하지 않은지 참말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학예연구원 기수연(38)씨가 단국대 사학과 박사학위 논문을 손질해 최근 선보인 '후한서 동이열전 연구'(백산자료원)는 학계에 팽배한 삼국지 동이열전의 절대성에 대한 일대 도발이며, 그 우산에 가린 후한서 동이열전 에 대한 복권의 시도이다. 265쪽. 1만2천원.

(연합뉴스 / 김태식 기자 2005-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