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는 명나라에게 배워야 한다

[역사로 읽는 국제정세] 너무나 닮아가는 '제국의 몰락'

“제한된 국력을 보유한 패권국가가 여러 곳에 적을 둔 상태에서 특정한 지역에 대해서만 무리한 압박을 가했을 경우, 그것이 그 패권국가의 존망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너무나도 당연한 질문이고, 또 그에 대한 대답 역시 너무나도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당연한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패권국가가 하나 있다. 바로 미국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미국뿐만 아니라, 역사속의 수많은 국가들이 이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스스로 패권 몰락의 가속화를 초래하고 말았다. 명나라(1368~1644년)도 바로 그러한 사례에 해당한다.

명나라는 당시 동아시아 세계의 패권국가였다. 하지만, 명나라는 ‘여러 곳에 적을 둔 상태에서 제한된 국력을 갖고 특정한 지역에 대해서만 무리한 압박을 가하다가, 결국 그로 인해 멸망한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할 것이다. 지난 10일 이후 ‘모종의 충동’을 느끼고 있는 부시는 과거 명나라의 사례를 충분히 숙고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명나라의 쇄락에서 배울 점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초반 사이에 동아시아 세계는 대격변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그 단서를 연 것은 야심에 찬 일본 무사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자신감에 찬 도요토미는 센코쿠통일(戰國統一)의 여세를 몰아 임진왜란(1592~99년)을 도발했다.

이 때문에 조선은 물론 명나라까지도 국력을 소진하게 되었다. 전쟁을 도발한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임진왜란 후에 3국은 모두 급격한 변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조선은 근세적인 후기사회로 이행했고, 일본 역시 근세적인 에도시대(江戶時代)로 접어들었으며, 명나라는 아예 멸망하고 말았다. 이때의 후유증 때문이었는지, 이후 조선과 일본은 200년 넘게 나라의 빗장을 걸어두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의 최대 수혜자는 조선도 명나라도 그렇다고 일본도 아닌 바로 제3자 청나라(여진족)였다. 이른 바 어부지리(漁父之利)인 셈이다. 종전까지 여진족 견제에만 몰두하던 조선 관군과 명나라 요동군(만주군)이 남쪽의 일본을 상대하는 사이에, 동북쪽의 여진족이 신속히 통일을 성취하고 청나라(1616~1911년)를 세운 뒤에 급기야 중원의 주인으로 우뚝 선 것이다. 조선과 명나라로부터 ‘오랑캐’라며 천대받던 여진족은 그렇게 해서 동아시아의 새로운 패권국가로 등장할 수 있었다.

여진족이 동아시아의 패권국가로 등장한 것은 역사적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었다. 여진족을 압박하던 명나라 덕분에 여진족이 중국의 주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진족 압박을 주요 국책으로 삼고 여진족을 상대로 끊임없는 ‘대테러전쟁’(토벌작전)을 수행한 명나라가 결과적으로는 청나라의 ‘등극’을 도와주고 만 것이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한된 국력을 보유한 패권국가가 여러 곳에 적을 둔 상태에서 특정한 지역에 대해서만 무리한 압박을 가하다가, 자국의 멸망을 초래함은 물론 오히려 상대방의 강화를 불러온 사례’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그러한 일이 벌어졌는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14세기 중반의 동아시아로 소급하기로 한다. 기울어가는 원나라 치하에서 1364년 오왕(吳王)을 자처하며 세력을 확대한 주원장(명나라 태조)은 1368년에 명나라를 건국하고 몽골세력을 북쪽으로 쫓아냈다.

미국이 배워야 할 중세 동북아 정세

몽골세력이 축출된 이후 동북아에서는 크게 4대 세력이 경쟁하게 되었다. 고려(조선)-명나라-일본-여진족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의 여진족은 ‘부족 할거’의 양상을 띠고 있었지만, 명나라로부터 독립적인 세력을 이루고 있었으며, 명나라와 여진족 사이에는 ‘변장’(邊墻)이라는 국경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당시 명나라는 형식상으로는 당대 최강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리 강하지 못했다. 명나라의 국력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고려(조선)와의 대립 과정에서 보여준 명나라의 취약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명나라는 고려(조선)의 요동수복운동(만주수복운동)을 물리적으로 제압하지 못했다. 그리고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요동수복운동의 주역인 정도전에 대해서 극도의 병적인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었다. 자국의 국력만으로는 정도전을 제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명나라는 이방원 일파를 지원하는 방법으로 조선의 분열을 획책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당시 명나라의 국력은 그 정도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럼, 이러한 상태에서 명나라는 어떠한 방법으로 동북아 패권을 유지했을까? 전반적으로 볼 때, 당시의 명나라는 특정한 하나의 세력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그 ‘악의 축’에 대한 소규모의 ‘대테러전쟁’(토벌전쟁)을 수행하는 방법으로 자국의 패권적 지위를 유지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조선과 관련하여서는, ‘친미사대’ 이방원 일파와 손을 잡고 ‘민족자주’ 정도전 세력을 제거하였다. 그리고는 여진족 토벌을 명분으로 조선을 ‘대테러전쟁’에 끌어들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명나라는 ‘여진족 토벌에 사용하자’면서 5만여 필의 말을 빼내감으로써 조선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리고 여진족에 대해서는 회유와 압박의 방법을 동시에 구사했다. 당시 여진족은 ‘부족 할거’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지만, 과거에는 금나라(1115~1234년)를 세워 북중국을 지배한 적이 있는데다가 이 당시에도 만주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당시 명나라 정부에서는 여진족을 ‘골칫거리’로 생각하고 있었다. 요즘 말로 하면, ‘테러세력’ 혹은 '불량국가 또는 '악의 축' 정도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명나라는 조선을 끌어들여 여진족을 상대로 끊임없는 ’대테러전쟁‘(토벌작전)을 수행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결코 여진족에 대해 한번도 ’결정타‘를 날린 적이 없다. 그저 끊임없이 토벌전만 수행했을 뿐이다. 대규모 전쟁을 하지 못한 것은 그만큼 명나라에게 약점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본이 난을 일으킬 수 있었던 까닭

한편, 명나라는 또 다른 행위자인 일본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거의 견제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은 일본에 대한 견제의 측면도 띠고 있었다. 이러한 대륙측의 견제와 ‘비협조’ 때문에, 일본은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국가적 발전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동북아의 변방에만 머물렀던 일본이 임진왜란을 통해 대륙을 강타할 수 있게 된 데에는, 명나라의 전략적 방치가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일본은 ‘오닌의 난’(1467~77년) 이후 센코쿠시대로 접어들면서 급속도의 경제적·군사적 발전을 거듭하였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대륙을 침략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위와 같이, 제한된 국력을 가진 명나라는 조선을 끌어들여 여진족 압박에 주력하면서 일본에 대해서는 방치하는 전략을 취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당시의 동북아가 그저 평화롭기만 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만주에서는 항상 긴장이 조성되었고, 조선 및 명나라 군대와 여진족간의 싸움이 빈번히 발생했던 것이다.

흔히 조선 전기를 태평성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태평성대라는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상태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명나라가 대규모 전쟁 대신 소규모 토벌전쟁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외형상으로는 태평성대인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위장된 평화’였다. ‘팍스 시니카’(명나라의 패권에 의한 태평성대)는 그렇게 ‘위장된 평화’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바와 같이, 조선과 명나라가 여진족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을 때에, 일본은 센코쿠통일을 거쳐 1592년에는 부산 관문까지 노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조선과 명나라의 주력은 남쪽으로 떼를 지어 내려갔다. 당시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군대는 중원에서 데려온 군대가 아니라 본래 만주를 지키던 군대였다. 여진족 압박에 사용되던 군대를 조선에 보낸 것이다. 명나라의 만주 부대가 임진왜란 때 타격을 받음으로써 만주에서는 힘의 균형이 깨졌으며, 이 틈을 타서 만주의 여진족은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무리한 압박'이 가져올 제국의 몰락

1599년에 일본군은 결국 돌아갔지만, 임진왜란의 승자는 조선도 명나라도 아니었다. 7년 동안 힘을 비축한 여진족이었던 것이다. 그 여진족은 1616년에 청나라를 건국하고, 1627년 및 1636년에 조선을 굴복시켰으며, 1644년에는 명나라를 몰아내고 중원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결국 명나라의 ‘대북 압박’은 명나라 자신의 멸망을 초래하고 여진족의 패권 차지를 도와준 셈이 된 것이다. 이는 ‘제한된 국력을 가진 패권국가가 여러 적들 중에서 특정한 한 적에 대해서만 무리하게 압박을 가하다가 결국엔 자신이 멸망한 사례’에 해당한다.

지금 미국은 국력이 제한된 상태에서 중동과 동북아에서 무리한 압박을 가하고 있다. 중동의 적도 미국에게 벅찬 적이지만, 동북아의 ‘적’은 미국에게 너무나 벅찬 적이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래 수차례의 대결에서 미국은 한번도 ‘그 적’을 제압하지 못했다. 거기에다가, ‘그 적’은 지난 10일 미 본토에 결정타를 날릴 수 있는 ‘한방’이 있음을 선언하고 말았다.

그런데 중동의 적을 상대하던 미국이 갑작스레 동북아의 적에 대한 압박으로 돌아서려 하고 있다. ‘돈줄’을 끊겠다느니, 외교적 압박을 가하겠다느니 등등으로 불편한 심기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불량국가의 ‘못된 버릇’을 즉각 고쳐주지는 못하고 있다. ‘화끈한’ 한방을 날리는 게 아니라, 과거 명나라가 했던 것처럼 또 ‘지루한 공방’을 되풀이하려는 것이다. 어딘가 약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국의 전략적 오류는 동북아에서의 대결을 장기화시킬 뿐만 아니라 중동문제마저 꼬이게 만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다시 중동에 주의를 돌릴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되면 동북아의 ‘그 적’은 미국의 후방에서 결정타를 날릴 기회를 포착하게 될 것이다.

미국은 명나라의 전략적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자신들의 나라가 세워지기 이전에 벌어진 일이라 하여 그저 무시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미국이 명나라에게서 배울 점을 찾지 못한다면, 세계 패권국가 미국은 결국 ‘왕관’을 내려놓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불명예를 입지 않으려면, 미국은 ‘그 적’이 원하는 ‘극적 반전’에 신속히 호응해야 할 것이다.

(디지털말 / 김종성 기자 2005-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