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바로보기] 39. 간도는 어느나라 영토인가

중국이 이른바 ‘동북공정’을 전개하면서 새삼스레 간도의 영유문제가 관심을 끌고 있다. 간도는 우리 이주민이 붙인 이름이다. 해란강과 두만강에 둘러싸인 지형이 마치 섬처럼 보여서 ‘사잇섬’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 사람들은 흔히 연길도라 불렀다. 이름을 달리 부른 것부터 분쟁의 소지를 안고 있다.

물론 간도지역은 고구려 발해의 땅이었다. 그 뒤 이 일대에 살고 있었던 여진들은 수렵과 유목으로 생활했기 때문에 정착농업을 하지 않았다. 고려시기 이들 여진은 두만강을 넘어들어와 노략질을 일삼았다. 그리하여 윤관이 1107년 군사를 이끌고 여진을 몰아내고 두만강 북쪽 700리까지 9성을 쌓아 방어케 했다가 강화를 맺고 곧 돌려주었다. 이설이 있기는 하나 ‘두만강 너머 700리’라고 하면 말할 나위도 없이 오늘날의 간도가 여기에 포함된다.

해란·두만강사이 마치 섬처

여진의 후예인 청나라는 장백산(백두산의 중국 이름)과 간도 일대를 조상의 발상지라 하여 신성지역으로 지정하고 봉금지대(封禁地帶)로 선포했다. 관리인들조차 배설물을 담을 주머니를 차고 다니게 할 정도로 신성하게 대했다.

하지만 조선사람들은 달랐다. 조선의 심마니들은 인삼을 캐거나 벌채하려 끊임없이 백두산을 오르내렸고 농민들은 두만강을 넘나들면서 농사를 지었다. 조선인들은 간도 일대를 중국 사람들이 버린 땅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월경(越境)을 일삼았다.

이렇게 되자 청나라에서는 국경문제에 새삼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조정에 국경선을 긋자고 제의했다. 조정에서는 박권을 파견하여 담판을 벌인 끝에 백두산정계비를 세우게 되었다. 그래서 토문강 주변에 목책과 석축을 쌓아 표시했다. 그런데 분쟁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라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송화강 상류를 가리킨다고 본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물론 간도 일대는 우리의 영토가 되는 것이다.

조선 농민들은 조정에서 금하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월경을 범했다. 경원에 사는 이동길은 농민을 데리고 집단 이주했다가 체포되어 효수의 형을 받았다. 19세기 말에 들어 조선 사람들은 더욱 많이 월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함경도 일대에서 수탈에 시달린 농민, 또는 흉년이 들어 살 길이 없어지자 단봇짐을 싸고 두만강을 건너 이주를 했던 것이다. 이들은 집단으로 이주하기도 했는데 자연발생적 개척이민이었다. 1883년 답사자료에 따르면 압록강 대안에서만 3만여명의 조선인이 이주하여 살았다고 한다.

중국인들, 특히 산동반도의 농민들도 이 무렵 살길을 찾아 이 지방으로 이주하는 일이 잦았다. 이들을 유민이라 불렀다. 그리하여 중국 당국에서는 남만주 일대에 새로운 행정구역을 신설하고 주민을 관리했으며 조선에서도 압록강 대안(서간도 지역)에 28개 면을 설치했다. 이로써 봉금정책은 철폐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튼 이런 사정에서 국경문제가 새로이 등장했다. 1880년대에 들어 청나라에서는 조선 농민의 귀환을 요구하기도 하고 조세를 거두기도 했다. 그렇게 되자 조선 농민들은 정계비와 토문강의 위치 등을 자체 조사하고 대책을 세워달라고 요구했다. 그리하여 파견된 어윤중은 현지를 답사하고 간도지방이 우리 영토임을 주장하면서 청나라에 공동조사를 거듭 요청했다.

19세기말부터 조선농민 대대적 이주

마침내 두 나라 대표가 회담을 벌이게 되었고 안변부사 이중하가 감계사(勘界使)로 임명되었다. 이중하는 끊임없이 고증을 들이대며 백두산과 간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주장했다. 세 차례에 걸친 회담에서 이중하는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폈다. 하지만 합의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대한제국이 성립된 뒤인 1897년 정부에서는 함경북도 관찰사인 조존우에게 국경에 관한 면밀한 조사보고서를 내게 지시했다. 그런 끝에 1901년부터는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임명하여 간도 교민을 관리하게 했다. 이로 인하여 분쟁이 계속 야기되자 청나라의 강경한 항의로 이범윤을 소환하는 조치를 내렸다.

일제는 을사조약을 맺고 구한국의 외교권을 접수한 뒤 조선 땅에 한국통감부를 설치했다. 1907년 통감부에서는 간도파출소를 설치하고 조선 교민의 관리에 나섰다. 그러면서 현지 일본인 출장소장도 “간도는 한국 영토로 간주하고 행동할 것임”이라고 천명했다. 껍데기만 남았던 대한제국 정부도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간도거주 조선인은 청나라에 납세할 의무가 없다고 공포했다.

하지만 일제는 기어코 씻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1909년 일본과 청나라는 이른바 간도협약을 맺었다. 그 요지는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고 북간도 일대에 일본의 영사관을 설치할 것이며 간도 조선주민은 청나라 주민으로 간주하는 대신 길회선(연길~회령간 철도)의 부설권을 일본이 가진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간도의 영유권을 청나라에 넘겨주는 대가로 남만주 철도 부설과 탄광개발의 이권을 차지한 것이다.

“역사적 과정·사료로 국제법적 해결을”

그런 뒤에도 조선의 농민들은 쉴 새 없이 간도로 이주를 거듭했다. 그리하여 압록강 대안을 서간도, 두만강 너머를 북간도로 구분해 불렀다. 북간도는 한반도에 비해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엄청나게 추운 곳이다. 우리 이주민들은 맨발로 걸어다니다가 얼어죽기도 하고, 척박한 땅을 일구다가 굶어죽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고난 속에서 쌀 농사를 최초로 짓기도 하고 콩 따위 잡곡을 심어 높은 농업소득을 올렸다.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난 뒤 대대적으로 조선 농민의 이주정책을 폈다. 곧 이주민의 농업소득을 수탈해가려는 정책에서 나온 것이다. 이들을 개척이민이라 불렀다. 그 결과 만주의 조선 이주민이 1942년 현재 1백56만명을 넘게 되었다.

나라가 망한 뒤 많은 독립지사들이 이곳으로 들어가자 우리의 이주민들은 독립지사들을 먹여주고 입혀주었다. 우리의 독립지사들은 이를 바탕으로 청산리 전투를 벌여 대승리를 할 수 있었고 항일련군을 조직해 일제에 항거할 수 있었다. 그런 과정에서 일제로부터 엄청난 압제를 받았고 살육을 당했다.

해방이 된 뒤 북한에서는 북간도의 4개 현을 조선 영토로 돌려달라는 교섭을 벌인 적이 있다. 그 대신 백두산 천지를 반토막으로 잘라 두 나라의 국경으로 삼았다. 또 중국 당국은 길림성 관할 아래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설정해 조선족의 고유풍속을 지키고 살게 하는 대신 중국 국적을 갖게 조치했다.

우리는 위에서 그 역사적 배경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자, 그러면 오늘날 간도는 어느 나라 영토일까? 분명하게 말하면 분쟁지역이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야기되는 분쟁지역은 전쟁을 통해서도 쉽게 해결될 수 없다. 우리는 역사적 과정과 지난 사료를 통해서 국제법적 접근이 요구된다. 이도 통일에 대비하는 민족적 과제가 될 것이다.

<이이화 / 역사학자>

(경향신문 2005-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