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기]단재 신채호의 생가지를 가다

"그릇된 것 잘 쓰면 그게 성인이네, 그려"

▲ 단재가 태어난 도리미 마을 풍경. 현재 10 여 가구가 살고 있다.
ⓒ2005 안병기
단재 신채호는 곡절 많은 우리 근대사가 낳은 가장 걸출한 인물 중의 한 분이시다. 사상가이자 언론인, 역사가인 동시에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단재는 자신을 낳아준 겨레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사르다 갔다.

간다 간다 하면서 애기 셋 낳고 간다던가. 지난 13일, 마침내 미루고 미뤄왔던 단재의 생가지(生家址) 답사를 떠나기로 했다. 답사의 요체는 현장에서 역사를 배우고 생각하는 것이다. 과거를 통해 얻은 교훈으로 현재나 미래를 예측해 보기도 하고 한 인물의 삶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자신의 생애와 대비시켜 보고 반성의 순간을 갖기도 하는 것이다.

단재의 가계와 성장 배경

단재는 1880년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도리미)에서 태어났다.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는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 속한다. 대전의 남쪽에 위치한 보문산과 논산쪽에서 올라온 대둔산 줄기가 만나서 깊은 골짜기를 이룬 외진 마을이다. 생가지가 있는 곳은 생긴 형국이 마치 새둥지처럼 보인다 해서 봉소골(鳳巢골)이라고도 불린다.

정6품 사간원 정언(正言)을 지낸 단재의 할아버지 신성우는 관직을 그만두자 원래의 고향인 충북 청원군 고두미 마을로 낙향하지 않고 처가가 있는 도리미 마을 안동권씨 촌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게 된다.

단재의 아버지 신광식은 영민한 사람이긴 했으나 병약하였으며 과거에도 실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 보니 신채호의 집안은 사회적으로는 양반의 신분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몰락하여 빈한하기 짝이 없었다.

신광식은 가세가 점점 어려워지자 그의 외가(단재에겐 진외가)가 있던 도리미 마을로 내려와 안동권씨 묘막을 얻어서 살게 된다. 여기서 큰아들 재호와 둘째 아들 채호가 태어났다. 아버지 신광식은 신채호가 8살 되던 해(1887년)에 가난 속에서 허덕이던 생을 마감하였다. 38세란 새파란 나이였다.

빈곤에 견디기 힘들고 아들까지 잃은 신채호의 할아버지 신성우는 그해 며느리와 두 손자를 이끌고 그의 고향인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이사하게 된다. 단재가 이곳 도리미 마을에서 지낸 것은 유년시절이었다. 그것도 단 7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걸어서 단재의 생가지를 찾아가다

그러나 난 단재의 생애에서 여기 도리미 마을 시절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유년시절은 그의 생애의 전과정을 통해 정서적 바탕을 이룬다. 그리고 그 정서가 알게 모르게 그의 생애를 지배하는 것이다. 내가 단재 신채호의 생가터를 찾아가려고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것이다.

도리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단재가 설날이나 추석 같은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선향(先鄕)이었던 고두미 마을까지 따라갔던 적은 없을까. 만일 따라갔다면 어느 길로 해서 당시에 대전부라 불리던 대전 시내까지 걸어 나왔을까. 단재 생가지까지 가는 길은 차를 버리고 걸어가기로 했다. 도보로 가는 것이 어쩌면 단재의 유년시절에 대한 추체험이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보문산을 넘고 구완동 가마터를 지나서 숙종때 문인 권이진의 집인 유회당이 있는 무수동 마을을 거쳐 어남동에 이르는 길은 15km가 넘는 길이다.

이른 점심을 먹고나서 12시쯤 길을 나섰다. 약간 바람이 부는 차가운 날씨였다. 겨울 바람이 기분좋게 뺨을 스친다. 보문산을 넘으면 제일 먼저 만나는 마을이 구완동이다. 이곳의 청자 가마터는 1995년 발굴 뒤 다시 깨끗이 덮어놓았다. 길가는 아주머니에게 무수동 가는 길을 물었더니 큰 길만 곧장 따라가라 한다.

▲ 유회당. '늘 부모를 생각하는 효성스런 마음을 품고 싶다'는 뜻을 지닌 '有懷二人(부모)’에서 옥호를 따왔다.
ⓒ2005 안병기
잰걸음으로 십리쯤 더 가니 무수동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은 앞으로 대전시가 조성할 예정인 전통 한옥마을 후보지로 유력한 곳이다.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호인 유회당은 한창 공사중이었다. 무수동 마을은 제법 고풍스런 맛이 살아 있다. 산서동으로 접어들어 아스팔트 길을 따라간다. 이정표는 어남동까지는 아직도 6km가 남아 있다고 알려준다.

이 팍팍하도록 먼 길을 걷는 내내 나와 동반해준 것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었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라면 이맘때 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토끼몰이를 나갔을까. 밤에는 초가지붕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참새를 잡고 있겠지.

푸른 보리밭이 보고 싶었다. 난 한겨울의 텅 빈 들판을 채우던 보리밭이 좋았다. 삐죽이 반 뼘 정도 올라온 보리싹을 캐다가 끓여먹던 보리 된장국은 얼마나 구수했던가. 추억을 곱씹으며 도리미 마을에 들어서니 시간은 벌써 저녁 5시가 다 돼 있었다.

단재의 어린 시절과 몇 가지 일화

생가로 들어가는 고샅길로 접어들었다. 단재교라 쓰여진 석교를 건넜다.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더니 여기선 모든 것이 단재로 통일되는 것인가? 이 도식성, 이 정감 없는 직설적 어법이 나를 한없이 질리게 한다.

▲ 단재 신채호의 생가지
ⓒ2005 안병기
생가지 유허비는 1988년에 세워졌다. 1992년 여름에 실시한 생가지에 대한 발굴 조사와 주민들의 고증을 참조해서 1993년에 복원한 것이다. 총 3827평의 면적 위에 자리한 생가는 14평 크기의 아담한 초가집으로 지어졌다.

생가는 안채와 곳간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안채 안방문 위에는 '단재정사'라 쓰여진 현판이 걸려 있다. 정사(精舍)란 학문을 가르치려고 지은 집이나 중이 불도를 닦는 곳을 이름이다. 어린 단재가 살았던 집에 굳이 '단재정사'란 현판을 붙인 것은 사리에 들어맞는 일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유리로 차단된 방 안에는 물레를 돌리는 아낙의 모형이 전시돼 있다. 단재선생의 어머니 한씨를 형상화 해놓은 모양이다. 단재의 부모는 논마지기는 고사하고 밭조차 없는 형편이라 산을 개간하여 밭을 만들어 보리와 콩, 옥수수 농사를 지어 허기를 때우는 지경이었다. 그리고 보릿고개에는 남아 있는 식량이 거의 없어 산나물을 캐어 죽을 쑤어 먹어야 했다.

이렇게 적빈(赤貧)한 가정형편 속에서 자라다 보니 단재는 어려서 콩죽만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어른이 된 후에도 단재는 콩죽이라면 질색을 했다고 한다. 방문 앞에 서니 단재와 그의 어머니 박씨가 얘기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엄마, 나 콩죽 먹기 싫은디유."
"얘야, 콩죽이라도 감지덕지해야 한다. 뒷집 개똥이네는 곡기(穀氣) 떨어진 지 벌써 여러 날 되었다는구나."

가난에 얽힌 단재의 일화들은 그가 얼마나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는지 말해준다. 겨울날 추위를 견디다 못한 그는 방 구들을 덥히기 위해 이웃집 장작을 훔친다. 그리고 그 장작으로 방에 군불을 지피면서 수치스러움에 견딜 수 없어 한다.

식량이 떨어져 며칠을 굶다 못해 이웃에 사는 부자집에 구걸하러 갔다가 홀대를 당하고서 "당신 따위를 상대하느니 차라리 굶어 죽는 게 더 낫다. 이제 정신이 좀 드는가? 재물보다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걸 이 기회에 똑똑히 알아두라구"라고 꾸짖고 이내 지나치게 흥분했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기도 한다.

ⓒ2005 안병기
뒤꼍으로 돌아가자 장독대와 무덤 2기가 동시에 나타난다. 단재가 묘막에서 살았다는 사실이 실감나게 다가오는 풍경이다. 묘막이란 무덤 가까이 지어놓고 무덤을 돌보는 묘지기가 살던 집을 말한다.

▲ 단재 신채호 동상. 청주 예술의전당 <청년단재상>보다 한달 일찍 제막되었다.
ⓒ2005 안병기
생가지 옆 광장에 서 있는 단재의 동상을 찾아간다. 1996년 11월 8일 건립되었다고만 쓰여 있을 뿐 동상을 제작한 조각가의 이름 조차도 밝혀져 있지 않다. 두루마기 차림에 왼손에는 책을 펼쳐들고 있고 오른손은 불끈 주먹을 쥐고 있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보인다.

참고로 청주 예술의전당 광장에 서 있는 조각가 안규철이 제작한 청년단재상은 책을 든 왼손은 가슴을 꼭 끌어안고 있으며 오른손은 자연스럽게 그러쥐고 있다.

▲ 단재의 먼 친척되는 권용민 옹
ⓒ2005 안병기
단재 생가지를 나와 생가지 직전에 있는 '단재헌'이란 현판을 단 기와집으로 찾아들었다. 사람을 찾았으나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발길을 돌리려고 하는데 그제서야 노인 양반 한 분이 나와서 방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이 집 주인인 권용민옹(81)은 단재의 먼 친척뻘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단재의 할머니가 자신의 증대고모님이라 한다). 청주에서 살다가 17∼18년쯤 전에 이곳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단재의 생가지를 보살피며 사신다고 한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눠보니 상당히 깨이신 분이었다.

생가지 발굴 조사시 본 생가의 방고래는 그가 어렸을 때 봤던 집보다 훨씬 큰 것 같더라고 했다. 아마도 권옹의 뇌리 속에 남아 있는 단재의 생가지가 무척 초라했던 모양이다. 또한 권옹은 생가가 발굴된 건물지보다 약 반칸 정도 작게 복원된 것이라고 귀띔해준다.

이곳 단재 생가지에 와서 그의 사상과 생애를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전시물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단재의 생가지를 떠나면서

단재 신채호. 그는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다. 단재 신채호는 역사학자, 언론인, 독립운동가로 다양한 활동을 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역사관은 활동하던 시기에 따라 다른 경향으로 나타난다. 그가 초창기에 품었던 역사관은 소수의 영웅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영웅주의사관'이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고대사와 고대문화에 대한 깊이가 축적되면서 그는 그러한 영웅주의 사관을 극복하고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게 된다. 역사의 주체인 민중이 혁명을 주도해야만이 항일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던 그는 폭력적 항일운동과 무정부주의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느 순간 어느 입장에 섰던지간에 독립운동가로서 그가 무의식적으로 추구했던 것은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주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놈 세상에서는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며 세수도 꼿꼿이 서서 했다는 단재. 그는 '영오(詠誤, 그릇된 것을 읊음)'란 한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我誤聞時君誤言, 欲將正誤誤誰眞.
人生落地元來誤, 善誤終當作聖人.
나는 그릇 듣고 그대는 그릇 말하고
그릇된 것 고치자 한들 어느 누가 진짜인지
인생이 태어난 게 본시부터 그릇된 것
그릇된 것 잘 쓰면 그게 성인이 되네 그려
- 이은상 역


우리가 사는 시대는 자기가 말하고 싶은 대로 그릇 말하고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그릇 듣는, 그야말로 각개약진의 시대다. 당연히 누가 진짜인지 구별해내기 헷갈릴 수밖에 없다. 그가 읊은 한시의 구절 그대로 누가 진짜인지만 알 수 있다면 고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단재가 그립다. 그의 사상이. 그는 결코 지난 역사 속의 죽은 인물이 아니다. 그의 민족주의, 민족정신을 오늘 우리의 깡마른 정신을 살찌우는 자양분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버스를 타고 점점 어둑해지는 도리미 마을을 나선다. 가까운 시일내 단재가 19세까지 소년기를 보냈던 고두미 마을에도 다녀와야겠다 마음먹는다.

단재 신채호 연보

1880년, 12월 8일 충남 대덕에서 출생
1887년, 고향인 충북 청원군 귀래리로 이사 이후 이 곳에서 수학하고 성장함
1898년, 성균관 입교, 독립협회 운동에 참여
1901년,「문동학교」에서 애국계몽운동 전개
1905년, 성균관 박사됨.「황성신문」 논설위원에 위촉됨
1906년,「대한매일신보」에 논설진으로 초빙됨
1908년, 순한글잡지 「가뎡잡지」를 편집 발간
1910년, 안창호 등과 중국으로 망명
1911년, 블라디보스톡에서 「권업신문」의 주필로 활동.
1914년, 옛 고구려땅 답사 이후 대고구려주의적인 역사 의식 갖게 됨
1915년, 북경에 체류하며 「조선상고사」의 집필
1916년, 소설 「꿈하늘」 집필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충북)에 피선됨「신대한」을 창간하고 주필 활동
1920년, 박자혜 여사와 북경에서 결혼
1922년, '의열단'의 행동강령인「조선혁명선언」을 기초
1924년, 무장독립운동단체 「다물단」의 선언문을 기초
1925년,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가입함
1927년, '신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
1928년, 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 발표.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국제위폐 사건에 연류되어 체포됨.
1930년, 대련법정에서 10년형을 선고받음. 여순감옥으로 이송됨
1936년, 2월 21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함 / 안병기
 

 

(오마이뉴스 / 안병기 기자 2005-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