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국어기본법` 유감

지난 연말에 무더기로 국회를 통과한 법률 가운데 언뜻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두고두고 소극적 후과를 낼 것 가운데 하나가 소위 ‘국어기본법’이다.

“‘국어’라 함은 대한민국의 공용어로서 한국어를 말한다”고 이 법은 규정하고 있다. 괜한 동어 반복이다. 일제(日帝)로부터 광복된 직후거나 복수의 인종이 제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여 혼란을 겪는 나라 같으면 그럴 만하다. 일부에서 극히 드물게 사용 되는 방언을 제외하면 한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어는 단 한 가지다. 따라서 다(多)민족 국가처럼 법으로 공용어(official lang uage)를 규정하거나 새삼 국어(national language)를 지정할 필요가 없다. 국가주의·국수주의 색채가 강한 일본이 ‘국어’라는 말을 애지중지하는 것이 부러워 흉내를 내는 것인가? 이왕 국어기본법을 만들 바에야 ‘한국어’라는 용어의 적정성 여부를 음미했어야 했다. 국가의 변천과 무관하게 인종과 언어는 그 고유의 이름을 그대로 보전한다. 앵글로색슨(Anglo-Saxon)과 잉글리시(English)는 미국·캐나다·호주 등 세계 어디에 가든 각각 인종과 언어를 나타내는 말로서, 특정 국명(國名)을 따라가지 않는다. 같은 종족이면서 남한에서는 한민족, 북한이나 중국 에서는 조선족, 옛 소련에서는 고려인으로 불리는 것과는 대조적 이다. 또한, 그들의 언어가 영어로는 모두 ‘코리안(Korean)’인 데 남한에서는 ‘한국어’이고, 북한에서는 ‘조선어’이다. 다분히 일제 식민통치와 분단의 정치적 유산인 그런 것들을 바로잡을 때가 됐다. 고구려 역사로 호들갑을 떨 것이 아니라 유구한 한족(韓族)의 언어에 고유한 이름을 붙여 줘야 한다. 통칭 한어(韓語)라고 말이다.

굳이 국어기본법을 만들기로 했다면 한어의 기본을 살렸어야 했 다. 한어는 한글로만 표시될 수 있는 표음어(表音語)와 한자(漢字)에 유래하는 표의어(表意語)로 구성돼 있다. 전자는 대체로 자연현상과 인간의 오감을 표현하는 구어(colloquialism)에 흔하다. 후자는 근대문명을 포함한 문화현상의 표현에 불가결한 한자어(漢字語)로 ‘국어’라는 말 자체도 이에 속한다. 그런 한어에서 한자는 결코 외래어가 아니다. 그리고 한어에는 한족의 혼(魂) 이 담겨 있다. 한자를 뺀 그런 한어는 불구가 돼 온전할 수 없다 . 대중문화에 영합하는 한글 전용으로 한어사전(辭典)을 읽을 줄 모르는 시대의 도래가 눈앞에 보인다. 그런 시대의 방치는 한족의 문화적 자살 교사(敎唆)나 다름없다.

한어 문장의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빨리 읽을 수 있고 읽히도록 해야만 한국의 국가경쟁력에 기여할 수 있다. 순수 한글 문장은 한자 혼용 문장에 비해 시각(視覺)효과가 훨씬 떨어진다. 흑백TV와 컬러TV에 비유할 만하다. 영어 문장에 견주어도 크게 뒤진다 . 영어 문장은 그 첫 글자와 고유명사·고유형용사를 대문자로 표기하며, 전치사·접속사를 독립 품사로 분리한다.

외래어 표기나 강조어법에는 이탤릭(italic)체를 사용한다. 2000 자 미만의 상용한자를 쓰는 일본어는 가타카나(かたかな)로 그렇게 한다. ‘우리당’과 ‘우리은행’처럼 ‘우리’라는 인칭 대명사를 능욕하는 것도 문제지만 고유명사를 따로 표기하지 못하 는 것은 한어의 흠이다. 중요한 어휘(key words)를 강조하거나 동음이어(同音異語)를 구별하는 데 한자는 특효를 낸다. 순수 한글 문장의 약점을 보완하고 한어 문장에 생동을 부여하는 비결은 한자 혼용이다.

조선어 말살에 저항하던 일제 시대나 해방후 문맹을 퇴치하고 경제를 일으킨 지난 60년의 위대한 국가 건설(nation-building) 시대에 한글이 수행한 그 막중한 역할은 아무리 극찬해도 지나칠 수 없다. 그러나 이제는 앞을 내다봐야 한다. 동북아 커뮤니티(community)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한자는 그 시대의 공통 매체로 국력 그 자체가 될 것이 뻔하다. 일본을 포함한 한자문화권에서 만들어지는 많은 신조어(新造語)의 모체는 한자다. 스크래치(scratch)로라도 한자를 배워야 할 판에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유산을 함부로 포기하다니 말이 안 된다.

병적(病的)인 북한의 민족주의처럼 한글 전용이 우민정책(愚民政策)에 봉사하는 꼴이 되지 말아야 한다. 머잖아 세계 10대권에 속할 만큼 커진 경제력을 바탕으로 선진 세계의 문턱에 올라서서 국익을 신장하고 국위를 선양하자면 한글 전용으로는 부족하다.

한자를 혼용하는 퓨전(fusion)한어를 발전시켜야 한다.

<이장춘 / 외교평론가, 前 외무부 대사>

(문화일보 2005-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