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활자의 길’을 찾아서

세계문명사의 돋을새김 고려 활자

인류 문명화에 획기적으로 기여해온 인쇄술은 크게 단순인쇄와 조판인쇄라는 두 단계를 거쳐 오늘날의 기계적 컴퓨터 단계로 발달해 왔다. 기원전 3000년께 메소포타미아에서 출현한 인장은 단순인쇄의 시발이자 인쇄술의 효시다. 간단한 날인이나 탑본 같은 고대 인쇄술이 중세에 이르러서는 나무판이나 금속판에 글자를 새겨 찍는 조판인쇄로 이어졌는데, 목판인쇄와 활자인쇄의 두가지 유형이 있다.

목판인쇄는 나무판 새김글자에 먹칠한 다음 종이로 찍어내는 인쇄이며, 활자인쇄는 여러 소재로 새겨만든 글자로 활판을 만들어 찍어내는 인쇄다. 이러한 활자로는 나무활자와 이른바 ‘교니활자(膠泥活字)’라고 하는 진흙활자, 금속활자 등이 알려져 있다.

금속활자·인쇄술의 일대 혁명

문명사에서 필수였던 책을 찍기 위해 출현한 조판인쇄에서 목판은 제작과정이 길고 많은 경비가 소요되며 판목도 마멸되어 다량의 책을 찍어낼 수 없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활자인쇄다. 활자인쇄 가운데서도 나무활자나 진흙활자는 목판인쇄의 단점을 크게 벗어날 수 없다. 오로지 금속활자 인쇄만이 목판인쇄의 단점을 보완해 책을 신속하게 다량으로 찍어낼 수 있다. 따라서 금속활자의 도입은 인쇄술에서 일대 혁명이며, 문명사에 획을 긋는 대사건으로 평가된다. 지난 1천년 동안 최대사건으로 금속활자 발명이 선정된 것은 이 때문이다.

금속활자 도입을 비롯해 인쇄사 전반을 이해하는 데서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의 하나는 인쇄술이 이른바 중국의 4대 발명품의 하나라는 통념의 허구성이다. 물론 인쇄술에서 중국이 앞선 분야가 없지 않다. 11세기 전반 중국의 필승(畢昇)이 진흙활자(실용되지는 못함)를 만들었으며 12세기 후반에 나무활자를 처음 만든 곳도 중국이었다. 몽골군의 3차 서방원정과 원 제국의 대서방 교류, 13세기 중엽부터 시작한 유럽인 내왕 등을 통해 중국의 목판인쇄술이 서방에 전파되어 인쇄술 발전에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최초의 인쇄술은 첫 단계인 단순인쇄단계에서 출현한 날인인 바, 그 시원은 중국이 아니라 메소포타미아다. 또 인쇄술의 꽃이라는 금속활자의 도입에서는 우리에게 뒤진다. 목판인쇄의 경우 중국사람들은 자존심을 걸고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본임을 극구 부정한다. 대신 신빙성도 별로 없는 몇몇 목판 인쇄본 유물들을 들고 나와 우리보다 앞섰다고 강변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할 때, 인쇄술이 중국 발명품이라는 통념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그간 우리의 인쇄문화는 이러한 통념의 그늘에 가리워 제대로 빛을 내지 못했다. 4년 전 <직지>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때까지 서구사람들은 한국이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소유국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1천년 동안의 최대사건으로 금속활자 발명이 꼽힐 때도 발명자는 구텐베르크로 꾸며졌다.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본과 금속활자본을 함께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인쇄문화에 관한 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인쇄문화의 당당한 창도자라고 한들, 하등의 하자가 없다.

일찍이 고려인들은 발달된 금속주조기술에 기초하여 13세기 초 이미 금속활자로 <상정예문> 같은 책을 찍어냈다. 그러다가 고승 백운화상의 시자 석찬과 달잠이 스승의 가르침을 널리 펴기 위해 비구니 묘덕의 시주를 받아 화상이 입적한 지 3년이 지난 1377년 7월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선종의 요체를 초록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일명 <불조직지심체요절>, <직지심체>, <직지심경>, <직지>, <심요>)을 간행했다. 그 목판본으로는 여주 취암사본이 있으며, 사본으로는 흥덕사본과 취암사본 두 종이 있다.

현재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직지심경>은 흥덕사본인데, 20세기 초 10년간이나 서울주재 프랑스 공사로 있던 뿔랑시가 수집한 것을 1911년에 한 보석상이 경매장에서 180프랑를 주고 사들여 소장하다 1950년께 이 도서관에 기증했다. 이 진서 중의 진서가 유럽사람들에게 처음 알려진 것은 72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도서의 해’를 맞아 이 도서관에서 개최한 ‘책’ 전시회를 통해서였다. 그밖에 고려 금속활자의 실물로는 남북한 박물관에 각각 ‘복’자와 ‘전’자가 하나씩 소장되어 있다.

최초의 목판·금속본 함께 보유

중국사람들은 활자인쇄를 최초로 시도했지만 여러 시행착오를 겪는 통에 금속활자로의 발달은 우리나 독일보다 뒤쳐졌다. 필승이 고안한 활자는 재료가 찰흙이고, 조판용 접착성 물질도 송진에 종이 태운 재를 섞어 만든 것이여서 응고력이 약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뒤 원나라 초에 요추(姚樞)가 접착성 물질을 송진에 기름을 섞어 만들어 봤으나 역시 응고력이 약해 여의치 않았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좀 길게 만든 활자 끝에 구멍을 뚫어 철사로 꿰어 고정하는 주석활자를 시도했는데, 먹물이 잘 묻지않는 데다 인쇄할 때 활자가 잘 부서져 이 시도도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중국에서 금속활자 인쇄에 성공한 것은 15세기 말엽 명나라 때다. 우리의 <직지>보다 한 세기나 뒤에 나온 인본들을 보면 활자의 주조나 조판기술은 우리의 것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허술하다.

한편, 고려 최초의 금속활자보다 200여 년, <직지>보다 70여 년 뒤에 나온 독일의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는 주물재료로 납 합금을 선택하고 구식도구 대신 나사식 압인장치(프레스)를 개발해 썼다. 또 특수한 유성잉크를 사용하는 등 창의성이 돋보이는 선진 인쇄술임에는 틀림이 없다.

중국학자들은 이에 대해 긴 입방체로 만든 활자에 작은 구멍을 뚫은 뒤 철사를 끼워 고정하는 기법은 중국 원대의 주석활자를 본받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구텐베르크 인쇄술은 조선 세종 때 완성한 완전조립식 활자인 ‘갑인자’ 인쇄술과 수준이 엇비슷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따라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는 문명사에서 큰 업적이기는 하지만, 분명 ‘발명’은 아니며, 선행 인쇄술에 대한 창조적 전승으로 봐야 할 것이다.

중국·독일보다 앞서 인쇄문화 선도

그렇다면, 전승된 그 선행 인쇄술은 과연 어디, 누구의 것이었을까? 금속활자 인쇄의 비조격인 우리로서는 누구보다도 더 절실히 사색을 해야 할 대목이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듯이, 문명은 모방하는 속성으로 인해 선진으로부터 후진으로 이전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미국의 저명한 인쇄문화 연구가 카터는 고려 말과 조선 초 무렵 ‘한국은 인쇄술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금속활자의 사용을 고도로 발전’시켜 중국에 ‘역수출’까지 했다고 지적하면서, 활자인쇄가 고려로부터 유럽에 전해졌을 개연성은 있으나 그 ‘확실한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오늘의 사정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렇지만 구텐베르크의 ‘발명’과정을 곰곰이 훑어보면, ‘발명’이라기보다는 어딘가로부터, 특히 이땅에서 전승되었을 개연성이 짙게 감지된다. 고려인들이 200여 년 동안(13세기 초~1434년의 ‘갑인자’)이나 걸려 완성한 금속활자 인쇄를 구텐베르크는 불과 10년 동안(1440~1450년)에 이루어냈다고 한다. 그는 성지순례를 위한 기념품이나 만드는 금속세공사였다. 활자제작 경험은 물론, 목판인쇄도 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이렇게 단시일 안에 상당히 높은 기술수준의 금속활자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는 역설적으로 금속활자 인쇄술을 새로 개발한 것이 아니라, 어디로부터 배웠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 즈음 중국은 진흙활자니 주석활자니 하는 미로 속을 헤매면서 제대로 된 금속활자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유일한 제작국이던 고려로부터 전수된 것은 아니었을까 ? 아직 연구 미흡으로 이렇다 할 실증자료를 제시할 수는 없다. 다만 개연성있는 방증자료 몇 가지는 내놓을 수 있다. 고려 말 조선 초에 회회인을 비롯한 색목인(중국 원대에 유럽이나 서아시아, 중앙아시아에서 온 외국인)들이 고려와 조선에 자주 내왕하고 정착까지 했으며, 고려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거란(요나라)이 서천하고, 여진이나 중국(명대)은 사신을 중앙아시아의 통일제국 티무르의 수도 사마르칸트까지 파견했다. 일찍이 7세기 중엽에 고구려 사신이 찾아간 사마르칸트는 동서방물산의 집산지로서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 상인들이 이곳에서 구입한 동방물품들을 독일 라인강을 통해 구텐베르크가 처음 인쇄술에 도전한 스트라스부르나 첫 인쇄물을 간행한 마인츠 같은 연안 도시로 운반해 갔다. 구텐베르크도 ‘발명’ 아닌 ‘전송’ 고려 금속활자가 전성기를 맞은 14세기 말부터 15세기 전반까지 전개된 이러한 여러 계기를 통해, 새 인쇄술이 직간접적으로 독일에 알려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알려졌을 법한 길을 ‘활자의 길’이라 이름해 본다. 이 길이야말로 고려 금속활자 인쇄술이 서구에 전해지는 문명교류의 한 통로였을 것이다. 한 방송사가 이 ‘활자의 길’을 찾으려고 몇년 동안 노력을 기울였으며, 학계도 관심을 보인 바 있다. 우리의 연구가 아직 80년 전 카터가 지적한 개연성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점은 개탄스럽지만 결국 그 길은 찾게 될 것이다.

<정수일 교수>

(한겨레신문 2005-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