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정계비에 적힌 그 강… 토문강 찾았다

조선·청의 국경… 두만강과 별개의 강으로 드러나
백두산 부근 북 영토서 시작, 중 송화강 본류로 흘러
"간도지역 영유권은 한반도에" 우리측 주장 확인

간도(間島)의 영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국경 분쟁을 일으켰던 토문강(土門江)의 실체를 본지 취재팀이 확인했다. 토문강은 현재도 백두산 천지 부근 북한 땅에서 발원해 동북쪽으로 흐르며, 천지로부터 동쪽으로 18㎞ 떨어진 ‘17호 국경비’에서 중국·북한 국경과 만난 뒤 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송화강(松花江)과 합류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토문강이 중국측의 주장처럼 현재의 두만강이 아니라, 별도로 존재하는 강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토문강이 두만강과 별도로 실재하는 강이라면 한반도와 중국의 국경 설정에 대해 ‘동쪽으로 토문을 경계로 한다’는 1712년(숙종 38년) 백두산 정계비의 문구는 그 의미를 다시 따져봐야 한다. 현재 연변 조선족자치주에 해당하는 토문강 동쪽 동간도(東間島) 지역의 영유권은 한반도 쪽에 있다는 우리의 전통적 주장이 재확인 되기 때문이다. 1909년 일제가 조선을 대신해서 청나라와 체결해 간도 땅을 넘겨준 ‘간도협약’이 국제법상 무효라는 주장도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중국 길림성 도문시(圖們市)로부터 백두산 아래 이도백하진(二道白河鎭)까지 두만강변을 따라 이어진 도로는 2차선 비포장 길이다. 이 길로 접어들기 위해 화룡(和龍)에서 남평진(南坪鎭)으로 향하는 도중 무장한 중국군이 차를 세운다.

“탈북자를 찾아내려는 겁니다. 저 사람들 요즘 독이 바싹 올라 있단 말입니다.”

현지 안내인이 목소리를 낮춰 설명한다. 서쪽으로 차를 몰아 광평(廣坪)의 군부대를 지난 뒤부턴 마을조차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부턴 백두산 기슭이다. 이 길과 만나는 네 줄기의 하천은 모두 오도백하(五道百河)로 흐르는 물줄기다. 그 중 세 번째 강줄기는 북한 쪽에서 흘러나오는 강이다.

‘기점으로부터 301㎞’라고 씌어진 작은 표지석을 지나자 얼마 안 가 그 세 번째 ‘강’이 보인다. 폭 15~20m 정도의 이 강줄기는 물이 말라 바닥이 훤히 드러나 있다. 강바닥 돌들 위로는 얼어붙은 눈이 단단히 덮여 있다. 강줄기를 따라 약 3㎞를 걸어 올라갔다. 강줄기는 자작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숲 속에서 점점 경사가 급해진다. “더 들어가면 자칫 국경을 넘어갈 수가 있소! 그만 돌아가오.” 안내인의 목소리다. 앞쪽에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하나 보인다. 언덕으로 이어진 길을 200m 정도 걸어가니 정상에 초소가 하나 있다. 창문으로는 김이 뿜어 나온다. 중국군의 초소겠거니 생각하고 그 앞까지 걸어간 순간, 갑자기 초소에서 외투를 입은 군인 한 명이 문을 열고 나온다. 북한 군인이다.

이쪽을 본 북한 군인은 눈을 크게 뜨더니 순간적으로 어깨에 맨 총에 손을 댄다. 그도 무척 놀란 표정이다. ‘이미 국경을 넘어선 건 아닐까’란 생각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초소 왼쪽에 붉은 색으로 글씨가 씌어진 비석이 있다. ‘中國 17’. 백두산 천지 남쪽으로부터 두만강 상류까지 중국과 북한의 국경을 표시한 21개의 국경비 중 열일곱 번째 비석이다. 비석 앞에서 동서 방향으로 이어진 좁은 길은 중국군과 북한군이 공동으로 순찰하는 ‘순라길’이다. 국경까지 온 것이다.

여차하면 총을 겨눌 기세인 북한 군인을 뒤로 하고 오른쪽 강줄기로 향한다. 계속 가면 백두산 천지까지 이어진다는 순라길과 강이 만나는 곳에 작은 나무다리가 있다. 강 폭은 약 5~6m 정도. 물이 말라 있었고 숲에 가려 시야도 좁았지만, 상류는 바로 앞 북한 땅 깊숙한 곳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아마도 조금만 더 상류로 올라가면 백두산 정계비로부터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 토퇴(土堆)와 석퇴(石堆)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갈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이곳 주변에서 20년 동안 산림감시원으로 일하고 있는 중국인 A씨는 “북한쪽으로부터 물줄기가 나오는 하천은 이 근처에서 이곳 하나뿐”이라고 말했다. 겨울엔 건천이지만 봄부터 8~9월까지는 물이 흐른다고도 했다.

‘조선왕조실록’ 등에 의하면,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진 천지 동남쪽의 분수령은 토문강의 강원(江源)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토문강의 흐름도 일정하지 않았다. 청나라측은 국경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토퇴·석퇴를 쌓을 것을 조선측에 주문했다. 바로 이 토퇴·석퇴가 이어져 있던 강이 바로 토문강이었다. 1885년과 1887년 조선과 청의 국경회담 결과 양측이 작성한 지도에서 토퇴·석퇴가 있었던 강은 현재의 중국 지도에는 ‘오도백하(五道白河)’로 표시돼 있다. 간도협약 직후인 1909년 일제 통감부가 작성한 지도 역시 오도백하를 ‘토문강’으로 명기하고 있다.

육락현(陸洛現) 간도되찾기운동본부 대표는 “많은 자료들을 검토한 결과 토퇴·석퇴가 있는 토문강 발원지는 현재 북한 영토임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토문강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어떤 지점에서 땅 밑으로 복류하고 다시 땅 위로 흘러 북쪽으로 방향을 바꾼다’는 기록과 들어맞는 것은 ‘17호 국경비’ 옆의 하천이다.

(백두산=특별취재팀)

(조선일보 2005-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