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학자 "淸에 간도 준 것은 부당"

1906년 어느 날 일본 도쿄(東京) 아오야마(靑山)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노다 지사쿠(篠田治策)의 집 앞에 말 탄 군인 한 명이 멈춰 섰다.

한국주둔군사령부의 사이토(齋藤)중좌(중령). 러일전쟁 당시 중국 뤼순(旅順)을 점령한 일본군에 시노다는 국제법 문제를 다루는 군정관으로 참여, 당시 군 참모였던 사이토와는 잘 아는 사이였다.

사이토는 보안을 당부하며 시노다에게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뺏은 일본이 영토문제를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해 간도에 관헌을 파견하려는데 거기서 법적인 문제를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큰 소송을 맡아 분주하던 시노다는 처음 고사했으나 사이토가 ‘국가를 위해서’라는 대의명분을 들먹이자 흔쾌히 승락했다. 그리고 반년 여 뒤, 1907년 8월 19일 북간도 룽징(龍井)에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가 섰다.

도쿄제국대 박사로 후에 경성제대 총장까지 지낸 시노다는 짧게는 일본이 간도를 청에 넘겨주고 파출소를 폐쇄하는 1909년 11월 2일까지 2년여 동안, 길게는 그가 ‘백두산정계비’라는 책을 내는 1938년 무렵까지 간도문제에 관한 정통한 일본학자였다.

국내외 간도문제 연구자들이 늘 참고자료로 인용하는 그 ‘백두산정계비’가 ‘간도는 조선 땅이다-백두산정계비와 국경’(지선당 발행)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국내 번역 출간됐다.

시노다는 이 책에서 국제법으로 볼 때 백두산정계비는 국경조약으로 아무런 효력이 없으며, 일본이 만주장악을 위한 야욕을 채우기 위해 간도를 청에게 넘겨준 것은 부당할 뿐 아니라 후대에 큰 분쟁을 낳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머리말에서 그는 1931년 7월말 백두산정계비가 사라진 것을 통탄하며 ‘건립 당시의 사정 및 후년에 가서 중대한 국제적 쟁의를 야기케 할 역사적 사항을 생각한다면 이를 인멸토록 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해 간도문제가 한ㆍ중외교문제로 비화할 것을 일찌감치 예견했다.

책에는 조선과 청이 간도문제를 둘러싸고 주고 받은 각종 외교문서, 통지문이 빠짐없이 실려 있어 간도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역사적인 갈등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중립지대의 성격이 변질되어 국경을 정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 뒤, 양국이 본격으로 벌인 1885년 을유감계담판(乙酉勘界談判)과 1887년 정해(丁亥)감계담판 내용을 그대로 소개해 사료로도 가치가 높다.

여러 자료를 통해 그는 ‘두만강은 물론 압록강 건너 땅까지 간도 전체가 중립지대이며 그 영유권은 조선에도, 청에도 없다’고 결론 내렸다.

만주족이 명을 위협할 동안 근심거리를 없애려고 조선을 두차례 침략한 뒤 간도를 누구도 들어와 살지 않는 중립지대로 하자고 제안했고, 조선도 이를 받아들인 것이 이 땅의 성격이라는 것이다.

후대에 백두산정계비가 섰지만 ‘당시 목극등(穆克登)은 (비를 세운) 그 지점을 도문강, 즉 두만강의 발원지로 잘못 알았고’ 그래서 ‘법률행위의 요소에 착오가 있었던’ 무효이며, 을유년과 정해년의 국경회담은 모두 결렬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노다는 “학술상의 논거로 볼 때 이미 압록강 건너 땅을 청의 영토로 한 이상, 두만강 건너 땅은 한국영토로 하는 것이 공평하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그리고 일본정부의 정치논리에 따라 자신이 대변해오던 “간도는 한국 땅”이라는 주장이나, 학자적인 양심에 비추어서 만주협약으로 하루 아침에 간도 전체가 중국 땅이 된 것을 두고 “아! 만사가 끝이 났다. 지금 와서 비분강개하여도 무익한 일”이라고 한탄했다.

책을 번역한 신영길 한국장서가협회 명예회장은 “일제가 대륙진출의 발판을 구축하기 위한 흥정으로 간도협약을 체결해 석을수(石乙水)를 한ㆍ청 국경으로 삼음으로써 간도가 우리 강역에서 떨어져나가고 말았다는 것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며 “시노다의 책은 학자적 입장에서 공평하게 간도는 조선 땅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 김범수 기자 2005-2-6)